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프랑스 아이처럼 > 파멜라 드러커맨, 2013

by Ditmars 2021. 1. 4.

<프랑스 아이처럼> 파멜라 드러커맨, 2013

 

 하지만 적어도 육아와 교육에 있어서 프랑스는 여타의 문제 많은 선진국들과는 판이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에는 토를 달기 힘들다. 그들의 철학 중 일부는 내게도 매우 익숙하다.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자연을 많이 보여주고 책을 읽어주는데 열을 올린다. 자녀에게 테니스와 미술 수업을 듣게 하고 자연사박물관에도 열심히 데려간다. 
 차이가 있다면 프랑스 사람들을 이런 모든 일들에 강박을 갖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부모라 해도 자신의 일상을 자녀를 위해 송두리째 바치지 않으며 그런 이유로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p.16>

 

 '미국 여자들은 음식을 몰래 먹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기쁨보다 죄책감이 훨씬 커진다. 먹는 즐거움이 존재하지 않는 척하거나 오래도록 식단에서 기쁨의 요소를 제거하려고 하면 오히려 체중이 늘어난다.'
 - <프랑스 여자는 살찌지 않는다>, 미레유 길리아노

<p.48>

 

 '잠은 아이와 가족의 삶을 드러낸다. 침대로 가 잠들기 위해서, 부모와 몇 시간을 떨어져 있기 위해서, 아이는 반드시 제 몸이 계속 살아 있을 거라고 신뢰해야 한다. 비록 스스로 몸은 통제할 수 없을 때조차도, 또 밤에 찾아오는 낯선 생각들을 맞이하기 위해서 반드시 마음이 평온해야 한다.'

 '평화롭고 평온한 긴 밤을 발견하고 고독을 받아들이는 자체가 아이가 슬픔을 이겨내고 내면의 평화를 회복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자는 법을 배우는 것과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은 결국 동의어가 아니겠는가?'
 - <잠, 꿈, 아이>, 엘렌 드 레스니데르

<p.68>

 

 프랑스 부모들은 아기가 잘 자도록 가르치는 것이 이후 위생습관, 균형 잡힌 식사법, 자전거 타는 법 등을 가르치는 것과 똑같은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8개월이나 된 아이와 한밤 중에 깨어 씨름하는 것은 헌신적인 부모의 징표가 아니다.

<p.77>

 

 프랑스 부모는 흔히 아이들에게 '사쥬 sage (현명해라)'라고 말한다. 미국 부모들이 '착하게 굴어라 be good'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처럼 프랑스에선 '현명하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안에는 좀 더 큰 뜻이 담겨 있다. 누군가의 집을 방문할 때 내가 빈에게 착하게 행동하라고 말하면, 아이는 그 시간 동안 길들여진 행동을 해야 하는 야생동물 취급을 받는 것과 같다. 착해지라는 건 그것이 아이의 본성과 정반대라는 숨은 뜻이 있다.
 그러나 '현명해라' 라는 말은, 이미 빈에게 있는 올바른 판단력을 발휘하고 다른 사람을 의식하고 존중하라는 뜻이다. 아이 스스로 자신을 통제할 수 있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지혜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아이를 믿는다는 뜻을 함축하기도 한다.

<p.92>

 

 내가 아는 프랑스 부모들은 아이들이 풍부한 경험을 갖고 음악과 미술을 다양하게 접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 경험들을 완전히 흡수하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프랑스에선 불안해하고 짜증내고 까다롭게 구는 아이보다 자제력을 발휘해 차분하게 있는 아이가 더 즐겁게 놀 수 있다. 물론 프랑스 부모들도 아이에게 어른과 똑같은 무한한 인내심이 있다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교향곡 전곡을 감상하거나 공식적인 연회에서 몇 시간이고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통상 그들이 말하는 인내는 몇 분 혹은 몇 초 정도를 의미한다.

<p.93>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 혼자서도 행복할 수 있는 법을 배우는 거예요."

<p.98>

 

 "엄마가 아이에게 기다리라고 말했는데, 아이가 비명을 질렀더니 엄마가 곧장 달려와서 기다림이 끝난다? 그러면 아이는 '아, 이렇게 하면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구나' 하고 배웁니다. 기다리지 않고 비명을 질렀는데, 안겨 다니고 싶다고 울며 떼를 썼는데, 오히려 그런 행동이 보상을 받게 된 셈이죠."

<p.105>

 

 '아이를 보살피느라 전전긍긍해 모든 불편함을 없애준다면 아이 앞에 엄청난 불행을 준비시키는 것이나 다름없다.'

<p.121>

 

 사회학자 아네트 라로는 백인이나 아프리카계 중산층 부모 사이에서 목격한 '집중 양육'의 현실을 이렇게 꼬집는다.

 "이들은 자녀를 일종의 프로젝트로 본다. 일련의 조직활동, 집중적인 추론과 언어발달 과정, 교육기관에서의 경험을 세밀하게 관리 감독함으로써 아이의 재능과 기술을 한층 계발할 수 있다고 믿는다."

<p.179>

 

 프랑스 여성들이 죄책감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은 '엄마가 24시간 아이와 함께 있는 것이 그다지 건강하지 않다.'는 확신 덕분이다. 지나친 관심과 걱정으로 아이들을 짓누르고, 엄마와 아이의 욕망이 뒤얽혀 끔찍한 관계의 융합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믿는다. 아이는 엄마의 개입 없이도 스스로 내면의 삶을 일구어가야 한다.

<p.187>

 

 "부부가 제일 중요해요. 살면서 자기가 선택한 유일한 것이니까요. 자식은 내가 선택한 게 아니잖아요. 하지만 남편은 내가 선택한 사람이고 그와 함께 삶을 가꾸어 가야 해요."

<p.234>

 

 '식사기간은 차분하고도 즐거워야 하며 아이가 단 한 입도 먹지 않더라도 식사 내내 자리를 지키도록 가르쳐야 한다.'

 '강요는 하지 마라. 그러나 포기하지도 마라. 서서히 음식에 익숙해져 갈 것이고 맛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마침내 그 음식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p.255>

 

 "길을 안내하는 사람, 즉 리더가 있는 편이 더 좋아요. 아이는 엄마나 아빠가 통제해준다는 느낌이 들어야 해요. 프랑스에 이런 속담이 있어요. '나사는 조이는 것보다 푸는 게 더 쉽다.' 그만큼 엄격해야 한다는 뜻이죠. 너무 조이면 풀어주면 되죠. 하지만 너무 풀어주면 나중에는 조이려 해도 어떻게 하는지 잊어버리고 말아요."

<p.280>

 

 그렇다면 이 카드르는 어떻게 만드는가? 카드르를 만드는 과정은 때로 매우 혹독해 보인다. 모든 일에 '안 돼'를 연발하고 '결정은 내가 한다.' 고 윽박지른다고 카드르가 생기지는 않는다. 프랑스 부모들이나 교육자들이 카드르를 만드는 중요한 방식은 우선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많은 시간을 들여 아이와 함께 '어떤 일은 허용되고 또 어떤 일은 안 되는가.' 대화한다. 팬터마임을 통해 투명한 벽이 정말로 있는 것처럼 믿게 만들 듯, 카드르를 계속 강조함으로써 그게 물리적으로도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p.281>

 

 프랑스 부모들에게 자녀에게 가장 바라는 바가 뭐냐고 물어보면 '자신의 처지를 편안하게 생각하기' 나 '세상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내기' 같은 것을 꼽는다. 아이가 자신만의 취향과 견해를 길러나가기를 바란다.

<p.284>

 

 권위는 아이와의 상하관계에서가 아니라 상호관계 안에서 나오는 것이다. 즉, 공모 의식과 권위 사이의 균형을 잘 이루어온 것이다.

<p.286>

 

 그가 좋아하는 역설은 부모가 권위를 가지려면 대부분의 시간은 '돼'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언제나 안 된다고 금지만 한다면 권위주의죠."

 부모 권위의 요점은 아이가 뭔가를 못하도록 막는 게 아니라 뭔가를 할 수 있게 권한을 주고 인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부모는 어쩌다 한 번만 금지를 해야 합니다. 금지를 통한 순종은 깨지기 쉽고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p.290>

 

 '제한이 없으면 아이들은 스스로의 욕망에 소모되고 만다. 프랑스의 부모들이 카드르를 강조하는 이유는 경계가 없으면 아이들이 자기 욕구에 제압당해버린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카드르는 내면의 소용돌이를 억누르고 차분하게 가라앉히는데 도움을 준다.'
 왜 파리의 공원에서 울며 떼를 쓰는 유일한 아이들이 내 아이들 인지도 설명이 된다. 자기 욕구에 제압당했는데 그걸 스스로 멈출 줄을 모를 때, 바로 떼쓰기가 나온다.

<p.291>

 

 "기꺼이 주고 마지못해 반대하라. 그러나 거절은 취소할 수 없도록 결정적으로 하라. 어떠한 애원에도 움직이지 마라. '안 돼'를 한 번 내뱉었으면 아이가 대여섯 번 힘을 쏟더라도 철의 장벽처럼 버텨라. 결국에는 아이도 더 이상 뒤집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아이도 원하는 모든 것을 얻지 못하게 되어도 참을성 있게, 한결같게, 차분하게, 체념하게 될 것이다."
 - <에밀>, 루소

<p.295>

 

 이들은 '잘했다'는 칭찬이 너무 잦으면 아이가 긍정적인 평가에 중독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걸 아는지도 모른다. 그런 상태가 지속되면 아이들은 만족감을 얻기 위해 타인의 인정을 갈구하게 될 것이다. 또 뭘 하든 칭찬이 돌아온다면 굳이 노력할 필요도 없어질 것이다. 어떻게 해도 칭찬은 받을 테니 말이다.

<p.313>

 

더보기

 여러 육아 서적을 읽으며 도출하게 된 결론 중 하나는 아이의 행동에 지나친 억압을 하는 것도, 지나친 허용을 하는 것도 좋지 않다는 것이다. 막상 이 결론을 생각하여 말로 떠올리고 나니 너무나도 당연하여 그 누구라도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럼에도 내가 '여러 육아 서적을 읽으며 도출하게 되었다고' 결론을 뒷받침하는 까닭이 있다. 그 이유는 말로 하기는 쉬워도 실제 상황에서 지나친 억압과 지나친 허용을 규정하는 것이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다양한 상황 속에서 매 순간 '여기까지'라는 선을 긋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아이를 키우는 동안에는 무수히 많은 개별 사건들이 있고, 그 무수히 많은 개별 사건들마다 정한 한계를 매번 동일하게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제목처럼 '그땐 맞고, 지금은 틀리다'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렇게 개별 케이스가 많을 때에는 작은 케이스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큰 맥락을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본적인 원칙을 세우고 그 아래 자잘한 사건들에 대해서는 '맥락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아이에게 한계를 정해주고 그 안에서 자율을 허용하는 것이다. 매 케이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때마다 조금씩 다를 수는 있지만, 길게 봤을 때 일관성을 갖는 것에 목표를 두는 것이다. 마치 프랑스의 화가 조르주 쇠라가 개발한 점묘화와 같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긋나 있는 점들과 색이 다른 점들이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하나의 완성된 그림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내게 육아의 맥락을 정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책의 내용은 주로 아이의 한계를 규정하는 데 많은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이건 너무 하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든 적도 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아이에게 자율성을 주는 방식과 한계의 필요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데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래서 읽다 보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은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국인이 영국인과 결혼하여 프랑스에서 아이를 키우게 되는 아주 특별한 상황에서 그녀가 느낀 생각과 감정을 읽어보는 것은 무척 즐거운 경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