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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실의 시대 > 무라카미 하루키, 1989

by Ditmars 2022. 2. 6.

&lt;상실의 시대&gt; 무라카미 하루키, 1989

 

 기억이라는 건 왠지 이상한 것이다. 실제로 내가 그 초원 속에 있었을 때, 나는 그런 풍경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특별히 인상적인 풍경이라 할 것도 없었고, 십팔 년이 지나고도 그 풍경을 세세한 부분까지 기억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 나로선 풍경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던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생각했고, 그때 내 곁에서 나란히 걷고 있던 아름다운 한 여자를 생각했고, 나와 그녀를 생각했고 그리고 다시 나 자신을 생각했다. 그때는 무엇을 보든, 무엇을 느끼든, 무엇을 생각하든, 결국 모든 것이 부메랑처럼 자기 자신의 손으로 되돌아오는 나이였던 것이다. 게다가 나는 사랑을 하고 있었고, 그 사랑은 무척이나 까다로운 장소로 나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주변 풍경에 신경을 쓸 여유 같은 것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의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그 초원의 풍경이다. 풀 냄새, 약간 한기를 머금은 바람, 산의 능선, 개 짖는 소리, 그런 것들이 우선 가장 먼저 떠오른다. 너무나 선명하게. 그것들은 너무나도 선명해서 손을 뻗으면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만질 수 있을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 풍경 속에는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도 없다. 나오코도 없고 나도 없다. 우리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나는 생각한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토록 소중해 보였던 것, 그녀와 그때의 나와 나의 세계는 모두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그래, 나로선 나오코의 얼굴을 바로 떠올릴 수조차 없는 것이다. 내가 지니고 있는 건 사람 그림자 하나 없는 배경뿐인 것이다.

<p.15>

 

 "어째서 그렇게 모든 일을 고지식하게 생각하지? 자, 좀 더 어깨의 힘을 빼라구.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으니까 그런 식으로 사물을 보게 되는 거야. 어깨에서 힘을 빼면 훨씬 몸이 가벼워지게 돼."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하고 나오코는 놀랄 만큼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나는 나 자신이 뭔가 잘못된 것을 말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거야?" 하고 나오코는 꼼짝 않고 발치의 땅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어깨의 힘을 빼면 몸이 가벼워진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어. 그런 말은 해봤자 아무 도움도 안 된다고. 알겠어? 만약 내가 지금 어깨 힘을 뺀다면 나는 산산조각이 나버린단 말이야. 난 옛날부터 이런 시그로만 살아왔고, 지금도 이런 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어. 한번 힘을 빼고 나면 다신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고. 난 산산조각이 나서 어디론가 날려가 버리고 말 거야. 어째서 그런 걸 모르는 거야? 그걸 모르면서 어떻게 나를 돌봐준다고 말할 수 있는 거야?"

<p.20>

 

 결국 따지고 보면 글이라는 불완전한 그릇에 담을 수 있는 것은 불완전한 기억이나 불완전한 상념밖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오코에 관한 기억이 내 안에서 희미해져가면 갈수록 나는 더욱 깊이 그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p.23>

 

 죽음은 삶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p.46>

 

 어느 날 내가 식당의 양지쪽에서 햇볕을 쬐며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있자니까, 옆에 다가와 앉아서 무엇을 읽고 있느냐고 물었다. <위대한 개츠비>라고 나는 말했다. 재미있냐고 그는 물었다. 전부 통틀어서 세 번째 읽고 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재미있다고 나는 대답했다.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는 남자라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군." 하고 그는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듯이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시월의 일이었다.

<p.55>

 

 "그런데 나가사와 선배, 대체 선배가 말한 그 인생의 행동 규범이란 게 어떤 거죠" 하고 나는 물어보았다.

 "넌 분명히 웃을 거야." 하고 그는 말했다.

 "웃지 않아요!" 하고 나는 말했다.

 "신사여야 한다는 거야." 난 웃지는 않았지만 하마터면 의자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신사라니, 신사 숙녀 할 때의 그 신사 말이에요?"

 "그래, 바로 그 신사야." 하고 그가 말했다.

 "그럼, 신사일 것이란 말은 어떤 의미인가요? 혹시 정의할 수 있다면 어떤 건지 가르쳐주지 않겠어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신사야."

 "선배는 내가 지금껏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색다른 사람이에요." 하고 나는 말했다.

 "너는 내가 지금껏 만난 인간 중에서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야." 하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술값을 전부 치렀다.

<p.91>

 

 "부자의 최대 이점이 뭐라고 생각해?"

 "몰라."

 "돈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는 거야. 가령 내가 반 친구한테 뭘 좀 하자고 하면 상대는 이렇게 말한단 말이야. '나 지금 돈이 없어서 안 돼.'라고. 그런데 내가 그런 입장이 된다면, 절대 그런 소리를 못하는 거야. 내가 만일 '지금 돈이 없어.'라고 말한다면, 그건 정말 돈이 없다는 소리니까. 비참해질 뿐이지. 예쁜 여자가 '나 오늘은 얼굴이 엉망이니까 외출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과 마찬가지지. 못생긴 여자가 그런 소릴 해봐, 웃음거리만 될 뿐이야."

<p.100>

 

 "그건 말이야, 자기가 남이 좋아해주지 않아도 개의치 않는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이야. 그래서 어떤 사람은 못마땅해하는지도 모르지."

<p.112>

 

 "내가 바라는 건 그저 내 마음대로 하는 거야. 완벽하게 내 마음대로 하는 것. 가령 지금 내가 자기에게 딸기 쇼트케이크를 먹고 싶다고 하면 말이야, 그러면 자기는 모든 걸 집어치우고 그걸 사러 달려가는 거야. 그리고 헐레벌떡 돌아와서 '자, 미도리. 딸기 쇼트케이크야.' 하고 내밀겠지. 그러면 나는 '흥, 이런 건 이젠 먹고 싶지 않아.' 그러면서 그걸 창밖으로 휙 내던지는 거야. 내가 바라는 건 그런 거란 말이야."

 "그런 건 사랑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 같은데." 하고 나는 조금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관계있어. 자기가 알지 못할 뿐이야." 하고 미도리는 말했다. "여자에겐 말이야, 그런 게 굉장히 소중할 때가 있는 거야."

 "딸기 쇼트케이크를 창밖으로 내던지는 행동이?"

 "그래, 난 상대방 남자가 이렇게 말해주면 좋겠어. '알았어, 미도리. 내가 잘못했어. 네가 곧 딸기 쇼트케이크가 먹고 싶지 않게 되리라는 것쯤은 짐작했어야 했는데. 내가 당나귀 똥만큼이나 바보스럽고 무신경했어. 사과할 겸 다시 한 번 뭔가 다른 걸 사다 줄게. 뭐가 좋아? 초콜릿 무스, 아니면 치즈 케이크?"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난 그렇게 받은 것만큼 분명하게 상대방을 사랑할 거야."

 "지극히 불합리한 이야기 같은데."

 "하지만 난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해.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하고 미도리는 내 어깨 위에서 조그맣게 고개를 저었다. "어떤 사람들에게 사랑이란 건 아주 사소한, 혹은 시시한 곳에서부터 시작되는 거야. 거기부터가 아니면 시작되지 않는 거지."

<p.120>

 

 "제가 아까 뭘 잘못 말한 거라도 있나요?"

 "아무것도, 괜찮아.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뭐든지 정직하게 말해. 그게 가장 좋아. 혹 그 말이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게 되더라도, 아니면 아까처럼 다른 사람의 감정을 흥분시키는 결과가 되더라도 긴 안목으로 보면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야."

<p.173>

 

 "세상엔 그런 사람도 있어. 대단한 재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체계화하기 위한 노력이 부족해서 재능을 무산시켜버리고 마는 그런 사람들 말이야. 난 그런 사람들을 여러 명 봐왔지. 아무튼 처음에는 굉장하다는 생각이 들지. 예컨대 아주 까다로운 곡도 악보를 한 번 보고는 거침없이 치는 사람이 있어. 그것도 상당한 수준으로. 보고 있는 사람은 그만 압도되어버리는 거지. 나 같은 사람은 도저히 당할 수 없어, 하고 말이야. 하지만 그뿐이야. 그들은 거기서 앞으로 더 나가지 못하거든. 왜 그럴까? 그건 앞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이야. 노력하는 훈련으로 다져져 있지 않기 때문이야. 망쳐버리는 거지. 어설픈 재능이 있어서 어릴 때부터 노력하지 않아도 꽤 잘 해내고, 모두가 잘한다, 잘한다 치켜세우니까 노력 따위를 시시하게 여기는 거야. 다른 아이들이 삼 주일 걸리는 곡을 그 절반 동안의 기간에 해치우니, 선생도 이 아이는 재능이 뛰어나다는 생각에 다음 단계로 그냥 넘어가버리거든. 그것 역시 남들의 절반 동안에 해치우고, 또 앞으로 나아가고. 그래서 노력이라는 건 알지도 못한 채, 인간 형성에 필요한 어떤 요소를 빠뜨리고 지나쳐버리는 거지. 이건 비극이야. 따지고 보면 내게도 다소 그런 면이 있었지만, 다행히도 내 선생님은 굉장히 엄격한 분이었기 때문에 이 정도로 끝난 거지.
 하지만 말이야, 그 애에게 레슨을 가르치는 일은 즐거웠어. 고성능 스포츠카에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그런 기분이었으니까. 손가락을 조금 움직이기만 해도 팍팍 재빠르게 반응하는 거야. 너무 빠르다 싶을 때도 있기는 했지만 말이야. 그런 아이를 가르칠 때의 요령은, 우선 지나친 칭찬을 삼가는 거지. 왜냐하면 어려서부터 칭찬받는 일에만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아무리 칭찬을 해도 역시 그렇군 하고 생각하는 거야. 가끔 적절히 칭찬하면 그걸로 충분해. 그리고 무슨 일이든 강요하지 말 것. 제 스스로 선택하게 할 것. 앞으로 앞으로 나가게 하지 말고, 멈춰 서서 생각하게 할 것. 그것뿐이야. 그렇게 하면 아주 잘되어 나가지."

<p.222>

 

 "저, 와타나베, 영어의 가정법 현재와 가정법 과거의 차이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어?" 하고 갑자기 그녀가 내게 질문했다.

 "설명할 수 있을 거야."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럼 묻겠는데, 그런 게 일상생활에 무슨 도움이 되지?"

 "일상생활에 무슨 도움이 된다든가 하는 건 별로 없지." 하고 나는 말했다. "구체적으로 무슨 도움이 된다기보다는 그런 게 사물을 더욱 체계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훈련이 된다고 나는 생각해."

 (...)

 "그게 어디에 쓸모가 있는데?"

 "그건 사람 나름이겠지. 쓸모 있는 사람도 있을 테고, 쓸모 없는 사람도 있을 테고. 하지만 그런 건 어디까지나 훈련이고, 쓸모가 있냐 없냐는 그다음 문제야."

<p.256>

 

 "그래서 말이야, 때때로 나는 이 세상을 둘러보면 정말 치가 떨려. 어째서 이 사람들은 노력이란 것을 하지 않을까, 왜 노력도 하지 않고 불평만 할까 하고 말이야."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나가사와 선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제가 보기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악착같이, 허리가 휘도록 일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제가 잘못 보고 있는 건가요?"

 "그건 노력이 아니라 단순한 노동일 뿐이야." 하고 나가사와 선배는 간단히 말했다. "내가 말하는 노력이란 그런 게 아냐. 노력이란 좀 더 주체적이고 목적을 가지고 하는 거야."

<p.292>

 

 "와타나베와 내가 닮은 점은, 타인이 자신을 이해해주길 바라지 않는다는 거야." 하고 나가사와 선배가 말했다. "그게 다른 녀석들과 다른 점이야. 다른 녀석들은 하나같이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라며 안달하지.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고 와타나베도 그렇지 않아. 이해해주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나고,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일 뿐이라고."

 "그런 거야?" 하고 하쓰미 씨가 내게 물었다.

 "설마." 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그만큼 강한 인간이 아니에요. 어느 누구에게 이해받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서로 이해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상대도 있어요. 다만 그 밖의 사람들에겐 어느 정도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생각하고 있을 뿐인걸요. 체념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선배 말대로 남에게 이해받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죠."

 "내가 하고 있는 말도 거의 같은 뜻이야."

<p.301>

 

 "인생이란 비스킷 통이라고 생각하면 돼. 비스킷 통에 여러 가지 비스킷이 가득 들어 있는데, 거기엔 좋아하는 것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도 있잖아? 그래서 먼저 좋아하는 것만 자꾸 먹어버리면, 나중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만 남게 되거든. 난 괴로운 일이 생기면 언제나 그렇게 생각해. 지금 이걸 겪어두면 나중에 편해진다고. 인생은 비스킷 통이라고."

<p.357>

 

 전에도 와타나베에게 말했지만 느긋하게 기다리는 게 제일이야. 희망을 잃지 않고 엉킨 실을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거지. 사태가 아무리 절망적으로 보여도 실마리는 어딘가에 있게 마련이니까. 주위가 어두우면 잠시 동안 가만히 있으면서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듯이 말이야.

<p.366>

 

 물론 나는 와타나베와 나오코가 해피엔딩을 맺을 수 없게 된 걸 섭섭하게 생각해. 하지만 결국 무엇이 좋았는지 그 누가 알 수 있겠어? 그러니 와타나베는 누구도 염려하지 말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행복해지도록 해. 내가 경험해봐서 하는 말이지만, 그런 기회란 인생에 두세 번밖에 없고, 놓치면 평생 후회하게 되거든.

<p.381>

 

 나오코의 죽음이 내게 가르쳐준 것은 이런 것이었다. 그 어떤 진리도, 그 어떤 성실함도, 그 어떤 강인함도, 그 어떤 부드러움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 슬픔을 실컷 슬퍼한 끝에 그것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는 길밖에 없으며, 그리고 그렇게 배운 무엇인가도 다음에 닥쳐오는 예기치 않은 슬픔에 대해서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p.387>

 

 "와타나베가 만일 나오코의 죽음에 대해서 뭔가 아픔 같은 걸 느끼고 있다면, 당신은 그 아픔을 남은 인생을 사는 동안 계속 느끼면 돼.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미도리와 둘이서 행복해져야 해. 당신의 아픔은 미도리와는 관계가 없잖아. 더 이상 그녀를 상처 입히거나 하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악화되고 말 거야. 그러니까 괴롭겠지만 강해지라고. 좀 더 성장해서 어른이 되어야 하는 거야. 난 와타나베에게 이 말을 하려고 요양원을 나와 일부러 여기까지 온 거야. 그 먼 길을, 그 관 같은 전철을 타고서."

<p.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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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타나베라는 남자가 있다. 그는 고등학생 때 그의 친한 친구 가즈키를 교통사고로 잃었다. 가즈키에게는 나오코라는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그들은 와타나베와 함께 셋이서 자주 놀러 다니곤 했다.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슬픔에 나오코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멀리 교토에 있는 요양 보호소에 들어갔고 와타나베는 대학에 진학했지만 그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살고 있었다. 나오코는 요양 보호소에서 레이코를 만났다. 레이코는 나오코보다 19살 많은 연상의 여인이었는데 나오코를 진심으로 좋아했고 그녀가 그 슬픔에서 회복되어 다시 세상으로 나올 수 있도록 옆에서 돌봐주었다. 대학을 다니던 와타나베는 같은 수업을 듣던 미도리라는 여학생을 만났다. 미도리는 현실적이고 솔직한 성격으로 그 둘은 이내 서로를 좋아하게 되었다. 나오코는 요양 보호소에 있던 중에 상태가 악화되어 정신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다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 이에 와타나베는 깊은 상실감에 빠져 모든 걸 내팽개치고 한 달간 일본 곳곳을 유랑하였다. 그러나 나오코와 함께 있었던 레이코의 방문과 그녀의 조언에 힘입어 다시 현실로 돌아와 미도리에게 가기로 결심한다.

 이 줄거리 속에는 사실 이보다 더 많은 사연과 갈등이 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요약은 이 정도까지인 듯 하다.

 와타나베는 추억 혹은 기억에 큰 의미를 두고 산다. 마치 '그 때의 경험은 훗날 내 인생의 전부를 바꿔 놓았다.' 같이 의미심장하지만, 그러나 지금은 상투적인 대사가 되어버린 말처럼 말이다. 고등학생 때 친한 친구 가즈키의 죽음으로 느낀 상실감을 평생 잊지 않고 살아야 할 것으로 여기며 그의 여자 친구 나오코에게도 왠지 모를 책임감과 함께 사랑을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 큰 의미를 두고 살지 않는다. 특별한 목적도 없고 욕구도 없이 정해진 일정에 맞춰 일어나고 학교에 갔다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쉰다. 이런 삶을 지탱하게 하는 건 같은 상실을 겪은 나오코에 대한 사랑이다. 지금은 요양 보호소에 있지만 언젠가 그녀가 건강을 회복하고 나면 그곳에서 나와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분명 현실 속에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상실에 대한 기억은 점점 흐릿해진다. 이런 자신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어쨌든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한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 사이 와타나베는 미도리라는 여자를 만난다. 와타나베는 요양 보호소에 있는 나오코를 사랑하고 있고, 가즈키의 죽음을 아직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지만 동시에 미도리를 통해 현실에서 발견한 새로운 행복과 사랑에 조금씩 변해 간다. 그에 반해 현실과 동떨어진 요양 보호소에서 과거에만 얽매어 살던 나오코는 결국 그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한다. 간간히 만나는 와타나베와 그와 주고받은 편지, 옆에 있던 레이코의 도움으로 현실에 적응하는 듯 보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만 것이다. 가즈키에 이어 나오코의 죽음까지 겪게 된 와타나베는 긴 방황을 겪는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현실에 있고, 와타나베에게 더 이상의 안타까운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레이코가 직접 그를 찾아간다. (레이코 역시 나름대로의 상처로 인해 현실로부터 벗어나 요양 보호소에 오랫동안 머물고 있었다. 그녀는 남은 평생을 거기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나오코의 죽음으로 인해 와타나베와 직접 만나 얘기를 하고 자신도 이제 현실로 돌아가기로 결심을 해 도쿄로 직접 와타나베를 찾아간 것이다.) 그렇게 와타나베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힘을 내어 미도리에게 다가간다. 

 감수성이 풍부한 중고등학생 시절에는 작은 것에도 큰 의미를 두었다. 소설 속의 이야기처럼 '우리 셋은 대학에 진학해도,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해도 평생 친구로 지내자' 라던지,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나는 이 사건을 남은 인생에서 절대 잊지 않을 거야.' 혹은 '이건 앞으로의 내 삶을 바꿀 어떤 운명과도 같은 일이야.' 같은 생각들이 그렇다. 감수성이 풍부해서였을까 아니면 아직 어렸기 때문일까, 지난 날의 의미심장한 결심이나 고백 등을 돌이켜 보면 부끄러운 마음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기특하다는 생각도 든다. 서른을 넘긴 지금은 매사에 그렇게 의미심장한 의미를 두지는 않고 살고 있다. 이제 나는 세상은 계속 변하고, 예전에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처음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나도 와타나베처럼 '내가 이래도 되는 걸까?' 하며 내가 만든 의미가 퇴색되지 않게끔, 어떻게든 이어지게끔 노력을 기울였던 것 같다. 때로는 변한 내 모습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고 어떻게 변할 수가 있지, 하고 현실을 부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평생 친구일 거라고 생각했던 친구와 멀어진다던가, 평생 지키기로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된다던가, 평생 사랑할 것 같은 사람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는 상실감을 느끼면서 세상은 변하고 사람도 변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 것 같다. 19살이나 많은 레이코의 조언처럼 시간이 지난 뒤 그때를 뒤돌아 보면 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그리 큰 일도 아닌 것이다. 모든 일이 그럴 수 있다며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은 어쩐지 슬프게 들린다. 하지만 우리가 현실에 발을 붙이고 사는 한 세상은 변하고 사람도 변하는 것은 아마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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