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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라면 유대인처럼 > 고재학, 2010

by Ditmars 2021. 1. 26.

<부모라면 유대인처럼> 고재학, 2010

 

 영상매체는 지속적으로 인간의 주의력과 감각을 자극해 묘한 이완감과 편안함을 준다. 그래서 반복적으로 영상물을 보고 싶은 욕구가 생기며, 이런 경험은 약물에 중독되는 과정과 매우 유사하다.

<p.39>

 

 어느 선량한 부부가 불가피한 사정으로 이혼을 했다. 남편은 성질 나쁜 여자와 재혼해 새로 얻은 여자와 똑같이 나쁜 사나이가 되었다. 아내 역시 나쁜 사나이와 재혼했지만, 얼마 후 그 사나이는 선량한 사람이 되었다

<p.44>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에게는 뚜렷한 공통점이 있다.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공부의 목적이 뚜렷하다는 점이다. 스스로 하고 싶어서 하는 공부가 아니라, 남이 시켜서 하는 공부는 뒷심을 발휘하기 어렵다. 과도한 사교육과 선행학습은 학생들의 흥미를 떨어뜨리고 학습동기를 갉아먹는 주요인이다. 자신이 설정한 역할 모델이나 직업관 등 내적 동기에 의해 공부를 해야지, 외부의 강요로 떠밀려서 하는 공부는 에너지가 금세 소모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부모들의 역할은 분명해진다. 자녀에게 동기 부여를 하는 것, 이때 동기 부여의 방법으로 '칭찬'과 '격려' 이상 가는 것이 없다.

<p.126>

 

 "자식을 불행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언제나 무엇이든지 손에 다 넣어주는 일이야."
 - <에밀> 루소

<p.144>

 

 기대감은 전달하고 기대치는 전달하지 않는다.

<p.144>

 

 창의력은 공부만 해서는 절대 길러지지 않는다. '여유'와 '놀이'가 필요하다. (...) 어린 학생들은 놀아야 한다. 재미있는 일을 해봐야 한다. 그래야만 창의적이 된다.

<p.173>

 

 유대인들은 평소 자녀들과 대화하거나 잠자리에 든 아이에게 위인전을 읽어줄 때, 반드시 유대의 전통을 빛낸 인물을 모델로 제시한다. 자신의 관심 분야에서 뛰어난 성취를 이룬 유대인 위인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어린이들은 이들을 동경하고 선망하면서 자신의 꿈을 키워나간다. 이른바 '동일시 작용'이다.

 어린이가 어떤 인물을 자신의 역할 모델로 삼느냐는 교육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어린이들은 사회화 과정에서 동일시 작용을 통해 자신이 좋아하고 숭배하는 인물을 닮으려 노력한다. 인물의 태도나 가치관을 물론, 말씨 등 외모까지 받아들이고 내면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유대민족 가운데 위대한 인물의 행동과 가치관을 내면화함으로써 민족에 대한 긍지를 느끼는 효과도 있다. 어린이가 존경하고 배울 수 있는 적절한 역할 모델의 제시는 아이의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친다. 진로의 방향을 잡는 역할도 한다.

<p.201>

 

 한국의 자녀교육은 오로지 지식 향상에 집중되어 있다. 지식의 양을 늘리기 위해서라면 빚을 내서라도 사교육을 시키고, 이사나 이민도 마다하지 않는다. 학교에서도 지식을 더 많이 주입하는 데만 급급하다. 과중한 정보량에 버거워하는 아이들을 붙잡고 어떻게든 지식을 습득해 대학에 합격하도록 강요하는 게 가정을 물론 학교교육의 전부가 돼버렸다.

 문제는 이렇게 강요된 지식은 자신의 것이 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해하고 응용할 수 있어야만 진짜 지식이다. <생각의 탄생>이라는 책을 쓴 루트번스타인 부부의 표현을 빌리자면 "실로 허약하며 쓸모없고, 교육적 실패의 결과물에 불과하고, 겉만 번지르르한 학문적 성취의 외장"일 뿐이다.

 지식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여러 조건 중 하나일 뿐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지식을 자신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지혜다.

<p.214>

 

 '재산이 많으면 그만큼 근심이 늘어나지만, 재산이 전혀 없으면 근심은 더욱 많아진다.'
 '가난은 수치가 아니다. 그러나 명예라고 생각하지도 말아라.'
 '돈은 인간에 대해 옷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정도밖에 못 한다.'
 - 유대 격언

<p.234>

 

 <탈무드>에서는 자기보다 한 계단 위에 있는 사람을 친구로 사귀라고 한다. 머리 좋고 공부 잘하는 사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한 단계 성숙시키는데 도움이 될 친구를 사귀라는 뜻이다. 지식과 지혜, 인격적인 성숙을 모두 아우르는 말로, 무엇이든 더 나은 삶을 살아가도록 자극을 주고 하나라도 배울 수 있는 친구와 사귀어야 한다는 강조인 셈이다.

<p.240>

 

 단, <탈무드>는 다음 두 가지 경우에는 거짓말을 해도 좋다고 말한다. '용서되는 거짓말'인 셈이다. 첫째, 누군가 이미 산 물건에 대해 의견을 물어왔을 때, 설령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좋다고 해야 한다. 둘째, 결혼한 친구의 부인이 아름답지 않더라도 "부인은 대단한 미인이니 행복하게 살라"라고 거짓말을 해야 한다.

<p.248>

 

 '사랑은 잼같이 달지만, 빵이 없이 그것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라는 유대 격언이 있다. 인간이 잼만으로 살 수 있을까? 그렇다고 빵만으로는 맛이 없다.

<p.263>

 

 "지식은 유한하지만, 치열한 삶의 태도나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인성은 사람의 인생을 좌우하며 더 나아가 몸담고 있는 조직의 미래까지 좌우한다."
 - 안철수

<p.265>

 

 '이미 한 일을 후회하기보다는 꼭 하고 싶었는데 하지 못한 일을 후회하라.'
 - 탈무드

<p.270>

 

 '가장 큰 실패는 실패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일이다.'

<p.272>

 

 남을 헐뜯는 일은 살인보다도 더 위험하다. 살인은 한 사람만을 해치지만, 험담은 꼭 세 사람을 해치기 때문이다. 험담을 하는 사람 자신과 그 말을 비판 없이 그냥 듣고 있던 사람, 그리고 그 험담의 주인공을 동시에 말이다.

<p.275>

 

 인격은 말에 의해 나타난다.
 -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p.276>

 

 '말하기는 태어나면서 곧 배우나, 입을 다무는 것은 어지간해서 배우기 힘들다.'
 - 유대 격언

<p.276>

 

 <탈무드>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자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사람이다'라고 적고 있다. 자신의 실패를 항상 남이 비웃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남들이 종일 자신을 주시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자신감을 잃고 아무 일도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남에게 관심을 둘 만큼 한가하지도 않고 타인에게 관심도 없다. 그러니 자신이 조금 잘못했다고 해서 주눅 들 필요는 없다. 어차피 신이 아닌 이상 인간은 누구나 실수한다.
 - 마빈 토케이어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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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연한 기회로 오래전 방영한 <공부하는 인간>이라는 제목의 KBS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국적과 인종, 성별이 다른 네 명의 하버드 대학교 학생들이 세계의 여러 나라를 다니며 각 나라의 공부법에 대해서 알아보는 내용이었다. 여러 나라들 속에는 당연히 한국도 있었고, 중국, 이스라엘, 미국, 프랑스 등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중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의 공부법은 내게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유대인의 공부는 책을 읽고 이해한 뒤 암기하고 응용하는 일반적인 공부와는 확연하게 달랐다. 그 차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도서관의 풍경이었다. 책장 넘어가는 소리만 겨우 들릴 정도의 정숙한 분위기의 여느 도서관과는 다르게 유대인 도서관에서는 학생들이 한 책상에 둘씩 짝을 지어 앉아 서로 큰 소리로 논쟁을 하고 있었다. 그 말소리는 천장이 높은 도서관 건물 내에서 이리저리 부딪히며 의미를 알 수 없는 소음이 되어 마치 우리나라의 시끌벅적한 시장의 분위기와 흡사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 틈을 비집고 한 책상을 차지하고 있는 두 학생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면 그들이 공부한 내용에 대해 토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공부한 내용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그에 대한 자신의 의견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를 조목조목 얘기하면 다른 학생은 그 이야기를 듣고 또 자신의 의견과 근거를 덧붙인다. 그리고 둘의 대화가 깊어질수록 논쟁은 가지처럼 뻗어 더 심화된 내용까지 끌어와 토론을 하게 된다.

 

 이 모습을 보고 처음 떠올랐던 생각은 '저렇게 할 이야기가 많나?'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떠오른 생각은 '저렇게 해서 공부가 되나?'라는 생각이었다. 주로 문제를 풀면서 이해한 내용이 옳은지 그른지를 빠르게 판단해야 하는 공부에 익숙한 나에게는 너무나도 비효율적인 공부법처럼 보였다. 그 시간에 하나의 지식이라도 더 암기하고 하나의 문제라도 더 풀어야만 할 것 같았던 것이다. 공부를 하다 보면 대화와 토론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 것은 분명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모르는 내용을 물어보거나 혹은 내가 이 내용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확인하는 수준에 그치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문제의 의도와 해답이지 다른 사람의 주장이나 의견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내가 지금까지 했던 공부와 유대인의 공부의 차이를 한 가지 알 것 같았다. 그것은 바로 정해진 답이 있는 공부와 정해진 답이 없는 공부의 차이이다. 나를 비롯한 한국의 학생들은 답이 있는 공부만 해왔다. 그래서 어려워하는 것이 주관식 서술 문제이고, 논술과 면접이다. 오죽하면 논술과 면접에도 답을 찾아 그것을 외우려 하겠는가. 그러나 유대인의 공부는 답이 없는 것에 대한 공부이다. 탈무드의 내용을 나누며 어떤 것이 옳은 지에 대해 토론하고 학교 수업에서도 선생님이 가르치는 것은 답이 아니라 답을 찾는 방법이다. 그래서 그들은 도서관에 모여 답이 없는 문제의 답을 찾기 위해 서로 대화하고 토론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부 방식은 인생을 살아가는 태도와도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총 16년을 정해진 답이 있는 공부만 하다가 정해진 답이 없는 사회에 나온 나를 비롯한 이 시대의 청춘들은 자신만의 답을 찾는 일에 많은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인생은 뒷장이 없어 해답을 찾을 수 없고 선생님이 없어 해설을 찾을 수 없다. 심지어는 답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문제를 풀어야 하고 한 번 틀린 문제는 다시 풀 수도 없다. 답을 찾는 훈련을 충분히 하지 못한 우리들은 그 사실이 참으로 막막하게 느껴만지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유대인의 공부법처럼 대화하고 토론하며 답을 찾아가는 공부를 했다면 지금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이 지금보다는 덜 두렵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