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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 하완, 2018

by Ditmars 2022. 4. 17.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하완, 2018

 

 흔히 돈은 수단이어야 하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오랫동안 돈이 목적인 삶을 살아왔다. 부끄럽지만 나도 그중 하나였다. 나는 늘 돈을 많이 벌고 싶었기에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같은 가장 중요한 질문들은 제쳐두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길을 좇으며 살았다. 우선 돈부터 많이 벌면 나머지 문제들은 자연스럽게 해결될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p.43>

 

 포기는 비굴한 실패라고 배웠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다. 현명한 삶을 살기 위해선 포기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우리는 '인내'나 '노력' 같은 기술을 이미 수도 없이 익히며 살았지만, 포기하는 기술은 배우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포기하지 말라고 배웠다. 그래서 포기하지 못해 더 큰 걸 잃기도 한다.

 내가 연이은 입시 실패에도 계속 도전을 했던 건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 같은 것이 아니었다. 나는 콩코드 오류에 빠져 있었다. 내가 투자한 시간이 얼만데 하는 마음이었다. 아깝고 실패를 인정할 수 없어서 다시 도전하고 또 도전했다. 도전하는 동안은 실패가 아니니까. 그렇게 나는 실패를 유보하고 있었다. 

<p.55>

 

 인생을 막살고 싶은 사람은 없다. 인생 앞에선 누구나 진지해지기 마련이다. 잘 살고 싶어서 필사적이다. 이를 악물고, 두 손을 꽉 쥐니 저절로 힘이 들어간다. 힘을 주고 버티느라 어깨가 단단하게 뭉친다. 우리는 힘을 빼고 살아본 적이 없다. 힘을 빼면 넘어지고, 뒤처질까 봐 힘을 뺄 생각을 못 했다. 부끄럽지만 겁을 먹었다. 힘을 뺀다는 건 딱딱하지 않다는 것, 유연하다는 것, 자연스럽다는 것, 욕심을 내지 않는다는 것, 겁을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p.73>

 

 "하루의 3분의 2를 자기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은 노예다."
 - 니체

<p.90>

 

 그러고 보면 직장인들이 자신의 자유(시간)를 팔아 번 돈을 열심히 모으는 이유도 나중에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가 아닌가. 결국, 그렇게 힘들게 모은 돈은 다시 자유를 사는 데 쓰이게 될 테니 지금의 내 상황과 크게 다르지는 않아 보인다. 이런 걸 생각하면 인생은 커다란 모순처럼 느껴진다. 이걸 누구에게 따져야 할지 모르겠다.

<p.95>

 

 그토록 내 시간을 원했던 이유는 무엇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서였다. (...)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하루를 보낸 것이 얼마 만인가. 이런 하루를 보내고 나면 뭔가 충만한 기분이 든다. 하루를 온전히 나를 위해 쓴 것 같은 기분, 낭비가 아니라 무언가로 가득 채워지는 기분이다. 무언가를 해야만 의미 있는 시간이 아니다. 때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더 큰 의미가 있다. 나에겐 그런 시간이 필요했다.

<p.100>

 

 사람들에게서 잠시 떨어져 있을 줄 아는 사람. 혼자 있는 외로움을 잘 알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혼자 있는 게 편하지만 결국 혼자서 살 수 없다는 걸 아는 사람. 외로움을 충분히 즐기고 나선 다시 사람들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 기꺼이 함께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고 싶다.

<p.115>

 

 일단 부딪쳐보는 거다. 실패했을 땐 후회하면 되지.
 - 고독한 미식가

<p.128>

 

 그럼에도 우리는 검색을 한다. 실패하고 싶지 않아서다. 나에게 딱 맞는 것을 찾아 도전하고 위험을 무릅쓰기보단 실패하지 않을 검증된 '중간 이상'을 택한다. 그렇게 점점 내 생각이나 감각은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리고 퇴화하여 어느새 나의 선택을 믿지 못하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가 중요하지 않고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해져 더는 '나'의 취향이나 감을 믿지 못하고 선택권을 '남'에게 넘겨버린 지금의 우리. 고작 식당 하나, 영화 하나를 고르는 데도 실패할까 봐 용기를 내지 못한다.

<p.130>

 

 "역시 난 산책의 천재야. TV나 잡지에 나온 곳을 찾아가는 산책은 산책이 아니다. 이상적인 산책은 '태평한 미아'라고나 할까."
 - 우연한 산보

<p.141>

 

 너무 분명한 목표와 목적이 있다는 건 '성취'의 영역이지 '재미'의 영역이 아니다.

<p.141>

 

 시도가 낳은 모든 것들은 당신을 시험한다.
 당신이 그것을 얼마나 원하는지를.
 거부를 다한다 해도 그 일을 할 것인가를.
 - 영화 <삶의 가장자리>

<p.195>

 

 인간은 불안하면 안정되고 싶고, 안정되면 불안하고 싶어지는 이상한 동물이다. 그래서 익숙한 것으로부터 떠나 불안한 여행을 즐기고, 여행에서 돌아와선 "여기저기 다녀봐도 집이 제일 좋다"라며 안정을 확인한다.

<p.210>

 

 다람쥐는 자신이 못생겼다거나 혹은 다른 다람쥐보다 도토리를 못 모은다고 자살하진 않는다. (법륜스님은 다람쥐 비유를 엄청 좋아해서 자주 써먹는다) 동물들은 자신에 대한 환상이 없고, 있는 그대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오직 인간만이 현재 자신의 모습을 비관하여 자살을 택한다. 그렇기 때문에 환상의 모습에 현재의 모습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한다. 환상을 버리고 현재의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해야 한단다. 난 그냥 이 정도인 사람이구나, 그런데 이것도 나쁘지 않네 하고 말이다. (...)

 고백하자면 내가 바로 자신을 과대평가한 대표적인 사람이다. 나는 내가 대단한 사람이며 앞으로 그렇게 될 거라고 굳게 믿었다. 나는 더 의미 있고 생산적인 일을 할 사람이며 남들과 똑같이 아등바등 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나만은 왠지 늙지도 죽지도 않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했다.

 그런데 현실은 그러지 않았다. 내가 하는 일들은 별 의미 없고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한 것이었다. 심지어 돈도 남들처럼 많이 못 버니 불만이 쌓였다. 매일 힘들게 사는데도 환상 속 내 모습에 한 걸음도 다가서지 못하는 기분이 들어 괴롭고, 조급하고, 늘 못마땅했다. 급기야 뭔가 잘못됐다며 집 안에만 틀어박혀 3년간 도(?)를 닦았으니 나는 중증 과대평가 환자가 분명했다. 

 3년간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은 뭘까',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뭘까', '인간은 왜 사는가' 같은 공허한 질문을 수도 없이 반복한 끝에 나는 환상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내가 존재하는 건 그냥 태어났기 때문이고 나만의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나는 그리 대단한 인간이 아니고 그냥 평범하거나 조금 못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내가 가진 것에 비해 욕심을 부렸다는 걸 받아들였다.

 나는 그때 내가 별 볼 일 없는 존재라는 걸 스스로 인정했기에 내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라 생각했는데, 실은 반대로 그때부터 자존감이 높아진 것 같다. 실제로 그 이후 나는 조금씩 긍정적인 사람이 되어갔다. 작은 일에도 감사할 줄 알고, 일이나 삶에서 큰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살면서 처음으로 행복하다는 기분을 느꼈던 것도 그 무렵이지 싶다.

<p.248>

 

 인간은 자신이 행복한 이유를 찾기보단 불행한 이유를 찾는 데 평생을 허비하고 있는 것 같다.

<p.253>

 

 요즘은 모든 매체가 나를 좌절시키고 불행하게 만들려고 작정을 한 것처럼 느껴진다. 

 세상은 우리가 불행하다고 속인다.
 불행하지 않으려면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한다고 속삭이면서.

 없던 욕망도 생기게 만드는 것이 자본주의가 굴러가는 방식이다. 그런 자본주의 속에서 속지 않고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속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지금 내 욕망은 어디서 온 것일까?', '나의 삶은 불행한 것일까?', '나는 세상에 속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p.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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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솔직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그렇다고 내 인생이 원래 거짓부렁이로 가득 찼다는 건 아니다. 다만 예전보다 조금 더 솔직해지려고 노력한다. 문득 이런 노력을 하게 된 건 최근 솔직한 것이 얼마나 편한 건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는 솔직해질 수 있는 여유가 조금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솔직해지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중에서도 나 자신이 누군가에게 좋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 크게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즉,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봤을 때 내가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게끔 남을 (때로는 나 자신까지도) 속이는 것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쓰는 정도도 다르다. 누군가는 SNS의 댓글 하나에도 신경을 쓰지만 누군가는 남들의 시선에도 거리낌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내 모습을 돌이켜보니 아무래도 나는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많이 쓰는 사람인 것 같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앞서 말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 다르게 말하면 못난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왜 나는 다른 사람의 시선에 신경 쓰게 되었을까. 그 원인은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나는 내 결점을 숨기고 싶어 하고, 타인의 평가에 민감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느 순간 인정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성격이 내게 나쁘게만 작용했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나는 이 성격 덕을 본 경우도 많다. 돌이켜보면 나는 공부, 운동, 비행, 그 무엇이 되었든 남들로부터 잘한다는 평가를 받기 위해 최대의 노력을 했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끊임없이 노력의 내적 동기가 되어준 것이다. 덕분에 실제로 꽤나 좋은 성과를 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반대로 타인의 평가가 가혹하거나 내 노력을 인정받지 못했을 때는 더 큰 좌절에 빠지기도 했던 것 같다. 요즘 유행하는 말을 빌려 쓰자면 한마디로 자존감이 낮았던 것이다. 남들의 평가에 의해 희비가 갈리고 나 자신이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최근에 솔직한 것이 편하다고 생각하게 된 건 내가 예전만큼 타인의 평가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어 편해진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전에 비해 남들에게 잘 보여야 할 이유나 성과를 내야 하는 일이 많이 사라진 것이다. 이미 결혼을 했으니 이성의 관심을 얻기 위해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예전처럼 시험을 보고 시험 결과로 평가받지 않으니 공부도 열심히 할 필요가 없다. 취직을 했으니 더 이상 회사가 원하는 인재상으로 내 모습을 꾸밀 필요도 없다. 결국 안정된 삶을 갖게 되니 이제야 솔직해질 수 있는 여유도 갖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남들의 시선과 평가에 민감하고 자존감이 낮았던 것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도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각종 시험과 취업, 결혼 등에서 '내가 바라보는 나'보다 '타인이 바라보는 나'가 더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에 남에게 솔직해지고 싶어도 솔직해질 수 없었던 것이다. 솔직하게 내 결점을 드러내고 타인의 시선에 튀는 행동을 하는 순간 경쟁에 밀려버리는 세상에서 어떻게 솔직해질 수 있겠는가. 몇 년 사이에 젊은 세대 사이에서 자존감이라는 단어가 화두가 된 것도 지나친 경쟁으로 인해 본인 스스로에게 솔직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위에 적은 것처럼 내 성격이 원래 그런 성격일 수도 있다. 그런데 글을 쓰다 보니 남들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는 것도 결국 내 삶에 여유가 있을 때 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20대 시절 내 낮은 자존감의 원인을 100% 사회 탓으로 돌리려는 건 아니지만 분명 나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남들의 눈치를 보며 나 자신을 속여야 했다. 남들의 시선이 중요한 시기에 그것을 무시할 만큼의 높은 자존감과 용기는 없었던 것이다. 나는 다행히 그 시기 경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 (어찌 됐든 취업도 하고 결혼도 했으니까) 삶은 안정을 찾았다. 그래서 솔직해질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남들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수준에 올랐다. 그러나 내 주변 사람들은, 내 후배들은 어떤가. 여전히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솔직할 수 없는 상황이다. 사회는 우리로 하여금 더욱 자존감을 낮게 만들고 있다. 여전히 나 자신을 남에게 맞춰야 하고,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한 세상이다. 결국 현세대 젊은이들의 자존감이 낮은 건 그럴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적 문제인데 이를 개인의 문제로만 여기는 것은 아닐까? 예전에는 노력하지 않는다고 젊은 세대들에게 뭐라고 했었는데 이제는 노력이 먹히지 않으니 자존감으로 교묘하게 바뀐 건 아닐까? 아무리 자존감이 부족해도 누구나 삶의 안정을 찾고 여유가 생기면 그제야 남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 솔직해질 수 있는 용기가 생기는 게 아닐까? 여러 생각이 든다.

 

 (내가 뜬금 없이 이런 생각을 한 건 이 책에서 말하는 '열심히 산다'는 것이 결국은 타인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고, '이제부터 열심히 살지 않는다'는 말이 이제부터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내 기준에 맞춰 살겠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생각은 이 책과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다, 라는 뭐 대충 그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