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 카드 문구를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는 톰 핸슨(조셉 고든 레빗)은 사장의 비서로 일하게 된 썸머 핀(조이 데이셔넬)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어느 날 엘리베이터 안에서 음악을 듣고 있던 톰에게 '나도 이 음악을 좋아한다'며 썸머가 말을 건 것을 계기로 두 사람의 관계는 시작된다. 그러나 톰이 썸머를 운명적인 사랑이라고 믿는 태도와는 다르게 썸머는 사랑은 환상일 뿐이라는 현실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에 둘은 친구인 듯 연인인 듯한 관계를 이어간다.
처음에는 친구건 연인이건 함께 한다는 것이 좋았다. 톰은 썸머와 보내는 시간이 행복했고 썸머도 그랬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톰은 썸머와의 관계를 연인 관계로 정립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썸머는 이런 톰의 태도에 부담을 느끼게 되고 둘은 다툼 끝에 결국 헤어지게 된다. 썸머를 운명적인 사랑이라고 믿었던 톰은 그 뒤로 힘든 나날을 보낸다. 그리고 운명적 사랑 따위는 없다는 비관적 태도를 가진 사람으로 바뀌게 된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후 톰은 우연히 썸머를 다시 만나게 된다. 썸머는 그녀가 카페에서 읽고 있던 책에 관심을 가져준 한 남자가 그녀의 운명적인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미 결혼한 뒤였다. 그리고 톰에게 고맙다는 말과 함께 '운명적인 사랑은 있어, 다만 그게 내가 아니었을 뿐이야'라는 말을 전한다. 이에 톰은 썸머의 행복을 빌어준다.
그 뒤 톰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본인이 정말로 하고 싶었던 건축가 일을 새로 시작하며 바쁜 일상을 보낸다. 그리고 새 회사 면접장에서 마주친 한 여자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다. 운명적인 사랑은 없다고 생각하던 톰은 다시 한번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끝나고 커피 한 잔 하자는 제안을 한다. 그녀의 이름은 어텀(Autumn).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듯 그에게 새로운 사랑이 찾아왔음을 알게 되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과거에 내가 누군가를 처음 좋아하기 시작했을 때 그때의 나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사랑은 운명적이고 고귀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인공은 영화 속에서 '졸업'이라는 영화를 잘못 이해하여 운명적 사랑을 믿게 되었다고 했지만 나는 정확히 무엇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잘 모르겠다. 아마 비슷하게 음악이나 책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 사람은 내 운명적 사랑이고 앞으로 영원히 함께할 거야'라는 생각은 연애 초반, 그러니까 입가에 늘 웃음을 띠게 되고 세상이 핑크빛으로 보이는 때에는 누구나 한 번쯤 가져볼 수 있는 생각이긴 하다. 그러나 나는 이 생각을 몇 살 안 된 그 어린 시기에 무척이나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남녀 간의 연애와 사랑을 운명적이고 진지한 무언가로 접근하게 되면서 나는 몇 가지 부작용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중 하나는 나와 상대방의 관계를 운명이라는 강한 접착제로 억지로 붙여놓은 모양 때문에 그 속에 갈등과 이해가 들어갈 틈을 두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사람이 어떻게 조금의 틈도 없이 꼭 맞을 수 있겠는가. 운명이라는 강력 접착제로 억지스럽게 붙여놓은 관계는 연애 초기에는 갈등과 이해 상황을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틈으로 갈등이 스며드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운명의 연인과 갈등이 생긴다는 건 내가 가진 운명적 사랑의 개념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에 특정한 행동양식을 보였다. 그것은 바로 갈등이 스미는 틈을 메우기 위해 나의 모습을 요리조리 바꿔 상대방과 꼭 맞도록 한 것이다. 나는 이를 두고 '헌신' 혹은 '희생'이라고 자기합리화 했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있으면 내가 조금 힘들더라도 들어주려고 노력했고, 상대방과 맞지 않는 취향이 있으면 나도 그 취향을 좋아해 보려고 노력했고, 상대방을 위해서라면 내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건 운명적 사랑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이는 얼마 오래가지 못했다. 상대방에 따라 요리조리 바꾼 내 모습은 종국에는 내 본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 당연했고, 상대방을 위한 지나친 희생과 배려는 나 스스로를 지치게 만들었다. 그렇게 쌓인 감정의 피로는 쌓이고 쌓이다 결국은 불이 붙은 화산처럼 터지곤 했다. '나는 너를 위해(혹은 우리의 운명적인 사랑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까지 희생하고 있는데 너는 왜 그 정도밖에 못하는 거니?' 같은 서운한 마음이었다. 결국 그 고귀한 운명적 사랑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환상에 사로 잡혀 현실 속 타인과의 인간관계에서 기본적으로 마주칠 수밖에 없는 갈등과 화해를 잘 다루지 못한 것이다. 사랑에 열정적인 것은 좋았으나 이것 역시 넓은 의미에서 보면 한 사람과의 인간관계라는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건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만약 내가 과거의 나에게 조언을 해줄 수 있다면 "먼저 편한 친구라고 생각해"라고 말을 해줬을 것이다. 그러면 상대방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조금의 여유를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말해준다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있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영화를 다시 보고 난 뒤에 운명적인 사랑을 믿는 태도가 어느 정도 이기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재차 확인할 수 있었다. 한쪽의 운명론적 세계관에 의해 상대방을 운명의 상대로 만드는 것부터 그렇다. 또한 한쪽의 끊임없는 위선과 자기 헌신으로 인해 상대방이 겪어야 하는 혼란과 부담을 생각해보면 이는 결코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연애의 유형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때로는 상대방에게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보여주고,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나 자신의 삶을 먼저 규정하려는 태도가 멀리 보았을 때 더 좋은 연애를 할 수 있는 방법일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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