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부터 동양은 농경 사회였다. 구성원들 간의 협력이 절대적인 농경 사회에서는 자연스럽게 집단주의 문화가 형성되었고, 개인은 집단과의 관계 안에서 부여되는 역할에 따라 스스로의 존재를 정의했다. 이런 문화에서 참과 거짓이 분명한 명제를 따지는 논리적 대화는 존재하기 어렵다. 말은 진리를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선 친교의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동양 문화의 사람들은 자신의 의사를 직접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집단 전체의 조화를 살피며 간접적으로 사안을 이야기한다.
반면 서양 문화의 뿌리인 고대 그리스에서는 척박한 자연환경 때문에 농경 문화가 자리 잡지 못하고 대신 목축이나 무역업이 번성했다. 구성원들 간의 협력보다는 개인의 능력과 소질이 중요했고, 각 개인은 사회 속에서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존재로 스스로를 인식했다. 서양 사회에서는 논쟁을 통해 진리를 따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각 개인은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고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데 익숙하다.
동서양 간 이런 언어 문화의 차이는 아이들의 대화 습관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선생님이 숙제를 해왔는지 물으면 숙제를 해오지 않은 우리나라 학생은 흔히 "선생님, 사실은 어제..." 하고 숙제를 하지 못한 사정부터 먼저 설명한다. 반면 서양의 아이들은 단번에 "No" 하고 질문에 대한 대답부터 한다. 그러고 나서 선생님이 숙제를 왜 안 했는지 이유를 물으면 그제서야 "Because..." 하고 이유를 설명하는 식이다. 이런 대화 스타일의 차이는 전문적인 항공교신 훈련을 받은 조종사와 관제사의 교신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평소 직접적인 표현을 피하고 에둘러 말하는 습관에 익숙한 동양권의 조종사들은 관제교신 중에도 간접화법을 자주 사용한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조종사들은 강하를 요청할 때 표준용어인 "Request descent(강하를 요청한다)" 대신 "Maintain 13,000feet (1만 3천 피트를 유지합니다)"라고 현재 고도를 통보했다. "강하를 요청한다"라고 해야 할 상황에서 직접적으로 'Request'를 하지 못하고 "나는 지금 고도 1만 3천 피트를 유지하고 있다(그러니 강하를 주었으면 좋겠다)"라고 에둘러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해도 우리나라 관제사들은 조종사가 강하를 원하고 있는 것을 알아듣고 강하 지시를 주었다. 그러나 서양의 관제사들에게 이렇게 말하면 그들은 조종사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오히려 정반대로 이해하기도 한다.
<p.139>
서양인들의 실수를 대하는 태도는 뻔뻔해 보일 정도로 당당한 경우가 많은데, 지나간 과오와 현재를 쉽게 분리하는 이들의 이런 마인드는 조종사로서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하다.
<p.170>
운항 시스템이 발달하고 규정과 절차가 조종사의 지식과 판단을 대신하기 시작하면서 역설적으로 조종사들은 비행에 대한 통제권과 열정을 잃었다. 매 비행을 두근거리며 기다리던 조종사들이 월요일 출근 걱정에 스트레스를 받는 직장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위장된 관심이나 과장된 열정은 필연적으로 권태와 나태를 초래한다. 부자가 되기를 꿈꾼다면 조종사가 아닌 다른 직업을 택해야 한다. 수백 명의 승객을 태우고 있는 에어라인 조종사가 비행에서 권태를 느끼고 있다면 자신의 비행을 스스로 돌아보아야 할 때다. 비행의 피로는 하루 이틀의 휴식으로 회복되지만 직업에서 느끼는 권태는 그 일을 하면 할수록 더 깊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p.179>
항공기의 모든 시스템은 2~3중 백업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안전 운항의 기본 개념은 위험에 맞서 용감하게 싸우는 것이 아니라 위험의 징후를 사전에 인지하고 상황이 악화되기 전에 회피하는 것이다.
비행기는 자동차나 배와 달리 일단 이륙하고 나면 멈춰 서 있을 수 없다. 회항은 비행기가 위험한 상황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안전한 곳에 멈춰 설 수 있는 유일한 옵션이다. 비행 중 안전에 영향을 주는 상황이 발생 했을 경우, 기장은 상황이 악화되기 전에 비행기를 최대한 빨리 착륙시켜야 한다.
그러나 악기상이나 항공기 계통 결함으로 비행기가 회항할 때마다 관련 기사는 항상 '아찔한 회항'이란 제목으로 시작한다. 안전을 위한 기장의 선제적 조치가 아찔한 회항으로 매도되고 위험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비행이 노련함으로 미화되는 사회에서 절대 안전이란 과제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
<p.230>
미국인들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유머가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p.294>
비행기의 출현으로 사람들은 비로소 지구를 관념이 아니라 실체적 존재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하늘 위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면 누구나 지상에서의 관심과 고민에 빠져 있던 자신을 한 걸음 떨어진 객체로 볼 수 있게 된다. 오밀조밀 성냥갑처럼 붙어 있는 아파트 건물을 내려다보면 저 작은 공간에서 아무것도 아닌 일로 아등바등 다투던 어제의 내 모습이 마치 영화 속 장면을 보는 것처럼 객관화된다.
<p.330>
"총을 빨리 뽑는 것이 실력이 아닐세. 상대방이 나를 겨누고 있을 때 누가 더 침착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지. 빠른 건 전혀 중요한 게 아니야."
"목숨이 걸리면 다들 땀이 나지. 그러다 서로 허공에 쏘고 어쩌다 맞고 그러는 거야. 그 상황에서 침착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어. 나와 잉글리시 밥 정도지."
보 샴프가 총을 뽑는 속도를 총잡이의 실력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흔히 착륙이 얼마나 부드러운가로 에어라인 조종사의 실력을 평가한다.
훌륭한 에어라인 파일럿은 조종 스킬만 뛰어난 조종사가 아니라 평생 단 한 건의 경미한 사고도 내지 않는 조종사다. 에어라인 조종사의 진짜 실력은 예측적 상황 인식으로 비행기를 위험한 상황과 조우하기 않게 하는 능력이며, 예측이 불가능한 비상상황이 발생했을 때 이를 얼마나 냉정하고 침착하게 다룰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p.380>
이 책은 현직 대한항공 기장이 항공 역사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사실들과 미처 알지 못한 뒷 이야기들을 알려주는 책이다. 나 역시 알지 못했던 내용들이 꽤 있었고 작가가 현직 기장으로서 비행에 대해 갖고 있는 철학도 엿볼 수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다. 조종사가 되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거나 평소 항공업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봐도 좋을 것 같다.
나는 중학생 때 처음 항공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런 종류의 책이 거의 없었다. 중학교 도서실, 고등학교 도서실, 시립 도서관 등의 책장을 뒤져도 항공 분야에 관한 건 항공역학이나 항공산업 같은 전문 지식을 다루는 어려운 책들 뿐이었다. 그래서 한 번은 내가 즐겨 찾던 항공 관련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던 적이 있다. 내용은 대충 이랬다. '공부를 하다가 짬이 생기면 기분 전환 겸 항공 관련 책을 읽고 싶은데 중학생이 읽을만한 책을 추천해 주실 수 있나요?' 그러나 그때도 항공 관련해서는 전문서적 말고는 마땅히 없어요,라는 댓글이 다수였는데 딱 하나 눈에 들어온 책이 있었다면 이원익 씨가 쓴 <비상>이라는 책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동안 책상에 모아두었던 5000원짜리 문화상품권 몇 장의 스크래치를 벗겨내고 인터넷 서점에서 그 책을 주문했다.
책 <비상>은 조종사가 되고 싶었지만 시력 때문에 꿈을 포기한 작가가 그 대신 피나는 노력으로 영어를 공부하여 TOEIC 만점 및 프랑스국제에어쇼에서 민간인 최초 F-16 평가비행, 시드니 올림픽 리포터, 박카스 광고 모델 등을 하게 되는 자신의 삶을 그린 에세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당시 내가 찾고 있던 항공 관련 지식 전달 책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중학생이 읽기에는 참 적합한 책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돌이켜 보면 자세한 내용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 작가가 시력이 나빠지면서 조종사의 꿈을 포기했을 때의 좌절감이나 어학연수 없이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 지하철 등에서 외국인이 보이면 무작정 말을 걸어 대화를 하려고 했다는 이야기, 처음으로 F-16을 탔을 때의 기분 등이 기억이 난다. 한 청년의 꿈과 열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책이라 당시 중학생인 나는 이 책을 읽고 꽤나 큰 감명을 받았던 것 같다. 작가가 꿈을 이루기 위해서 밤낮없이 노력하는 모습, 마침내 꿈을 이뤄내는 모습 등을 책으로 읽으며 나도 언젠가는 조종사라는 꿈을 이룰 수 있겠지, 같은 막연한 상상을 하곤 했다.
어쩌면 그때가 처음으로 최선을 다 하는 삶의 모습을 보게 된 순간인 것 같다. 나 자신의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열정, 최선의 노력으로 후회를 남기지 않는 태도가 존재한다는 걸 인지한 순간이라고나 할까. 그전까지는 그런 것들을 주변에서 목격할 기회가 딱히 없었다. 위인전이라던지 유명인사의 삶을 다룬 책을 읽은 적은 종종 있었지만 그건 그들이 특별한 사람이기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평범한 나는 지금 이대로도 꽤나 잘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계기로 주변의 평범한 사람도 이렇게 최선을 다하고 노력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한 권의 책 때문에 내 인생이 곧바로 바뀌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많이 지난 다음에 돌이켜 보니 보이지 않는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글을 적다 보니 블로그에 게시한 책과는 전혀 다른 책 얘기를 한동안 하게 됐는데 아무튼... 책을 통해 누군가의 삶과 생각을 들여다보는 건 남아 있는 내 인생을 크게 바꿀 수도 있는 무척이나 중요하고 귀한 일임이 분명하다... 는 게 나의 결론이고, 이 책도 누군가에게는 과거의 나처럼 공부하다 기분 전환으로 읽을 만한 항공 분야의 책이자 인생을 크게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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