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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미안 > 헤르만 헤세, 1919 많은 이들이 채 열한 살도 되지 않은 아이가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걸 믿지 않으리란 사실을 안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을 더 잘 아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자기 느낌의 일부를 생각으로 바꾸는 법을 배운 어른들은, 아이에게는 그런 생각이 없으니까 체험도 없으려니 여긴다. 하지만 나는 살면서 다시처럼 그토록 깊이 체험하고 고통받은 적이 드물었다. "하지만 내가 지난가을에 저 앞에 있는 내 의자에서 자리를 옮겨야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졌을 때는 제대로 이루어졌지. 알파벳순으로 나보다 앞에 있는 어떤 애가 여태 아파서 못 나오다가 그 때 갑자기 나타난 거야. 누군가 자리를 내줘야 해서 자연스럽게 내가 그렇게 했지. 내 의지는 기회가 오면 곧바로 붙잡을.. 2022. 2. 11.
< 상실의 시대 > 무라카미 하루키, 1989 기억이라는 건 왠지 이상한 것이다. 실제로 내가 그 초원 속에 있었을 때, 나는 그런 풍경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특별히 인상적인 풍경이라 할 것도 없었고, 십팔 년이 지나고도 그 풍경을 세세한 부분까지 기억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 나로선 풍경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던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생각했고, 그때 내 곁에서 나란히 걷고 있던 아름다운 한 여자를 생각했고, 나와 그녀를 생각했고 그리고 다시 나 자신을 생각했다. 그때는 무엇을 보든, 무엇을 느끼든, 무엇을 생각하든, 결국 모든 것이 부메랑처럼 자기 자신의 손으로 되돌아오는 나이였던 것이다. 게다가 나는 사랑을 하고 있었고, 그 사랑은 무척이나 까다로운 장소로 나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주변 풍경에 신경을 쓸 .. 2022. 2. 6.
< 열두 발자국 > 정재승, 2018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호기심 못지않게 놀라운 재능 하나가 또 있습니다. 바로 '강한 호기심을 잠시 느꼈으나 이내 그것을 억누르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일상을 살아가는 놀라운 억제력' 말입니다. 어린 시절만 해도 한동안 호기심에 사로잡혔지만, 학교에 들어가고 학창 시절을 보내면서 그리고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호기심에 사로잡혀 그것을 스스로 해결해보고 싶은 마음'에까지 이르는 경험은 현저히 줄어들었을 것입니다. 대부분 우리는 잠시 무언가에 호기심을 느껴 궁금해하지만 그것도 그때뿐, 바쁜 일상을 살아내기 위해 하던 일에 집중하거나, 체내 에너지의 23퍼센트 이상을 먹어치우는 1.4킬로그램의 폭식꾼 '뇌'에 과부하가 걸리지 않도록 뇌를 최소한으로만 쓰는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스파게티 면.. 2022. 1. 17.
< 돈 룩 업 (Don't Look Up) > 애덤 맥케이, 2021 미시간 주립대학의 천문학과 대학원생인 케이트 디비아스키(제니퍼 로렌스)와 담당 교수 민디 박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연구 도중 지구를 향해 날아오는 혜성을 발견한다. 계산 결과 이 혜성은 거의 에베레스트 산에 맞먹는 크기로 지구와 충돌까지 앞으로 약 6개월 정도의 시간이 남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들은 이 중대한 사실을 알리기 위해 NASA의 국장급인 오글소프 박사(롭 모건)와 함께 백악관을 찾는다. 그러나 무능력한 제이니 올린 대통령(메릴 스트립)은 당장 코앞으로 다가온 선거와 자신이 속한 당의 표에만 신경을 쓰며 '일단 생각해보자'라고 말한다. 이런 예상치 못한 백악관의 반응에 충격을 받은 그들은 언론사와 인기 쇼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직접 이 사실을 알리고자 한다. 그러나 인기 쇼 프로그램에서.. 2022. 1. 9.
< 1984 > 조지 오웰, 1949 '이 분간 증오'가 끔찍한 것은 의무적으로 참가해야하기 때문이 아니다. 저절로 거기에 휘말려들기 때문에 끔찍한 것이다. 일단 휘말려들면 삼십 초도 안 되어 어떤 억제도 소용없게 된다. 공포와 복수심에의 무서운 도취, 큼직한 쇠망치로 때리고, 고문하고, 얼굴을 깨부수어 죽이고 싶은 욕망이 전류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흘러 들어가서 뜻하지 않은 사람조차 오만상을 찌푸린 채 비명을 지르는 광적인 상태에 빠져버린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느끼는 분노는 램프의 불꽃처럼 대상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바꿀 수 있는, 추상적이면서 방향 감각도 없는 감정이다. 파슨스는 윈스턴과 함께 진리부에 근무하는 동료였다. 그는 뚱뚱하면서도 활동적이었는데, 바보처럼 어리석은 데다 맹목적인 열성분자였다. 당의 안정성은 사상경찰보다 아무런 이의.. 2022. 1.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