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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정하다는 착각 > 마이클 샌델, 2020

by Ditmars 2022. 12. 30.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2020

 

 능력주의적 대입이 갖는 특질은 뚜렷해 보인다. 정당한 스펙으로 입학한 사람은 자신의 성취에 자부심을 가질 것이며, 이것은 자기 스스로 해낸 결과라 여길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이 역시 문제가 있다. 그러한 입학이 헌신과 노력을 나타내기는 하지만, 정말로 오직 '자기 스스로' 해낸 결과라고 볼 수 있을까? 그들이 스스로 해내도록 도와준 부모와 교사의 노력은 뭔가? 타고난 재능과 자질은 그들이 오직 노력으로만 성공하도록 했을까? 우연히 얻은 재능을 계발하고 보상해줄 수 있는 사회에 태어난 행운은?

 노력과 재능의 힘으로 능력 경쟁에서 앞서 가는 사람은 그 경쟁의 그림자에 가려 있는 요소들 덕을 보고 있다. 능력주의가 고조될수록 우리는 그런 요소들을 더더욱 못 보게 된다. 부정이나 뇌물, 부자들만의 특권 따위가 없는 공정한 능력주의 사회라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이런 결과를 해냈다'는 잘못된 인상을 심어준다. 명문대 입학을 위해 요구되는 여러 해 동안의 노력 역시 그들이 '나의 성공은 내 스스로 해낸 것'이라는 인식을 강하게 심어준다. 그리고 만약 입시에 실패하면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닌 자기 자신의 잘못'이라는 인식도 심어주게 된다.

 이는 청소년들에게 지나친 부담이다. 시민적 감수성에도 유해하다. 우리가 스스로를 자수성가한 사람 또는 자기충족적인 사람으로 불수록 감사와 겸손을 배우기가 어려워진다. 그리고 그런 감성이 없다면 공동선에 대한 배려도 힘들어지게 된다.

<p.37>

 

 그러나 우리가 겪고 있는 '기술관료 버전'의 능력주의는 능력과 도덕 판단 사이의 끈을 끊어버렸다. 이는 경제 영역에서 '공동선이란 GDP로 환산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간단히 정해 버렸으며, 어떤 사람의 가치는 그가 제공할 수 있는 상품이나 서비스의 경제적 가치에 달려 있다고 못박아버렸다. 또한 정부 영역에서는 능력이란 곧 기술관료적 전문성이라고 보았다.

 이는 다음과 같은 현상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대통령 정책고문으로서 경제학자들의 역할이 점점 커지고 있다. 공동선이란 무엇인지 정희하고 그것을 달성하는 일에 시장 메커니즘이 점점 더 많이 적용되고 있다. 정치 논쟁에서 중요한 도덕적, 시민적 문제들 즉 '불평등 증가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국경 문제에서 살펴야 할 도덕적 부분은 무엇인가?', '일의 존엄은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우리는 시민으로서 서로에게 무엇을 해 주어야 하나?' 등이 소외되고 있다.

<p.57>

 

 다음으로, 이러한 능력주의적 사고방식은 불운을 겪는 사람에게 냉혹한 태도를 부추긴다. 그 고통이 심할수록 '오죽 제대로 못했으면 저럴까' 하는 의심이 짙어진다. 성서의 <욥기>를 떠올려 보자. 당당하고 의로운 인물이던 욥은 아들과 딸들이 폭풍우에 희생된 것을 비롯해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수난을 겪었다. 늘 신께 신실했던 욥은 어째서 그런 고난이 자신에게 내렸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우주적 도박의 대상이 되었음을, 신이 사탄에게 욥의 신심이 어떤 고난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임을 증명하려고 했음을 모르고 있었다.)

 욥이 잃어버린 가족을 위해 통곡하고 있을 때, 그의 친구들은 (과연 친구들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가 뭔가 말도 못할 죄를 지었음이 틀림없다고 하면서 그에게 "대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떠올리라"고 윽박질렀다. 이것을 초기적인 능력의 폭정 사례라 볼 수 있겠다. 고난은 곧 죄의 표시라는 가설로 무장한 욥의 친구들은 그의 고통이 뭔가 큰 죄를 지었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며, 따라서 욥이야말로 그의 자녀들의 살해자라고 잔혹하게 을러댔다. 비록 욥 자신은 스스로가 무죄임을 알았지만 그 역시 친구들처럼 능력주의 신학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그는 신께 부르짖었다. 대체 왜 내가, 의로운 사람인 내가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느냐고.

 마침내 신이 욥에게 말씀하실 때 그는 욥과 그 친구들이 가졌던 능력주의 가설을 부정함으로써, 희생자를 단죄하는 잔인한 논리를 부정한다. 발생하는 모든 일이 사람의 행동에 대한 보상이나 처벌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라고 천명한다. 모든 빗방울이 선한 자의 곡식을 축복하려 내리는 것도 아니고, 모든 가뭄이 사악한 자를 징계하려 드는 것도 아니다. 어쨌든 아무도 살지 않는 황무지에도 비는 내린다. 신의 창조 또한 오직 인간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우주는 인간중심적 시각으로 들여다 보기에는 너무 크며, 신의 뜻 역시 인간의 이해력을 벗어나 있다.

 신은 욥의 의로움을 인정한다. 그러나 신의 질서를 인간의 도덕 논리로 이해하려 했던 점에 대해서는 비난한다. 이는 <창세기>와 <출애굽기>에 나타난 능력주의의 신학에서 급격히 이탈하는 것이다. 자신은 우주적 능력주의의 주재자가 아니라 하면서, 신은 스스로의 무한한 권력을 강조한다. 그리고 욥에게 굴욕 속에서 교훈을 얻으라고 가르친다. 신에 대한 믿음은 창조의 위대함과 신비로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신이 각 개인의 능력이나 성과에 따라 합당한 상이나 벌을 내리리라고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p.69>

 

 능력주의 논쟁은 구원을 논의할 때 다시 기독교에서 등장한다. 신앙이 독실한 사람은 교리를 따르고 선행을 함으로써 구원을 얻어낼 수 있는가, 아니면 오직 신이 각자의 생활 태도와 상관없이 구원받을 사람을 자유롭게 선택하는가? 첫 번째가 더 정당해 보인다. 권선징악의 틀에 맞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학적인 문제가 있다. 신의 전능함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구원이라는 게 우리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며 따라서 받아 마땅한 것이라면 신은 거기에 얽매이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의 능력을 인정해야만 하게 된다. 구원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스스로 구제한다'는 의미가 되며, 따라서 신의 무한한 힘에는 한계가 생기게 된다.

 두 번째는 구원을 노력과 무관한 선물로 보며, 따라서 신의 전능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다른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신이 세상 모든 것의 주재자라면 아그이 존재 역시 주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신이 정의롭다면 그의 힘으로 방지할 수 있는 고통과 악이 왜 발생하도록 두는 것인가? 신이 전능함에도 악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가 정의롭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신학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 견해가 병립하기란 (불가능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매우 어렵다. '신은 정의롭다.', '신은 전능하다.', '악은 존재한다.'

 이 난제를 푸는 방법 하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로써 악의 존재에 대한 책임은 신에게서 우리에게로 옮겨진다. 만약 신이 어떤 규범을 세웠을 뿐 아니라 개인에게 그것을 따르거나 따르지 않을 자유를 부여했다면, 우리는 옳은 것 대신 잘못된 것을 선택한 데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나쁜 일을 한 자는 현세 또는 내세에서 신의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 그의 고통은 악이 아니라 위반에 대한 징벌이다.

<p.71>

 

 프로테스탄트의 직업윤리는 자본주의 정신의 배경이 되었을 뿐만이 아니다. 자기 구제와 자기 운명에 대한 책임의 윤리, 능력주의적 사고 방식에 적합한 윤리의식의 기반이 되었다. 이런 윤리의식은 큰 부를 축적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책임과 함께, 자수성가의 어두운 면이라 볼 수 있는 '불안하면서도 치열한 경쟁'을 초래한다. 은총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이 주었던 겸손함. 그것은 이제 자기 자신의 능력을 믿는 데서 나오는 오만으로 대체된다.

<p.76>

 

 "운 좋은 사람은 운이 좋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경우가 드물다." 막스 베버는 이렇게 보았다. "이를 넘어서, 그는 자신이 그런 행운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납득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이 '그럴 만하다'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이들에 비해 '그럴 자격이 있다'고 확신하기를 바란다. 그는 또한 운이 나쁜 사람들도 자신의 당연한 업보일 뿐이라고 믿기를 바란다."

<p.78>

 

 21세기 초, 번영 복음은 근면한 노동을 장려하고 사회적 상승, 적극적 사고 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아메리칸 드림 자체와 구별하기 어려워졌다. "번영 복음 운동은 미국인들에게 '자수성가한 국민의 나라'라는 자부심에 들어맞는 복음만 준 것이 아니었다." 바울러의 말이다. "그것은 개인 경제활동의 기반인 기본 경제구조의 정당성도 확인해 주었다." 그리고 번영은 미덕의 증표라는 믿음 또한 강화했다. 이전의 성공 복음처럼 시장을 신뢰했다. "시장이란 성공과 실패로 보상과 처벌을 구분해 준다. 유덕한 사람은 풍족한 보상을 받고, 사악한 자는 끝내 파멸할 것이다."

 번영 복음의 매력 중 하나는 그것이 "자신의 운명에 대해 자신의 책임을" 강조하는 데 있다. 이는 성급하면서도 개인에게 힘을 심어주는 관념이다. 신학적으로 이는 구원이 일종의 성취이며 우리 힘으로 얻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세속적으로 말하면, '사람들에게 충분한 노력과 믿음만 있다면 부와 건강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것이다. 매우 능력주의적인 이야기다. 모든 능력주의 윤리처럼, 개인의 책임을 극찬하는 그 개념은 일이 잘되어갈 때는 기꺼워할 만하다. 하지만 반대로 일이 잘못될 때는? 사기를 꺾고 심지어 자책에 시달리게 만든다.

 건강 문제를 생각해 보자. 우리 건강이 우리 손에 있다는 말처럼 힘이 솟을 말이 어디 있겠는가? 다시 말해서 아프다면 기도로 나을 수 있고, 병이란 착하게 살고 신을 사랑하면 걸릴 일이 없다고 한다면? 그러나 이렇게 인간 능력을 드높이 띄워버리면, 그만큼 그림자도 짙어진다. 이런 생각을 가진 상태에서 병이 들기라고 하면 그것은 단지 불운이 아닌 '병자의 덕 없음'으로 해석된다. 심지어 죽음조차 정신적 피해를 더 한다. 바울러는 이렇게 말한다. "신자가 아프거나 죽거나 하면 수치심이 슬픔과 뒤섞인다. 사랑하던 사람을 잃었는데 그들의 믿음에 대한 신뢰도 잃게 되었기 때문이다."

<p.85>

 

 '일만 열심히 하면 성공으로 곧장 달려갈 수 있다'는 믿음은 '우리가 우리 운명의 주재자이며, 앞날은 스스로의 손에 달려 있다'는 보다 범위가 큰 믿음을 반영하고 있다. 미국인은 다른 대부분의 국가 국민들보다 인간의 자수성가 능력을 더 많이 믿는다. 과반수의 미국인(57퍼센트)이 "인생 성공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변수에 더 많이 좌우된다"는 말에 반대한다. 반면 대부분의 유럽 국가를 포함한 타 국가 국민들 과반수는 성공이 자신의 통제 범위 밖의 변수에 따라 주로 결정된다고 본다.

 일과 자기구제에 대한 이런 입장은 연대와 시민의 상호적 책임에 대한 입장에도 영향을 준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성공하리라 믿어도 되고, 실패하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자신을 탓해야 하는 게 옳다면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말이 공감을 얻기 어렵다. 이것이야말로 능력주의의 혹독한 면이다. (...)

 그러나 노력과 근성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미국적 믿음은 더 이상 현실과 맞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 뒤 수십 년간 미국인들은 자기 자녀들이 자신들보다 경제적으로 나은 삶을 살기를 기대할 수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럴 수 없다. 1940년대에 태어난 사람 가운데 거의 전부(90퍼센트)는 부모보다 많은 수입을 올렸다. 그러나 1980년대 생은 겨우 절반이 부모보다 많이 벌어들인다.

<p.128>

 

 결과의 평등보다 기회의 평등을 찾는 시스템 틀 안에서는 교육 시스템의 책임이 막중해질 수밖에 없다. 또한 불평등이 꾸준히 늘어감에 따라 교육에 대한 요구는 점점 더 커질 것이다. 교육이 이 사회의 다른 죄악들을 사면해주기를 바라며. (...) 그것은 사실 해답도 뭣도 아니다. 일종의 도덕적 판단이다. 스스로의 성공에 취한 승자들이 그런 판단을 내린다. 전문직업인 계층은 그들의 교육 수준에 따라 정의되며, 그들은 입만 열면 더 많은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들에 따르면 불평등이란 시스템의 실패가 아니라 실패자 개인의 실패일 뿐이다.
 - 토머스 프랭크(작가)

<p.148>

 

 학력주의 편견은 능력주의적 오만의 한 증상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능력주의에 더욱 물들게 되면서, 엘리트들은 출세하지 못한 사람들을 깔보는 버릇마저 들었다. 대학에 가서 자신의 조건을 향상시키라고 노동자들에게 골백번 되풀이하는 말은 아무리 의도가 좋을지라도 결국 학력주의를 조장하고 학력 떨어지는 사람들의 사회적 인식과 명망을 훼손한다.

<p.151>

 

 어떤 이들은 고학력 대졸자들이 정부를 이끌어간다면 환영할 일이지 문제될 게 무엇이냐고 할지 모른다. 물론 다리를 지을 때는 가장 유능한 엔지니어를, 맹장수술을 할 때는 가장 숙련된 의사를 원하기 마련이다. 그러면 최고의 대학을 나온 국회의원을 원하면 안 될 까닭이 뭘까? 빵빵한 학력을 갖춘 고학력 리더들이 더 좋은 정책을 개발하고 더 합리적인 정치 담론을 이루지 않겠는가?

 아니다. 꼭 그렇지는 않다. 미국 연방의회와 유럽 국회들에서 오가고 있는 정치 담론을 슬쩍만 들어 봐도 그런 말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좋은 통치는 실천적 지혜와 시민적 덕성을 필요로 한다. 공동선에 대해 숙고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둘 중 어느 것도 오늘날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함양될 수 없다. 최고의 명문대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최근의 역사적 경험은 도덕적 인성과 통찰력을 필요로 하는 정치 판단 능력과 표준화된 시험에서 점수를 잘 따고 명문대에 들어가는 능력 사이에 별 연관성이 없음을 보여준다. '최고의 인재들'이 저학력자 동료 시민들보다 통치를 잘한다는 생각은 능력주의적 오만에서 비롯된 신화일 뿐이다.

<p.164>

 

 이런 학력주의 병폐와 가깝게 이어진 것이 기술관료적인 공적 담론의 왜곡이다. 정책 결정이 '스마트 하냐 우둔하냐'의 문제로 여겨질수록 '스마트한 사람(전문가나 엘리트)'이 결정하고, 일반 시민들이 토론과 결의를 하는 일은 배제하는 게 옳다고 여겨지기 마련이다. 능력주의 엘리트들에게 '스마트하다'와 '우둔하다'의 담론은 도덕 및 이념적 반대에 대해 비당파적인 대안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런 반대는 민주정치의 핵심에 속한 것이다. 정당정치의 갑론을박을 뿌리치고 정책을 관철하려는 의지가 너무 강하면 정의와 공동선에 대한 질문을 저버린 채 정치를 유명무실화하는 기술관료적 공적 담론으로 밀려갈 수밖에 없다.

<p.172>

 

 그러나 트럼프 시대에 양극화된 정치를 놓고 오바마는 대중이 기본 사실들에 대해 의견을 같이할 수 없음이 일차적 문제라고 분석했다. 그는 "왜 우리 정치에 그렇게 병목 현상과 독기, 양극화 현상이 많은가 하면, 부분적으로는 팩트와 정보의 공통적인 베이스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폭스뉴스>를 보는 사람과 <뉴욕타임스>를 읽는 사람은 전혀 다른 현실을 인식하게 된다. 그것은 단지 의견의 차이에 그치지 않고 사실에 있어서 벌어지는 격차다. 마치 뭐랄까, 인식론상의 차이와 같다."

 그는 그런 '현실의 충동'에 대해 직접 본 일을 근거로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앞으로 10년, 15년, 20년 동안 우리가 마주칠 가장 큰 도전은 '건전한 시민 토론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다. 그런 토론은 내가 만일 "이건 의자다"라고 하면, "그래 의자다"라고 동의할 수 있는 토론이다. 지금 우리는 "이것은 좋은 의자인가?", "이 의자를 고쳐야 할까?", "이 의자를 여기서 옮길까?" 등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의견을 낼 수 있다. 그러나 "이건 의자가 아니라 코끼리야"라는 말은 꺼낼 수 없다.'

 물론 정치적으로 '사실 관계 논란'이 의자인지 아닌지를 놓고 싸울만큼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여기서 '방 안에 있는 코끼리'는 사실 기후변화를 의미했다. 오바마는 기후변화의 존재 자체나 그것이 인간의 잘못 때문이라는 사실조차 부인하는 사람들과는 토론이 어렵다는 말을 한 것이다.

<p.178> 

 

 두 번째로, 내가 재능을 후하게 보상하는 사회에 산다면 그것 역시 우연이며, 내 능력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르브론 제임스는 매우 인기 있는 스포츠인 농구를 하며 수백만 달러를 벌었다. 탁월한 운동 재능을 가진 것 말고도, 르브론은 그 재능을 가치 있게 여기고 보상해 주는 사회에서 산다는 행운을 누린다. 그가 잘할 수 있는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에 살고 있음은 그가 노력한 결과가 아니다. 가령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처럼, 농구선수가 아닌 프레스코 화가가 각광을 받던 사회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우리 사회가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는 분야에서 탁월한 사람이라면 어떤가. 팔씨름 세계 챔피언은 르브론의 농구 능력만큼 귀한 재능을 팔씨름이란 분야에서 보이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가 상대의 팔을 테이블에 내리꽂는 걸 보고자 돈을 내려는 사람이 많지 않음은 그의 잘못이 아니다.

<p.201>

 

 이런 병리학적 상황을 넘어 심리학자들은 이 세대 대학생들의 보다 미묘한 정신적 문제점을 찾아냈다. '완벽주의라는 숨은 전염병'이다. 몇 년 동안이나 불안 속에 분투해온 결과 젊은이의 마음은 약하디 약한 자부심, 그리고 부모, 교사, 입학사정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의 냉혹한 한 마디에도 산산조각 날 자의식으로 채워져 버렸다. "실적과 지위와 이미지만이 한 사람의 쓸모와 가치를 정할 수 있는 세계에서, '완벽한 자신'이라는 비이성적 생각이 의미 있는 게 되고 말았다." 4만 명 이상의 미국, 캐나다, 영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물의 공저자 토머스 쿠란과 앤드류 힐의 말이다. 이들은 1989년부터 2016년까지 완벽주의가 가파르게 증가하는 것을 보았다. 사회적인, 그리고 부모의 기대에 매인 완벽주의의 증가세는 32퍼센트에 달했다.

 완벽주의는 능력주의의 대표적인 병폐다. "젊은이들이 끝도 없이 학교, 대학, 직장에 의해 선별되고, 구분되고, 등급이 매겨지는 과정 속에서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는 현대 생활의 한복판에서 싸우고, 실적을 내고, 업적을 이루도록 강요한다." 성취 요구에 따라,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개인의 능력과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가치를 결정한다.

 능력주의 기계의 레버와 활차 역할을 해온 사람들은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인간적 희생이 있었는지 모른다. 번아웃 증후군에 대한 솔직하고 통착력 있는 글에서 하버드 입학사정관실은 "고등학교와 대학 재학 시절을 불타는 고리를 뛰어넘는 일로만 채워온 사람들이 결국에는 평생 신병훈련소와 같은 틀 안에서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 염려했다. 2000년에 나온 그 글은 아직도 하버드 입학 홈페이지에 일종의 경고용으로 게시돼 있다.

<p.283>

 

 인재 선별기를 뜯어 고치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면, 능력주의 체제가 그 폭력적 지배를 동시에 두 방향으로 뻗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정상에 올라서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불안증, 강박적 완벽주의, 취약한 자부심을 감추기 위한 몸부림으로서 능력주의적 오만 등을 심는다. 한편 바닥에 떨어진 사람들에게는 극심한 사기 저하와 함께, '나는 실패자야' 라는 굴욕감마저 심는다.

 이 쌍방향 폭력은 하나의 도덕적 원인을 공유한다. 능력주의의 금과옥조인 '우리는 개인으로서 우리 운명의 책임자다'라는 도덕률이다. 우리가 성공하면 우리가 잘한 덕이며, 실패하면 우리가 잘못한 탓이다. 사기를 올려주는 말 같지만, 개인 책임에 대한 집요한 강조는 우리 시대의 불평등 상승 추세에 대응할 연대 의식이나 연대 책임을 떠올리기 어렵게 한다.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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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생각을 하게끔 해준 책이다. 이해한 바를 간단히 요약해보자면 능력주의란 기회가 동등하게 주어지는 상황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자신의 성공을 자신의 재능과 노력 덕분이라고 믿는 것이다. 얼핏 보면 가장 공정한 방법이 아닌가 여겨지는 능력주의가 공정하지 않은 이유는 첫번째로 사람마다 타고난 재능이 다르고, 두 번째로 노력할 수 있는 환경도 다르게 주어지고, 세 번째로 그 결과에 대한 보상 역시 사회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재능을 가지고 있어도 노력할 수 없는 환경에 태어난 사람은 성공할 수 없고, 재능과 노력을 겸비해도 당시의 사회가 그 결과에 후한 태도를 보이지 않으면 좋은 보상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즉, 기회가 동등하다고 할지라도 개인의 성공에는 재능과 노력뿐만 아니라 행운이라는 요소가 상당 부분 역할을 하고 있으니 그것이 전적으로 그 사람의 힘만으로 이뤄냈다고 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여기까지 듣고 보니 능력주의가 늘 공정하지는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작가는 더 나아가 능력주의가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한다. 능력주의에 결함이 있는 건 알겠지만 사회에 악영향까지 미칠 일일까? 그에 대한 근거로 작가는 능력주의로 인한 승자들의 오만한 태도와 패자의 굴욕에 대한 사회의 정당화를 든다. 능력주의를 신봉하는 사회에서는 성공한 사람들이 본인 스스로 '나는 내 노력만으로 여기까지 왔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도 그가 기울인 노력과 누리고 있는 보상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 반대로 실패한 사람들은 본인 스스로 '내 노력이 부족해서 이렇게 됐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그가 속한 사회와 주변 사람들도 그가 겪고 있는 굴욕과 궁핍한 현실은 그의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여기게 된다. 겸손할 줄 모르는 승자와 모든 것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패자들이 늘어나는 사회는 공동선에 대한 배려가 사라지고 필연적으로 점점 더 불평등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최근 불평등이 점점 심화되는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능력주의 때문이다,라는 것이 이 책의 주요 내용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 역시 꽤나 능력주의적 사고관을 가진 사람이었단 걸 알게 되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사람은 누구나 노력하면 뭐든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또한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도 내가 여태까지 많은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방식은 때때로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힐난으로 이어지곤 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과연 그럴까, 하고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가 노력을 기울인 것도 맞는 말이지만 나의 삶에는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주변 사람들의 도움과 행운이 있었을 것이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나자 그간 내가 받았던 여러 사람들의 도움이 떠올랐다. 그간 나는 내 노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마치 내 노력은 큰 상자에 담아 예쁘게 포장하고 리본까지 달아놓았으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은 도움은 싹 다 모아 안 쓰는 상자에 담아 놓은 것처럼 말이다. 그와 반대로 타인의 노력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인색했던 건 아닐까. '아직 부족해, 더 열심히 해야지.' 라던지, '저 정도는 나도 금방 할 수 있어' 같은 생각으로 타인의 노력을 평가했던 건 아닐까. 나도 능력주의적 오만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잘난 것도 없지만)

 

 사실 우리 모두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능력주의가 익숙하지 않을까. 우리는 그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세대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 사회에서 나를 포함한 젊은 세대들은 공정이라는 생각의 바탕에 능력주의가 깔려 있을 수 밖에 없다고 본다. 게다가 능력주의는 자본주의와 합쳐지며 날이 갈수록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마치 그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진리인 것처럼 여기면서 말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일은 갈수록 적어지고, 서로 편을 가르고 날 선 혐오를 드러낸다. 사람의 가치와 행복은 물질적으로 수치화되고, 사회는 점점 더 보이지 않는 계급으로 나뉘고 있다. 치열해지는 경쟁과 커져 가는 사회적 격차 속에서는 자신의 생존만이 유일한 관심사다. 정의라던지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던지, 사회적 공동선에는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다. 그리고 이 문제는 쉽사리 해결될 것 같지 않다. 능력주의의 함정에 빠진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더 깊숙이 그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