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만남이란 인간의 감정을 위해서 꽤 소중하다.
<상, p.47>
그러나 저는 교사 생활을 하는 동안에 몇 번인가 그런 사례를 목격해 왔습니다. 능력이 있는 아이들은 능력이 있다는 이유로, 주위 어른들의 뜻에 따라서 달성해야 할 목표가 끊임없이 높이 올라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눈앞의 현실적인 과제를 처리하는 일에 급급한 나머지, 어린이로서 당연히 지니고 있어야 할 신선한 감동이나 성취감이 서서히 상실되어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환경 속에 놓인 아이들은 이윽고 마음을 굳게 닫게 되고, 자연스러운 감정의 발로를 숨기게 됩니다. 그렇게 닫힌 마음을 다시 열려면 오랜 세월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상, p.182>
"하지만 인간은 무엇인가에 스스로 밀착해 살아가는 존재지."
<상, p.190>
"슈베르트는 훈련에 의해서 이해할 수 있는 음악이지. 나 역시 처음에 들었을 때는 지루했어. 네 나이라면 그건 당연한 일이야. 하지만 이제 곧 알게 될 거야. 인간은 이 세상에서 따분하고 지루하지 않은 것에는 금세 싫증을 느끼게 되고, 싫증을 느끼지 않는 것은 대개 지루한 것이라는 걸. 그런 거야. 내 인생에는 지루해할 여유는 있어도 싫증을 느낄 여유는 없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두 가지를 구별하지 못하는 게 보통이지만."
<상, p.201>
"전쟁이 시작되면 군대에 끌려가지. 군대에 끌려가면 총을 둘러 메고 전쟁터로 가서, 상대편 군인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되지. 그것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죽일수록 훌륭한 군인이 되고, 영웅이 된다는 걸 자네도 알고 있겠지. 자네가 살인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런 건 아무도 헤아려주지 않네. 그것은 꼭 해야만 하는 일이거든. 그렇지 않으면 거꾸로 자네가 죽게 되니까 말이야. 이것이 인간 역사의 가장 중요한 대목인 걸세."
<상, p.255>
"모든 일에는 말이야, 나카타 씨, 순서라는 것이 필요하네. 앞만 보고 가도 안 되지. 너무 앞만 보고 가다가는 발밑에 주의를 안 하게 돼 넘어지기 쉬운 걸세. 그렇다고 발치의 자질구레한 것만 보고 있어도 안 되지. 앞을 잘 보지 않으면, 무언가에 부딪히게 되니까. 그러니까 조금은 앞을 보면서 순서를 좇아 정확히 일을 처리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 말일세. 무슨 일이건 그렇지 않은가."
<상, p.258>
"경험적으로 말한다면, 인간이 무엇인가를 강려라게 원할 때 그것은 대개 찾아오지 않지. 인간이 무엇인가를 필사적으로 피하려고 할 때, 그것은 저쪽에서 자연히 찾아오고 말이야. 물론 그것은 일반론에 지나지 않지만 말이야."
"그 일반론을 적용하면 내 경우는 도대체 어떻게 됩니까? 만일 오시마 씨가 말하는 것처럼, 내가 무언가를 구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피하려고 한다면?"
"어려운 문제인데, 하지만 굳이 말한다면, 이런 얘기가 되지 않을까? 그 무언가는 아마 네가 원할 때, 원하는 형태로는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상, p.275>
"나는 보다시피 이런 인간이다 보니 지금까지 여러 곳에서, 여러 의미에서 차별받아 왔어. 차별당하는 심정이 어떤 것인지, 그것이 얼마나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것인지, 그것은 차별당해 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지. 아픔이라는 것은 개별적인 것이어서, 그 뒤에는 개별적인 상처 자국이 남아. 그렇기 때문에 공평함이나 공정함을 추구하는 데에는 나도 나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해. 다만 내가 그것보다 더 짜증이 나는 것은, 상상력이 결여된 인간들 때문이야. T. S. 엘리엇이 말하는, '공허한 인간들' 이지. 상상력이 결여된 부분을, 공허한 부분을, 무감각한 지푸라기로 메운 주제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바깥을 돌아다니는 인간이지. 그리고 그 무감각함을, 공허한 말을 늘어놓으면서, 타인에게 억지로 강요하려는 인간들이지. 즉 쉽게 말하자면, 조금 전 도서관의 실태를 조사하러 온 두 여성 같은 인간들이라구."
"게이든, 레즈비언이든, 정상인이든, 페미니스트든, 파시스트의 돼지든, 공산주의자든, 힌두교 신자든,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어. 어떤 깃발을 내걸든 나는 전혀 상관하지 않아. 내가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런 공허한 사람들이야. 그런 사람들과 부딪치면, 나는 참을 수가 없거든." (...)
"결국 사에키 씨의 연인을 죽인 것도 그런 인간들임에 틀림없어. 상상력이 결여된 속 좁은 비관용성 독불장국 같은 계급투쟁의 운동 방침, 공허한 말들, 찬탈된 이상, 경직된 시스템. 내가 정말로 두려운 것은 그런 것들이야. 나는 그런 것을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증오해. 무엇이 옳고, 옳지 않은가, 물론 그것도 매우 중요한 문제지. 그러나 그런 개별적인 판단은 혹시 잘못되었더라도 나중에 정정할 수 있어. 잘못을 스스로 인정할 용기만 있다면, 대개의 경우는 돌이킬 수 있지. 그러나 상상력이 결여된 속 좁은 것이나 관용할 줄 모르는 것은 기생충과 마찬가지거든. 중간 숙주를 바꾸고 형태를 바꾸어서 끝없이 이어져 가는 거야. 거기에는 구원이 없어. 나는 그런 종류의 인간을 여기에 들여놓고 싶지는 않아."
"나는 그런 것을 적당하게 웃어넘길 수 없어."
<상, p.323>
"당신은 좀 별나군그래."
"네. 이따금 그런 말을 듣곤 합니다."
"나는 그런 별난 사람이 좋아. 이런 세상을 아무렇지 않은 보통 얼굴로 곧이곧대로 살아갈 수 있는 놈들이 오히려 믿을 수 없는 놈들 아니겠어."
"그럴까요?"
"그렇다니까. 그게 내 의견이야."
<상, p.334>
"오시마 씨, 내 주위에서 잇따라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나요. 그중의 어떤 것은 내가 선택한 일이고, 어떤 것은 전혀 선택하지 않은 일이에요. 하지만 나는 그 두 가지를 잘 구별할 수 없게 됐어요. 즉 내가 선택했다고 생각한 일도, 실제로는 내가 그 일을 선택하기 전에 이미 일어나기로 정해져 있던 것처럼 생각돼요. 나는 다만 누군가가 미리 어딘가에서 정한 것을, 그냥 그대로 따르고 있을 뿐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아무리 스스로 생각하고, 아무리 애써 보았자 그런 것은 전부 헛일이라고 말이에요. 아니, 노력하면 할수록 내가 점점 더 내가 아니게 되어가는 것 같은 느낌조차 들어요. 내가 나 자신의 궤도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 같은 느낌 말이에요. 그리고 그런 나에게 아주 힘든 일이거든요. 아니, 무섭다고 하는 편이 맞을지도 몰라요.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때때로 온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아요."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즉 네 선택이나 노력이 헛수고로 끝나도록 운명 지어져 있다 하더라도, 그래도 너는 조금도 어김없는 너인 거고, 너 이외의 아무도 아닌 거야. 너는 너로서 틀림없이 앞으로 전진하고 있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상, p.352>
"물어보는 것은 한때의 수치, 물어보지 않는 것은 평생의 수치, 라는 말을 우리 할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말했지."
<하, p.50>
"러시아의 작가 안톤 체호프가 멋진 말을 했네. '만일 이야기 속에 권총이 나온다면, 그것은 발사되어야만 한다' 고 말일세. 무슨 말인지 알겠나?" (...)
"체호프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것일세. 필연성이라는 것은 자립적인 개념일세. 그것은 논리나 모럴이나 의미성과는 다르게 구성된 것일세. 어디까지나 역할로서의 기능이 집약된 것이지. 역할로서 필연이 아닌 것은 거기에 존재해서는 안 되지만, 반면 역할로서 필연인 것은 거기에 있어야 하네. 그것이 바로 연극의 대본을 만드는 방법, 좀 더 유식한 말로는 희곡작법이라고 하지. 논리나 도덕이나 의미는 그것 자체가 아니라 관련성 속에서 생겨나네. 체호프는 희곡 작법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던 거야."
<하, p.106>
"저, 오시마 씨. 혼자 있을 때 상대를 생각하며 서글픈 마음이 된 적 있어요?"
"물론. 이따금 있지. 특히 달이 창백하게 보이는 계절에는, 특히 새들이 남쪽으로 건너가는 계절에는, 특히..."
"어째서 물론이죠?"
"누구나 사랑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결여된 일부를 찾고 있기 때문이지.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다소의 차이는 있을망정 언제나 애절한 마음이 되는 거야. 아주 먼 옛날에 잃어버린 그리운 방에 발을 들여놓은 것 같은 기분이 되는 거지. 당연한 일이야. 그런 기분은 네가 발명한 게 아니야. 그러니까 특허 신청 같은 것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하, p.122>
"그 베낭은 네게는 틀림없이 자유의 상징 같은 것이겠군?"
"아마도."
"자유의 상징을 손에 넣고 있는 것은 자유로움 그 자체를 손에 넣은 것보다 행복한 일일지도 몰라."
(...)
"다무라 카프카 군, 이 세상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유 같은 건 원하지 않아. 원하고 있다고 믿을 뿐이지. 모든 것은 환상이야. 만약 정말로 자유가 주어진다면, 사람들은 대부분 무척 난감해할걸. 잘 기억해 두라구. 사람들은 실제로는 부자유를 좋아한다는 것을 말이야."
<하, p.154>
"제가 추구하는 것은, 제가 추구하는 강함은, 이기거나 지거나 하는 강함이 아닙니다.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을 받아치기 위한 벽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을 받아 거기에 견뎌내기 위한 강함입니다. 불공평함이나 불운, 슬픔이나 오해, 몰이해, 그런 것에 조용히 견뎌나가기 위한 강함입니다."
<하, p.157>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부처님의 제자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제자들 가운데 명하라는 사람이 있었다. 머리가 나쁘고 아둔해서, 간단한 경전의 문구도 하나 만족스럽게 외우지 못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한테 바보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어느 날 석가가 그에게 말했다. "명하야, 너는 머리가 나쁘니까 경전은 더 이상 외우지 않아도 된다. 그 대신 앞으로는 현관 토방에 앉아서, 여기 있는 신발을 닦도록 해라." 명하는 순진했기 때문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석가. 네 엉덩이나 핥아라" 하고 반발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로부터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석가가 시킨 대로 다른 사람의 신발을 부지런히 닦았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깨달음을 얻어 석가 제자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인물 중 한 분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던 걸로 호시노 청년은 기억하고 있다.
<하, p.172>
푸르니에의 유려하고 기품 있는 첼로 연주에 귀를 기울이면서, 청년은 어렸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매일 근처의 강에 가서 물고기나 미꾸라지를 잡던 시절의 일을. 그때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됐는데,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냥 살아가면 되었다. 살아 있는 날까지, 나는 어떤 존재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자연히 그렇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느새 그렇지 않게 되었다. 살아가면서 점점 나는 아무 존재도 아닌 것이 되고 말았다. 그것 참 이상한 얘기로군. 인간이란 살기 위해 태어나는 것 아닌가? 그렇잖아? 그런데도 살아가면 갈수록 나는 알맹이를 잃어간다, 그저 텅 빈 인간이 되어가는 것 같다. 게다가 앞으로 살아가면 갈수록 나는 더욱더 텅 비고 무가치한 인간이 되어갈지도 모른다. 그건 잘못된 것이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그런 사고의 흐름을 어디에선가 바꿔놓을 수는 없을까?
<하, p.176>
"솔직히 말하면, 그녀에게는 이번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얘기하지 않았어. 그녀는 내가 여기에 통나무집을 갖고 있는 것도 모를 거야. 사에키 씨는 가능하면 여러 가지 일을 모르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거든. 모르면 숨길 필요가 없게 되고, 그만큼 골치 아픈 일에 말려들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야."
<하, p.214>
"그래서 혼란스럽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단 말이지?"
"혼란스러워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네가 상대에 대해 느끼는 것과 같은 강렬하고 순수한 감정을, 상대도 역시 너에 대해 갖고 있는지 아닌지, 넌 알 수 없단 말인가?"
"그걸 생각하기 시작하면 몹시 괴로워져요."
"네가 느끼는 감정은 나도 잘 알아. 그렇지만 그것은 역시 너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야. 아무도 너를 대신해서 생각해 줄 수 없어. 요컨대 사랑을 한다는 건 그런 거야, 다무라 카프카 군. 숨이 멎을 만큼 황홀한 기분을 느끼는 것도 네 몫이고, 깊은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것도 네 몫이지. 넌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그것을 견뎌야만 해."
<하, p.216>
"상대가 누구든, 무엇이든 간에 대화는 하지 않는 것보다는 하는 편이 좋지."
<하, p.224>
"잘 들어, 싸움을 끝내기 위한 싸움이란 어디에도 없어. 싸움은 싸움 자체 속에서 성장해 가거든. 그것은 폭력에 의해 흐른 피를 마시고, 폭력에 의해 상처 입은 살을 뜯어 먹으며 성장해 가지. 싸움이라는 것은 일종의 완전 생물이야. 너는 그것을 알아야 해."
<하, p.279>
나카타 씨는 깊은 잠 속에서, 아마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조용히 죽어갔을 것이다. 얼굴도 평온해서, 겉보기에는 괴로움도 없고 후회도 없고, 미련도 없는 것 같았다. 나카타 씨다워서 좋군, 하고 청년은 생각했다. 나카타 씨의 인생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그것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기 시작하면 어떤 사람의 인생이나 그렇게 뚜렷한 의미가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정말로 무게를 갖는 것은,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이다, 하고 청년은 생각했다. 어떻게 죽느냐에 비한다면, 어떻게 사느냐 같은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사람이 어떻게 죽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역시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나카타 씨의 죽은 얼굴을 보면서 청년은 그런 생각을 했다.
<하, p.317>
"나는 말이야, 아저씨, 이렇게 생각해.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나카타 씨라면 이런 경우에 어떻게 말할까, 나카타 씨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할까, 하고 일일히 아저씨를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나카타 씨의 일부가 앞으로도 내 안에서 계속 살아가게 되는 거야."
<하, p.399>
"우리는 모두 여러 가지 소중한 것을 계속 잃고 있어. 소중한 기회와 가능성, 돌이킬 수 없는 감정. 그것이 살아가는 하나의 의미지. 하지만 우리 머릿속에는, 아마 머릿속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것을 기억으로 남겨두기 위한 작은 방이 있어. 아마 이 도서관의 서가 같은 방일 거야. 그리고 우리는 자기 마음의 정확한 현주소를 알기 위해, 그 방을 위한 검색 카드를 계속 만들어나가지 않으면 안 되지. 청소를 하거나 공기를 바꿔 넣거나, 꽃의 물을 바꿔주거나 하는 일도 해야 하고. 바꿔 말하면, 넌 영원히 너 자신의 도서관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거야."
<하, p.413>
이 책은 읽는 사람들마다 사뭇 다른 이야기로 다가오는 듯하다. 내게는 열다섯 살의 소년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피하고자 먼 곳으로 홀로 떠나지만 결국은 운명을 마주하게 되고 그제야 현실을 마주할 용기를 얻게 된다는 내용으로 다가왔다. 이 속에 작가가 숨긴 많은 상징과 비유가 있는 것 같았지만 아쉽게도 나는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책의 앞부분에 나온 모래폭풍에 대한 이야기가 이 책의 뼈대를 이루는 이야기라는 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책의 주인공 다무라 카프카처럼 꼭 열다섯 살이 되는 해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살다 보면 어느 시점엔가 내게 주어진 운명을 그대로 맞이할 수밖에 없는 순간을 겪게 된다. 여기서 운명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사실 실제 우리가 삶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거창하기보다는 사소하지만 피할 수 없는 일들일 것이다. 예를 들어 미뤘던 대청소나 한 번쯤 가야지 하고 생각했던 건강검진, 코 앞으로 다가온 시험 같은 아주 사소한 일들부터 해소되지 않은 부모님과의 관계라던지 결혼을 결심하거나 앞으로의 진로를 결정하는 중요한 일들이 그러하다. 언뜻 보기에 쉽게 결정하고 행동하면 될 것 같아 보이는 일도 그 사람이 처한 입장과 상황에 따라 최대한 피하고 결정을 미루고 싶은 문제가 되기도 한다. 이럴 때 우리는 다무라 카프카처럼 그 문제로부터 일단 도망치려는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 문제가 내 꽁무니를 쫓아 마침내 바로 내 눈앞에 도달하게 될 때까지 말이다.
내게도 그런 문제들이 많이 있다. 당장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해야 할 일' 앱 속의 목록만 봐도 그러하다. 언젠가는 해야 하지만 단순히 귀찮거나(해야 하지만 하기 싫다는 뜻), 급하지 않거나(혹은 급하지 않다고 생각하거나), 중요하지 않다고(중요하지 않으면 '해야 할 일'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생각하는 일들이다. 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결국 그것을 해내기 위해서는 많은 고민이 필요하고, 또 내가 잘 해낼 수 있을지 두려운 마음이 드는 일들이다. 그 일들은 그렇게 '해야 할 일' 목록의 가장 오래된 항목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내가 그것을 보게 될 때마다 '이봐, 너 아직도 이거 안 하고 있어.'라는 식으로 시비를 걸곤 한다. '해야 할 일'의 목록에서 그 일을 지워버린다고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모래폭풍이 외부가 아닌 내면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것처럼, 그 일은 내가 항목을 지워도, 앱을 삭제해도, 휴대폰을 바꿔도 내 머릿속 한 구석에 계속 남아있을 것이다.
어쩌면 애초부터 우리의 삶에는 험난하고 드라마틱한 운명 같은 일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저 우리는 이렇게 삶 속에서 만나는 사소하지만 피할 수 없는 문제들로부터 도망치려다가 결국 맞서게 되고, 또 마침내 극복해내면서 한 단계씩 성장해 나가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누구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나씩 해 나가면서 사는 것이 결국 삶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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