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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김초엽, 2019

by Ditmars 2021. 1. 26.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2019

 

 엄마와 딸이라는 관계는 흔히 애증이 얽힌 사이로 표현된다. 딸을 사랑하지만 자신의 모습을 투사하는 엄마와 그런 엄마의 삶을 재현하기를 거부하는 딸.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앓는 딸과 딸에 대한 애정을 그릇된 방향으로 표현하는 엄마. 여성으로 사는 삶을 공유하지만 그럼에도 완전히 다른 세대를 살아야 하는 모녀 사이에는 다른 관계에는 없는 묘한 감정이 있다.

<p.239>

 

 모든 상황은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사람을 무너뜨린다.

<p.264>

 

 재경은 분명히 우주 영웅이었다. 재경은 세계를 돌아다녔고, 여러 번의 우주 미션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재경은 수많은 소녀들의 삶을 바꾸었을지도 모른다. 최후에 다른 선택을 했다고 해서 재경이 바꾸었던 숱한 삶의 경로들이 되돌려지는 것은 아니다.

<p.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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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과 <관내 분실>을 포함한 여러 SF 단편의 모음집이다. 화학을 전공하고 생화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김초엽 작가는 본인의 상상력에 디테일한 과학 지식과 특유의 감수성을 입혔다. 그간 읽은 SF 소설이라면 인류와 과학 기술의 진보 속에서 기계와의 전쟁이나 인류의 운명 등을 고민하는 차가운 소설밖에 없었는데 이 소설은 SF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마치 미래에서 온 터미네이터가 도착한 곳이 마침 벚꽃이 만개한 5월 윤중로였는데, 따뜻한 봄 햇살 아래 흩날리는 벚꽃 잎을 차가운 기계손으로 잡아보려고 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 책을 알게 된 계기가 다른 책들과는 달라 한 번 적어 보고 싶다. 작년 3월 경, 나는 독서 모임이라는 곳에 가보고 싶었다. 독서를 취미라고 하긴 그렇고 '책을 좋아해요' 정도는 얘기할 수 있을 만큼 종종 책을 읽던 시기였다. 지금도 취미라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는 없지만 '종종'이라는 단어보다는 '자주'라는 단어를 쓸 수 있을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아무튼 그 무렵 나는 독서 모임에 가보고 싶었다. 독서 모임이라면 본래 같은 책을 읽고 서로의 소감과 생각을 나누는 것이 주목적이겠지만 나는 그보다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과의 새로운 대화가 그리웠던 것 같다.

 

 대학생 시절에는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이 내가 수용할 수 있는 양보다 많을 때 피로감을 느끼곤 했다. 누군가를 알게 되고 나와의 관계를 정립하기도 전에 또 한 무리의 사람들과 친해지면 이전 사람에 대한 내 진심이 퇴색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직업을 갖고 가정을 꾸린 지금의 안정적인 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기회가 없어진 단조로운 일상에 오히려 피로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나를 잘 아는 사람들, 즉 가족, 친구 간의 대화는 뭔가 내 속마음을 다 꺼내기에는 민망한 구석이 있다. 직장 사람들은 서로 알지만 동시에 서로 모르는 사람들과 같아 대화는 늘 수박 겉핥기 식으로 이루어지곤 한다. 있는 그대로 얘기하자면 너무 진지하거나 감성이 충만한 대화를 나를 모르는 사람들과는 편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게 독서 모임은 민망함 없이 마음껏 그런 오글거리는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곳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는 서로가 서로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다. 그래서 독서 모임 운영자로부터 4월의 독서 모임을 위해 이 책을 읽고 오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단조로운 일상 속 작은 설렘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의 설렘은 실현될 수 없었다. 인류의 달력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신이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심술로 2020년 3월 이후를 통째로 찢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 나만의 설렘을 가지고 있다. 언젠가 신의 심술이 누그러질 즈음 독서 모임을 나가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