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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그랬다고 적었다 > 김애란, 2026

by Ditmars 2026. 10. 27.

<그랬다고 적었다> 김애란, 2026

 

 돈 때문에 또 밥 때문에 시무룩하게 발밑을 보는 눈과 그럼에도 이따금 먼 데를 보는 인간의 눈을 생각한다. 둘 사이가 만든 삶의 너비,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나 또한 그곳에서 글을 쓰다 어느 순간 마흔 넘은 작가가 됐다. 그리고 지금까지 운좋게 창작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가끔은 내 부모가 이해 못 할 문장을 꾸리며. 또 어느 땐 '그럴 리야 없겠지만, 아직 송금하지 않으셨다면' 이라는 메일도 쓰며. (...)

 나 또한 종종 밥과 꿈 사이에서 불안해하곤 한다. 하나에 집중하다 다른 하나를 잃을까봐. 심지어 둘 다 잃게 될까봐. 그런데 만약 이게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면, 흔히 말하듯 어떤 균형이란 걸 맞춰볼 수 있다면 그럴 때 가장 적절한 비율은 얼마일까? 5대 5일까? 7대 3일까? 그런 게 있기는 할까?

<p.12>

 

 누군가의 결핍처럼 보이던 게 나중에 개성이 되고, 자산 같았던 게 한계나 덫이 되는 경우를 우리는 이미 많은 이야기를 통해 알고 있다. 삶은 단순한 덧셈 뺄셈이 아니라 여러 개의 얼굴로 이루어져 있으며, 문학은 바로 그 자리에서 출발한다는 점도.

<p.15>

 

 그걸 보며 나는 밥과 꿈도 생애 주기에 따라 그 의미와 무게가 변함을 알게 됐다. 하물며 사회 변화 속도가 빨라진 지금, 일의 지위야 오죽할까. 그러니 중요한 건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도착 이후의 문제, 연착 전후의 문제인지 모른다. 밥과 꿈이 번번이 우리 손에서 미끄러져 나갈 때, 낯설게 얼굴을 바꿀 때 그 간극을 관리하고 메우는 사유와 언어를 갖는 것.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이 삶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기술을 익히는 일 말이다. 

 실제로 삶의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나는 문학의 언어에 자주 기댔다. 그리고 그게 도움이 됐다. 아주 천천히 이뤄지는데다 거의 표도 안 나서 정작 도움받은 사람은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도움. 그리고 배움. 행정 언어로도 법률 언어로도 해결 못하는, 그렇지만 우리 삶에 엄연히 존재하는 문제들을 문학은 늘 '쉬운 답을 주지 않는 방식' 으로 내가 건널 수 있게 해줬다. 앞으로도 곤경에 처할 때마다 문학은 결코 생색내지 않는 형태로 우릴 도울 것이다. 우리가 맞닥뜨릴 곤경 중에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일도 있을 거다. 이를테면 질병과 죽음, 이별과 상실 같은. 수백 년 전 고바야시 잇사 또한 평생 한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을 내리 겪었다. 어려서는 계모에게 학대를 당하고, 커서는 부친과 자식 넷, 아내를 잃었다. 삶의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잇사를 도운 것은 시인이라는 업도 아니고, 그 일이 가져다준 명예나 밥도 아니고, 그가 시인으로 살며 익힌 시선과 태도, 문장이었을 거다. 죽음 앞에서 밥도 꿈도 허망하다 싶을 때 그럼에도 그를 삶 쪽으로 고개 돌리게 만든 무엇. 그리하여 그가 첫딸을 잃고 쓴 "눈 흩날리네 농담도 하지 않는 시나노 하늘" 이라든가 사별한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오십 줄에 쓴 "죽은 엄마여 바다를 볼 때마다 볼 때마다" 같은 시구 앞에서 나는 눈이 깊어지고 만다. 그에 비할 바는 아니나 내가 깊은 구덩이에 빠졌을 때 나를 도운 것도 작가라는 업이 아니라 긴 시간 무언가를 읽고 쓰며 생긴 생각의 근육, 마음의 힘줄이었다.

<p.17>

 

 조용한 이발소 한가운데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자니 아버지가 왜 마지막까지 가게를 포기하지 않으려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곳은 아버지의 작은 세계였다. 그 안에는 아버지가 평생 꾸려온 일과 역사, 인간관계, 취미, 기호식품, 하루 루틴, 선호하는 티브이 프로그램, 이발사로서의 전문성, 지겨움, 자부심 등이 모두 담겨 있었다. 모두 내가 몰랐거나 알려고 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p.47>

 

 오랜 시간, 우리 세 자매가 어머니의 말만 듣고 오해해온 것과 달리 두 사람은 사이가 꽤 괜찮은 편이었다. 둘 사이에 기대와 배신, 실망과 미움 못지않게 대화와 웃음, 의존과 연민이 적지 않았음을 우리는 최근에서야 알아챘다. 두 분은 두 분대로 우리가 모르는 문법으로 대화하고 있었다. 일단 눈에 띄는 특징은 대화량이었다. 고향이자 집성촌에 살아 겹지인이 많아 그런지 공통 화제가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아버지는 어머니의 제법 좋은 청자이자 친구였던 것 같다. 어쩌면 유일했을 친구. 둔하고 답답하지만 '지금 내 얘기를 듣고 있다'는 신호를 꾸준히 보내온 사람.

<p.72>

 

 아무튼 어느새 나는 무서움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 성인 독자가 되었고, 모든 소설이 그럴 필요는 없지만, 이왕 내가 만나는 소설 안에는 지적, 미적 자극과 더불어 좋은 질문이 들어 있기를 바라는, 말하자면 나도 잘 못하는 일을 남의 글에 바라는 작자가 되었다.

<p.102>

 

 그러고 보면 상상력은 결핍을 통해서도 나오지만 낭비를 통해 촉발되는 듯했다.

<p.128>

 

 만일 성인이 된 이후의 삶이 허무나 권태에 익숙해지는 걸 의미한다면 그걸 관리하는 기술이랄까 도구를 나는 문학을 통해 얻었다. 그리고 갈수록 문학에 대한 어떠한 환상이나 숭배 없이 그 일을 해낼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의미나 태도에 도취되기보다 다만 기술을 연마하다보니 절로 익히게 된 삶의 자세가 있다. 구호나 당위 이전에 한 인물의 삶을 통해 그 인물의 욕망과 좌절, 유예와 꾸물거림, 실패를 총체적으로, 육체적으로 함께 경험하며 닿은 이해가 있다. 문학이 그걸 독점했다는 뜻이 아니라 오랜 시간 그쪽으로 특화되어왔다는 얘기다. 문학은 내게 추상이나 관념이 아닌 구체와 실감의 영역이며 이 실감은 나를 예감과 공감, 만감으로 나아가게 해준다. 나는 외향적인 인간도 모험심이 강한 작가도 아니다. 다만 어떤 이야기를 보다 잘 전달하고픈 욕구와 기술적 고민을 거듭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어떤 상태를 유지하려 노력하게 됐다. 항상 감각을 열어 두고 자극을 받아들이며 편견을 교정하려 애쓰게 됐다. 물론 실패할 때도 많지만 나 자신을 비롯해 바깥 세계를 내 살갗으로 하나하나 생생하게 느끼고 해석하고픈 욕구를 갖게 됐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그런 연습 자체가, 또 시도가, 내 삶을 보다 좋은 곳으로 이끌어준다는 걸 알게 됐다. 처음엔 그저 필요에 의해 시작했을 뿐인데, 이제는 그렇게 살지 않는 삶을 상상하기 어렵다. 내게 '글쓰기'와 '글 읽기'는 직업이거나 취미이기 이전에 삶의 방식이며 훗날 직업적 의미를 잃게 된다 하더라도 나는 이 존재 방식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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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낭으로의 가족 여행을 앞두고 아내가 김애란 작가의 신간이 나왔다며 집 앞의 서점까지 직접 가서 사온 책이다. 소설이 아니고 산문이라는 사실에 나도 이 책이 무척 궁금했다. 아이 둘을 데리고 간 다낭 여행에서 과연 책을 읽는 사치스러운 짬이 날까 싶었는데 결과적으로는 매일 아침 수영장에 갈 때마다 잊지 않고 챙겨간 덕에 틈틈이 읽다 보니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그 바람에 책 표지가 물에 젖어 쭈굴쭈굴해져 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이 책을 볼 때마다 다낭의 눈부신 햇살과 맑은 하늘, 그 아래 푸른빛의 수영장과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떠올라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작가가 일상의 작은 순간을 관찰하고 거기서 의미를 발견하는 일을 참 잘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작가가 본가에 들렀다 우연한 계기로 아버지의 서재를 보던 중 <대망> 이라는 책의 9권만 없는 것을 발견한다. 이에 대해 묻자 어머니는 '누구 빌려줬다 못 받은 거 같은데?'라고 대답한다. 누군가에게는 사소하고 평범할 수 있는 이 순간을 작가는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인지장애를 앓고 있는 아버지의 삶에 대해 글을 쓰며 아래와 같이 이 순간의 의미를 찾는다.

 

 '아버지는 그때 전권 중 딱 학 권이 비는 역사소설 전집처럼 기억 한 곳에 생긴 빈 구멍을 의식하며 답답해했다. 중간에 줄거리가 끊긴 이야기를 전달하듯 자주 말을 더듬었다. 나는 누군가 빌려간 뒤 돌려주지 않는 책처럼 앞으로 아버지의 영혼에 그런 빈자리가 늘 것임을 예감했다. 이 빠진 자리마냥 한 권 한 권 자취를 감추다 어느 날에는 우리 앞에 거대한 어둠이 입을 벌린 채 서 있는 걸 발견할 거라고.'

 

 작가가 글을 쓰다 보니 그 순간이 떠오른 건지, 아니면 그 순간을 계기로 글을 쓰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일상의 작은 순간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간직하거나, 생각해 보거나, 의미를 찾으려는 삶의 태도는 나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글을 쓰는 사람이 갖게 되는 일종의 직업병과도 같은 이런 방식의 삶의 태도를 두고 작가도 여러 번 생각해 본 듯 책 속에도 다양한 단어로 등장한다. '긴 시간 무언가를 읽고 쓰며 생긴 생각의 근육, 마음의 힘줄' 이라거나 '내게 '글쓰기'와 '글 읽기'는 직업이거나 취미이기 이전에 삶의 방식이다'라는 말들이 그러하다. 결국 문학을 읽고 쓰는 삶이 하나의 삶의 방식이자 태도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인데 이 말이 곧 내게는 문학이 인간의 삶에 있어 철학적 지위나 종교적 지위를 가질 수 있는 건 아닐까,라는 의문을 갖게 했다. 

 

 실제로 문학은 인간의 삶을 가장 잘 드러내면서, 인간의 삶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한 편의 문학을 써 내려가기 위해 삶의 순간을 관찰하고 인간을 내면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작가들은 인간의 삶에 대해 그 누구보다 깊이 고민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문학 작품 속에서 그 어떤 철학과 종교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던 삶의 깊은 의미와 성찰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철학은 우리에게 삶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끔 하고, 종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실천의 틀을 제시한다. 그러나 철학과 종교 둘 다 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현실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다. 문학은 현실의 삶을 보여준다. 우리는 문학을 읽으며 삶을 들여다 보고 개인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문학은 철학이나 종교와 같이 직접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알려주진 않지만 '어떤 삶이 있을 수 있는지' 알려준다. 어쩌면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처럼 철학과 종교가 주는 수많은 가르침보다 문학 작품 속에서 들여다본 다양한 인물들의 삶의 모습에서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나 역시 작가가 문학을 다루며 익히게 된 삶의 태도에 100% 동감한다. 내게도 문학은 단순히 재미와 감동을 넘어 일종의 철학과 종교처럼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하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3개월 여러 가지 일 때문에 바빴다. 꾸준히 책은 읽었지만 블로그에 글은 올리지 못했는데, 다시 계속 이 좋은 취미를 이어나갈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