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173 < 청춘을 달리다 > 배순탁, 2014 나는 이제 모든 게 제법 능숙해진 나이를 살고 있다. 어떻게든 버티면서 나약함을 숨기고, 모르는 것도 마치 아는 것처럼 넘길 수 있는 요령도 생겼다. 짐짓 어른인 척할 수 있는, 인생 화장술의 대가라고나 할까. 하지만 지금도 철벽 같은 세상에 부딪혀 위태로울 때가 많다. 그럴 때면 나는 다시 스무 살, 캠퍼스의 벤치로 돌아간다. 갑자기 떠안아야 했던 세상에 대한 혼란과 무너져버린 집안. 그것들이 영원할 것 같다는 불안과 두려움. 이제는 이 감정들이 내 나이만큼이나 무겁고 깊어진 채로 나를 응시하고 있다. 내 앞에 남아 있는 삶에 대한 채무감만큼이나 두렵고, 복잡해 보이는 눈빛이다. 이럴 때면 나는 크라잉 넛의 음악을 다시 찾아서 듣는다. "쓸데없이 진지해져봤자 폭망한다." 이 말 한마디가 듣고 싶어서. .. 2021. 7. 27. < 무엇인지 무엇이었는지 무엇일 수 있는지 > 최유수, 2016 사라져가는 나 내 안에 있던 진짜 나는 이미 사라져가고 있고, 사라진 만큼 이런저런 덩어리들로 채워져 있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언제부턴가 진짜 나는 거의 소실되어버린 건지도 모른다. 도화지는 위에 그림이 있는 없든 도화지 자체로서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무언가로 채워져 있던 어떤 공간이 다른 덩어리들로 채워지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원래의 것은 있을 자리를 잃고 만다.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죽을 때까지 아주 조금씩 나 자신을 침식당하는 것이 아닐까. 작은 영향들이 모여서 큰 덩어리가 되었고 그것들에 의해 밀려나는 나 자신을 조금씩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진짜 나라는 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내 생각과 언어가 완전한 내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sput.. 2021. 7. 25. < 어느 멋진 달 > 엄진, 2017 예전엔 헤어지는 모든 순간이 아쉽기만 했다. 하지만 포착되지 조차 않은 그렇게 작별인사도 없이 맞은 이별이 사실은 얼마나 많았을까.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강조하며 역할, 영역을 구분하는 것은 단순한 진술 같지만 이러한 '구별'은 쉽게 차별과 폭력의 근거로 활용된다. '여성은 아름다운 존재이기에', 여성을 꽃이나 다이아몬드 비유하면서 '지켜주기 위해'라는 모든 여성을 우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말들 역시 마찬가지다. 여성을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인식이기 때문이다. 도덕책이 무의미한 세상 같다. 옳다고 믿었던 것들, 어떻게 해야 한다고 배웠던 것들을 지키는 것이 오히려 손해가 되는 순간들 때문이다. 하나라도 더 가지려 애쓰지 않으면 내 것까지 잃고 마는 무한경쟁시대에 살고 있으니까. 세상은 원래 아름답고.. 2021. 7. 15. < 고령화가족 > 천명관, 2010 아마도 이쯤에서 이야기가 끝났더라면 한 편의 훈훈한 가족영화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생은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법이다. 지루한 일상과 수많은 시행착오, 어리석은 욕망과 부주의한 선택... 인생은 단지 구십 분의 플롯을 멋지게 꾸미는 일이 아니라 곳곳에 널려 있는 함정을 피해 평생 동안 도망다녀야 하는 일이리라. 애초부터 불가능했던 해피엔딩을 꿈꾸면서 말이다. 어릴 때부터 용돈과 학원비로 맺어진 이 기묘한 모녀관계는 얼핏 생각하면 골치 아픈 양육 문제를 돈으로 해결하려는 무지한 부모의 전형적인 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점에선 서로 물고 빨고 핥느라 개인의 인생을 모두 소진시켜버리는 여느 한국식 가족관계보다 더 간편하고 합리적인 면도 있었다. 그녀는 한마디로 기내.. 2021. 6. 30. < 오직 두 사람 > 김영하, 2017 어쩌면 그 말은 저에게라기보다 엄마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을 거예요. 그래요.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에게 하고 싶은 어떤 말을 남에게 하고 살지요. 행복감의 토로를 후회처럼 말하는 능력이 인아에게는 있었다. 그럴 때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면 마치 과분한 행운을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어서 서진은 늘 헷갈리곤 했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는 "여기 안 왔어야 하는데..."라고 말하고 서진이 왜냐고 물으면 "지나간 날들이 더 끔찍하게 느껴지니까"라고 답하는 사람이었다. 더보기 김영하 작가의 단편집이다. 총 7편의 단편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참신한 소재가 좋았고 빠른 전개 덕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읽었다. 은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유독 아꼈던 아빠와의 관계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삶 속에 엉킨 채 유지되고.. 2021. 6. 29. 이전 1 ··· 23 24 25 26 27 28 29 ··· 3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