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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미안 > 헤르만 헤세, 1919

by Ditmars 2022. 2. 11.

<데미안&amp;gt; 헤르만 헤세, 1919

 

 많은 이들이 채 열한 살도 되지 않은 아이가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걸 믿지 않으리란 사실을 안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을 더 잘 아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자기 느낌의 일부를 생각으로 바꾸는 법을 배운 어른들은, 아이에게는 그런 생각이 없으니까 체험도 없으려니 여긴다. 하지만 나는 살면서 다시처럼 그토록 깊이 체험하고 고통받은 적이 드물었다.

<p.45>

 

 "하지만 내가 지난가을에 저 앞에 있는 내 의자에서 자리를 옮겨야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졌을 때는 제대로 이루어졌지. 알파벳순으로 나보다 앞에 있는 어떤 애가 여태 아파서 못 나오다가 그 때 갑자기 나타난 거야. 누군가 자리를 내줘야 해서 자연스럽게 내가 그렇게 했지. 내 의지는 기회가 오면 곧바로 붙잡을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p.70>

 

 "그리스도의 결함을 아주 분명히 보여주는 한 가지 점이 여기 있어. 구약이나 신약에 나타나는 이 하느님이 특별한 형상이긴 하지만 원래 나타나야 할 모습 그대로가 아니라는 거지. 신은 선하고 고귀하고 아버지 같고 아름답고 높고도 다감한 어떤 존재다. 아주 좋아! 하지만 세상은 다른 것으로도 이루어져 있어. 그런데 그런 건 모조리 악마의 것으로 돌려 버리지. 세계의 이 부분, 이 절반이 그냥 꿀떡 삼켜진 채로 하나도 언급되지 않는 거야. 그들은 신이 모든 생명의 아버지라고 찬양하면서도, 생명의 바탕인 성생활 전체에 대해서는 그냥 뚝 침묵하고 여차하면 아예 악마의 일이라거나 죄악이라고 선포하고 있어! 난 사람들이 야훼 하느님을 존중하는 데는 반대하지 않아. 전혀 안 하지. 하지만 난 우리가 모든 걸 존중하고 거룩하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해. 인위적으로 반으로 나눈 다음 공식적으로 인정한 절반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를 말이야! 그러니까 하느님에 대한 예배와 나란히 악마에 대한 예배도 드려야 해. 그게 옳다고 생각해. 아니면 악마도 속에 포함하는 그런 하느님을 만들어내야 할 거야. 그래서 세상의 가장 자연스러운 일들이 일어날 때 그분 앞에서 두 눈을 질끈 감지 않아도 되도록 말이지."

<p.75>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p.110>

 

 당시 나는 독특한 피난처를 찾아냈다. 흔히 말하듯이 '우연'을 통해서였다. 하지만 그런 우연이란 없다. 누가 무언가를 꼭 필요로 하는데 제게 꼭 필요한 그것을 찾아낸다면, 그것은 우연이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그 자신의 갈망과 필연성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것이다.

<p.117>

 

 "우리가 어떤 인간을 미워한다면 우리는 그 모습 속에서 우리 안에 있는 무언가를 보고 미워하는 거지. 우리 자신 안에 없는 것은 우리를 자극하지 않는 법이니까."

<p.136>

 

 "함께한다는 건, 아름다운 일이지. 하지만 지금 사방에서 번성하고 있는 건 아름다운 게 아니야. 아름다운 함께하기는 개인들의 상호이해에서 새로 생겨나게 될 거야. 그리고 한동안 세계를 변화시키겠지. 지금 사람들의 함께하기란 그냥 패거리 짓기일 뿐이야. 사람들은 서로서로가 두려워서 서로에게로 도망치는 거지. 신사들은 신사들끼리, 노동자들은 노동자들끼리, 학자들은 학자들끼리 말이지! 그럼 그 사람들은 어째서 두려워하느냐? 인간은 자기 자신과 하나가 아닐 때만 두려움을 갖는 법이야. 자기 자신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는 거지. 그러니까 자기 안에 있는 모르는 존재를 두려워하는 사람들끼리의 공동체인 거야!"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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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줄거리는 인물 중심으로 초반, 중반, 후반으로 나눌 수 있다. 초반부는 주인공 에밀 싱클레어가 우리 나이로 초등학생 때 데미안을 처음 만나게 되는 과정이고, 중반부는 고등학생 때 피스토리우스를 만나게 되는 과정이고, 후반부는 대학생 때 에바 부인을 만나게 되는 과정이다. 이렇듯 이 책은 한 소년이 성장의 시기마다 만나게 되는 인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그로 인해 내적 성장을 이뤄나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의 초반부는 상대적으로 읽기 쉬웠다.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보았을 법한 이야기였고, 상황에 대한 묘사와 심리에 대한 묘사가 매우 섬세하고 정확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도 학창시절에 센 척을 하다 곤경에 처했었던 상황이 떠올라 PTSD가 올 뻔했다. 그러나 중반, 후반부로 갈수록 읽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피스토리우스와의 대화와 에바 부인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솔직히 잘 이해하지 못하고 책장을 넘겼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뭔가 해소되지 못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이전에 tvN에서 방영했던 <요즘 책방 : 책 읽어드립니다>의 데미안 편을 다시 보기 하였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나는 그 프로그램을 좋아했었기 때문에 이미 모든 편을 다 본 상태였다. 즉, 데미안 편도 이미 봤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번에 처음 데미안을 읽으려고 책을 펼쳤을 때는 그 내용은 커녕 내가 해당 방송을 봤었다는 기억조차 까맣게 잊은 상태였다. 그래서 다시 보기를 하고 몇 분이 지나고서야 '아차, 내가 이미 이 프로그램을 봤었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재미있게 잘 챙겨 봤었는데 왜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을까. 이것이 영상이라는 매체의 한계인가 싶으면서도 TV를 보던 당시에는 이해한 것 같았지만 '내 지식'으로 흡수하지는 못했구나 싶었다. 학창 시절 과탐 인강을 들으며 느꼈던 생각과 똑같았다.

 다시 데미안의 얘기로 돌아와보자. 에밀 싱클레어는 성장기에 데미안이라는 친구 덕분에 정신적으로 성숙하고 내면을 단단하게 만들어갈 수 있었다. 잠시 방황하던 시기에도 데미안의 존재는 그를 다시 올바른 길로 데려다 놓았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친구로서 옆에 계속 있었는지의 여부는 중요치 않았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주인공이 데미안과 함께 있었던 시간은 소설 전체로 봤을 때 잠깐의 시간에 불과했다. 그를 처음 만나고 그에게서 어떠한 강인함과 배울만한 점을 알게 된 순간, 주인공의 내면에는 데미안이 하나의 롤모델처럼 마음속에 각인되어 갈등과 고민의 순간에 적절한 조언을 해줄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를 도운 건 처음에는 실제 데미안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내면의 데미안이 스스로를 도운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옆에 데미안이 없어도 마음속의 데미안을 만든 건 에밀 싱클레어 자신이었을 테니 말이다. 

 이런 구도는 주인공과 크나우어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에밀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이 있다면 크나우어에게는 에밀 싱클레어가 있다. 누군가를 통해 내적 성숙을 이룬 내 모습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동경할 만한 모습이 되는 것이다. 에밀 싱클레어가 크나우어에게 대단한 조언을 한다거나 일부러 인상 깊은 모습을 보여준 것이 아니었다. 주인공은 다만 평범하게 살아갔을 뿐이다. 오히려 다른 누구보다 속으로 고민이 많았고, 여러 면에서 자신보다 뛰어난 데미안에게서 일종의 열등감을 느끼기까지 했다. 크나우어는 에밀 싱클레어의 그런 속사정까지는 몰랐겠지만 어찌 되었는 그가 살아가는 모습에서 존경할만한 부분을 발견한 것이다. 에밀 싱클레어는 스스로 부족한 게 많다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다른 누군가가 동경할 만큼 이미 충분히 성숙한 인간이 된 것이다.

 

 나는 이런 점이 인상 깊었다. 나 역시 그런 경험을 했고, 많은 사람들이 학창 시절을 겪으면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면서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지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꼭 사춘기가 아니더라도 살면서 누구나 마음 속으로 존경하거나 닮고 싶은 사람이 있지 않은가. 사람에 따라 실존인물이 아니고 영화나 소설 속 주인공일 수도 있고, 한 번도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존경하는 인물일 수도 있고, 내 곁에 있는 선생님이나 친구일 수도 있다. 그 인물의 삶의 모습을 본받으며 자신의 삶도 한층 더 성숙해지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위에 적은 것처럼 결국 내 인생을 바꾼 건 타인이 아니다. 타인은 내게 어떠한 계기는 만들어줄 수 있겠지만 결국 내가 달라질 수 있었던 것은 내면에 스스로 만든 이상적인 나와 현재의 내가 치열하게 싸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이상적인 나를 설정하고 거기에 다다르기 위해 노력하고 달라지는 과정을 거듭하면서 나는 어제의 나보다 더 나아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