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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 박준, 2017

by Ditmars 2022. 5. 1.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박준, 2017

 

 그늘

 남들이 하는 일은
 나도 다 하고 살겠다며
 다짐했던 날들이 있었다.

 어느 밝은 시절을
 스스로 등지고

 걷지 않아도 될 걸음을
 재촉하던 때가 있었다는 뜻이다.

<p.11>

 

 먼저 죽은 이들의 말이 아니더라도 나는 기억해두고 있는 말이 많다. "다음 만날 때에는 네가 좋아하는 종로에서 보자"라는 말은 분당의 어느 거리에서 헤어진 오래전 애인의 말이었고 "요즘 충무로에는 영화가 없어"는 이제는 연이 다해 자연스레 멀어진 전 직장 동료의 마지막 말이었다.
 이제 나는 그들을 만나지 않을 것이고 혹 거리에서 스친다고 하더라도 아마 짧은 눈빛으로 인사 정도를 하며 멀어질 것이다. 그러니 이 말들 역시 그들의 유언이 된 셈이다.
 역으로 나는 타인에게 별생각 없이 건넨 말이 내가 그들에게 남긴 유언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같은 말이라도 조금 따뜻하고 예쁘게 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p.19>

 

 그러다 오해가 풀리거나 화가 누그러졌을 때 종종 상대에게 사과를 받기도 했는데, 곰곰 생각해보면 이러한 사과는 말보다 글을 통해 받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리 짧은 분량이라도 사과와 용서와 화해의 글이라면 내게는 모두 편지처럼 느껴진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떠한 양식의 삶이 옳은 것인지 나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다만 앞으로 살아가면서 편지를 많이 받고 싶다. 편지는 분노나 미움보다는 애정과 배려에 더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편지를 받는 일은 사랑받는 일이고 편지를 쓰는 일은 사랑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p.26>

 

 "고독과 외로움은 다른 감정 같아. 외로움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것일 텐데, 예를 들면 타인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 드는 그 감정이 외로움일 거야. 반면에 고독은 자신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 같아. 내가 나 자신을 알아주지 않을 때 우리는 고독해지지. 누구를 만나게 되면 외롭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야. 고독은 내가 나를 만나야 겨우 사라지는 것이겠지. 그러다 다시 금세 고독해지기도 하면서."

<p.51>

 

 "사는 게 낯설지? 또 힘들지? 다행스러운 것이 있다면 나이가 든다는 사실이야. 나이가 든다고 해서 삶이 나를 가만두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스스로를 못살게 굴거나 심하게 다그치는 일은 잘 하지 않게 돼."

<p.63>

 

 해남에서 온 편지

 배추는 먼저 올려보냈어.
 겨울 지나면 너 한번 내려와라.
 내가 줄 것은 없고
 만나면 한번 안아줄게.

<p.69>

 

 울음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
 꼭 울음처럼 여겨질 때가 많았다.

 일부러 시작할 수도 없고
 그치려 해도 잘 그쳐지지 않는.

 흐르고 흘러가다
 툭툭 떨어지기도 하며.

<p.70>

 

 나와 당신이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 우리의 사랑을 어렵게 만든다. 그 수많은 다름을 견주어보는 동시에 그 다름을 감내해내야 한다는 점이 우리의 사랑을 아프게 만든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평소 자신에게조차 내색하지 않던 스스로의 속마음과 마주치게 되는데, 그것은 대개 오랜 상처나 열등감 같은 것이라는 사실이 우리의 사랑을 외롭게 한다.
 하지만 나와 당신이 다르지 않다면 사랑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당신의 외모와 성격과 목소리와 자라온 환경과 어떤 것에 대해 품고 있는 마음이 나와 다르다는 점에서 사랑이 탄생한다. 자신과 비슷한 수준, 환경, 생각을 가진 사람만을 찾아 사랑이나 결혼을 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을 나는 긍정하지 않는다.

<p.94>

 

 일상의 공간은 어디로는 떠날 수 있는 출발점이 되어주고 여행의 시간은 그간 우리가 지나온 익숙함들을 가장 눈부신 것으로 되돌려놓는다. 떠나야 돌아올 수 있다.

<p.110>

 

 배가 고플 때 먹고, 고단할 때 몸을 뉘이고, 졸음이 오면 애써 좋아내지 않고 잠이 드는 것. 어쩌면 이것이 인간으로서 성취할 수 있는 해탈과 가장 가까이 자리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그렇게 참지 않는다면 조금 덜 욕망할 수 있을 테니까.

<p.120>

 

 "제가 잘은 모르지만 한창 힘들 때겠어요. 적어도 저는 그랬거든요. 사랑이든 진로든 경제적 문제든 어느 한 가지쯤은 마음처럼 되지 않았지요. 아니면 모든 것이 마음처럼 되지 않거나. 그런데 나이를 한참 먹다가 생각한 것인데 원래 삶은 마음처럼 되는 것이 아니겠더라고요. 다만 점점 내 마음에 들어가는 것이겠지요. 나이 먹는 일 생각보다 괜찮아요. 준이 씨도 걱정하지 말고 어서 나이 드세요."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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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의 하루

 

 한국 시간으로 오후 2시 40분에 인천공항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다시 한국 시간으로 다음 날 새벽 1시에 미국 LA에 도착한다.

 

 열 시간이 넘는 비행시간 틈틈이 여전히 한국 시간을 가리키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오늘은 날이 좋으니 지금쯤 너는 산책을 갔겠다.

 운이 좋다면 집 앞에 푸드트럭이 왔을지 모른다. 그러면 또 추로스를 사 왔을 수도 있겠다.

 지금쯤 너는 저녁을 먹고 있겠다. 아침에 끓이고 남은 북엇국을 먹었을지 모른다.

 아니면 저번처럼 간단하게 스파게티를 만들어 먹었을 수도 있겠다.

 지금쯤 너는 자러 들어갔겠다. 어젯밤은 잠을 잘 못 이루던 너였으니까. 

 그 사이 비행기 창문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붉어지기도 어두워지기도 했다가 다시 밝아진다.  

 

 호텔 방에 도착해 짐을 내려놓자마자 와이파이를 연결한다. 

 쏟아지는 메시지를 눈으로 먼저 훑는다. 그 사이 나쁜 일은 생기지 않았구나.

 그리고 너의 메시지를 확인한다.

 잠들기 전 남겨 놓은 너의 하루 이야기를 듣는다.

 너의 하루가 나의 하루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