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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목의 조 > 송섬, 2022

by Ditmars 2022. 12. 29.

<골목의 조> 송섬, 2022

 

 불현듯 무언가 떠오른다. 혹은 천천히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그것을 말하려 한다. 황급히 말할 상대를 찾거나 종이와 펜을 구하려 두리번거리지만, 그땐 이미 생각이 문을 열고 나가버린 뒤다. 그 자리엔 그와 아주 닮았으나 묘하게 촌스러운 생각만이 멋쩍게 앉아 있다. 진한 화장을 한 앳된 여자아이처럼. 그렇게 되면 아무리 갈피를 잡으려 애써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촌스러운 여자아이도 함께 애써주지만 어쩔 수 없다. 마치 유효 기간이 만료된 꿈같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들은 대개 이런 식이다.

<p.11>

 

 "피곤해, 피곤해."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하는 것은 조의 말버릇이다. 문제는 그가 남들에게도 똑같이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하게 한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뭐가 피곤해?"
 "뭐라고?"
 나는 책장을 덮고 순간 이마로 번쩍 떠오른 짜증을 억누르며 다시 물었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뭐가 피곤하냐고."
 이런 식이다.
 "아무것도 안 하니까 피곤한 거라구. 뭔가 하고 있다면 피곤할 틈도 없어."

<p.29>

 

 책을 읽고 있노라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중에도 살아 숨 쉬는 것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잘 짜여진 세계가 늘 변치 않는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확신도 들었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그러한 세계의 편린을 손에 쥘 수 있었다.

<p.52>

 

 "너는 왜 친구가 없는데?"

 "다음에서 다음으로 나아가면서 나는 이전의 세계를 꼭 닫고 나와야 했어. 들키고 싶지 않았거든. 반복하다 보니 남아 있는 친구는 하나도 없었어."

<p.123>

 

 산다는 것이 마치 이야기를 쓰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고, 언젠가 조는 말했었다. 이쯤에서 의미 있는 대사를 던져야 할 것 같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고. 그러지 않으면 슬슬 졸작이 되어버릴 텐데, 도대체가 할 말이 없어서 문제라고. 사는 것 자체에 그다지 재능이 없는 것 같다고.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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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의 줄거리를 나름대로 열심히 적어보다가 결국 지워버렸다. 반지하에 사는 스물넷의 여자가 겪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사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잃어버린 것에 대해 생각했다. 여태까지 내게 일어난 상실과 앞으로 내게 일어날 상실에 대해. 또 남겨진 것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상실로 인해 잔여한 어떤 것들에 대해서.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아직 상실에 대한 경험이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소한 의미의 상실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킬 만큼의 크나큰 상실 말이다. 나는 부모님도 아직 두 분 다 살아 계신다. 개를 키운 적도 없었으므로 키우던 개가 죽은 적도 없다. 친한 친구나 지인의 죽음으로 장례식에 가본 적도 없고, 인생의 기회를 놓쳐 크게 후회할 만한 일도 딱히 없었다. 깊은 골짜기 없이 완만한 능선 같은 삶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그래서 두려울 때가 있다. 골짜기 없는 산이 존재하지 않듯이 상실 없는 삶은 있을 수 없으므로. 앞으로 내게 찾아올 여러 종류의 상실을 상상하게 되면 정신이 아득해지기도 한다. 주변의 소중한 사람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거나 아니면 내가 크게 다쳐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못하게 된다거나 하는 상상이다. 만약 내게 그런 일이 닥친다면 나는 그 상실을 받아들이고 이겨낼 수 있을까? 나는 남은 삶을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 때면 너무나도 큰 두려움에 생각만으로도 눈가에 눈물이 고이곤 한다. 앞으로 그럴 일이 없을 거라고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기에 이럴 때면 인간이 운명 앞에 얼마나 한없이 나약한 존재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이와 동시에 상실을 겪으며 인간은 강해지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단지 나를 더 강하게 만들 뿐이다'라는 니체의 유명한 말처럼 상실에 대한 경험이 다음에 겪을 상실에 대한 감정을 무뎌지게 할 수 있는 건 아닐까. 근육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근육의 일부가 손상되고 재생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생각해보았지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상실의 고통은 가시에 찔린다거나 벌에 쏘인다거나 혹은 우연히 유리 조각을 밟는 것처럼 경험이 있어도 매번 새롭게 다가올 것 같다. 매번 깜짝 놀라고, 주저 앉게 되고, 눈물이 날 것이다. 상실의 아픔은 결코 무뎌질 수 없는 특별한 고통일 터이다. 그렇다면 상실의 잔여는 어떠한가. 그곳에 소중한 것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온갖 종류의 잔여들은 상실을 겪은 사람이 앞으로 살아가는데 힘이 되어주는 것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잘 모르겠다. 누군가는 그곳을 볼 때마다 상실된 것에 대한 아쉬움으로 한없이 눈물이 흐를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는 그곳을 볼 때마다 남은 삶을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둘 다일 수도 있겠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도 여러 상실을 겪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의 삶 속에 여러 잔여를 남겼다. 아버지의 유골함, 설리의 무덤, 남겨진 골목... 그녀가 씩씩하게 살아갈 힘을 얻은 건지 아직 그 슬픔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녀가 버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없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겨내고자 안간힘을 쓰는 것도 아니며 그저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버티고 있는 그녀를 무심히 지나쳐가는 시간을 보면서 나는 상실의 두려움으로부터 왠지 모를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