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을 주면서 사랑하는 딸에게 말하고 싶다. 세상은 죽을 때까지도 전체를 다 볼 수 없을 만큼 크고 넓으며, 삶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축복이라는 것을. 인간은 이 세상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살러 온 존재이며, 인생에는 가치의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여러 길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어느 길에서라도 스스로 인간다움을 잘 가꾸기만 하면 기쁨과 보람과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p.8>
20세기 세계사는 소수의 '비범한 사람들'이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을 구원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p.31>
"순임금이 천자가 되시고 고요가 법관이 되었는데, 만약 순의 아버지 고수가 살인을 했다면 고요가 어떻게 하였겠습니까?"
"그를 체포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순임금이 못 하게 하시지 않았겠습니까?"
"순임금이 어떻게 막겠는가? 고요는 맡은 임무가 있다."
"그렇다면 순임금은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순임금은 천자의 지위를 헌신짝처럼 버리셨을 것이다. 몰래 아버지를 업고 도망쳐 바닷가를 따라 거처하면서, 평생 즐거워하며 천하를 잊으셨을 것이다."
<p.128, 진심 상, 맹자>
내가 남을 사랑해도 남이 나를 가까이하지 않으면 인자한 마음이 넉넉했는지 되돌아보고, 내가 남을 다스려도 다스려지지 않으면 지식과 지혜가 부족하지 않았는지 반성해볼 것이며, 예로 사람을 대해도 나에게 답례를 하지 않으면 공경하는 마음이 충분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어떤 일을 하고도 성과를 얻지 못하면 자기 자신에게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자신이 바르다면 온 천하 사람이 다 내게로 귀의할 것이다.
<p.132, 이루 상, 맹자>
'개천에서 난 용' 한신은 큰 야망과 빼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불우한 환경 때문에 멸시와 조롱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것을 참고 견딘 끝에 뜻을 이루었다. 한신은 젊은 시절 받았던 수모를 한 순간도 잊지 않았다. 초나라 왕이 되자,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허튼소리는 그만두고 제 앞가림이나 잘하라고 지청구를 하면서 밥을 주었던 아낙을 찾아내 거금을 주어 보답했다. 가랑이 아래를 기어가게 만들었던 건달은 높은 계급의 군인으로 특채했다. 이런 행동으로 미루어 보면 한신은 자기의 인격에 대한 타인의 승인을 받는 데 집착했던 것 같다. 표현 방식이 좀 촌스럽기는 했지만 드높은 자부심을 지녔고, 자신이 그런 자부심을 가진 인물임을 인정받으려고 노력했다. 그가 소하와 한고조에게 끝까지 의리를 지키려고 한 것 역시 그러한 자부심을 표현하는 방법이었다고 나는 해석한다.
<p.162>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연속이다. 시대가 바뀌고 도전의 성격이 달라지면 응전에 성공하는 주체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한 시기의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한 사람들은 새로운 도전에도 옛날 방식으로 응전함으로써 실패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새 시대는 새로운 사람을 부른다. 구시대의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새 시대의 도전에 제대로 응전하지 못하면 어떤 식으로든 도태되고 만다.
<p.170>
다윈의 진화론은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그렇지만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삶의 진실을 노출시켰다. 인간은 모두 이기적인 동물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타적 행동을 하는 이기적 동물이다. 인간이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인 동물임을 과소평가하면 현실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에 빠져들 위험이 있다. 그러나 인간이 또한 이타주의와 자기희생이라는 고귀한 도덕적 재능을 진화시켜온 존재임을 망각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벌거벗은 탐욕과 아귀다툼이 판치는 살벌한 야만으로 몰고 갈 위험에 빠진다.
<공산당 선언>을 읽고 가슴이 설레는 젊은이라면 반드시 다윈을 읽어야 한다. 세상이 원래 경쟁과 적자생존의 원리가 지배하는 곳인데 국가가 무엇 때문에 빈부 격차 해소나 사회적 불평등을 완화하는 데 신경을 써야 하느냐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다면, 그 역시 다윈을 제대로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인간은 이기적 본성을 버리지 못하지만, 동시에 이타 행동을 우러러보는 직관적 도덕률을 지닌 동물이다. 인간은 또한 밤하늘의 별을 볼 때에도 땅에 발을 디뎌야만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현실의 이해타산을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고결한 이상주의가 사라진다면 인간의 삶이 너무 비천할 것 같다. 누구나 다윈만큼씩만 인간에 대해 연민을 느끼고, 이타주의에 공감한다면, 이 세상은 훨씬 더 살 만한 곳이 되지 않겠는가.
<p.220>
주류 경제학자들이 모든 경제 이론의 공통적인 기초로 삼은 '합리적 개인'은 이웃집 담장을 넘보지 않는다. 경제학자들이 사용하는 효용 함수는 나의 행복이 오로지 내 자신이 소비하는 재화와 서비스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다고 가정한다. 타인의 소비는 나의 행복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다.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경제학의 공리다. 그러나 베블런은 이것을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나의 행복은 내가 소비하는 재화와 서비스 또는 내가 소유한 부의 절대량이 아니라 그것이 다른 사람의 것보다 많으냐 적으냐에 좌우된다. 부를 축적하는 경쟁에서는 남을 이기는 것이 행복의 열쇠다. 부의 절대적인 크기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베블런의 주장은 관찰의 산물이다. 그는 추상적 공리와 논리적 추론에 기대지 않았다. 돈을 벌고 부를 축적하는 일에 목숨을 거는 호모사피엔스의 행동을 있는 그대로 관찰한 끝에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p.226>
베블런의 세계는 유한계급과 생산계급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러나 그의 세계는 매우 안정되어 있다. 여기서는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 인습과 제도의 진화가 있을 뿐이다. 보수성은 지배계급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보편적 특성이다. 유한계급의 규범과 생활양식은 모든 사람의 삶을 지배하는 명예로운 표준으로 통용된다. 하층계급은 유한계급을 타도하기보다는 그 일원이 되기를 원하며 그들을 흉내 내려고 애쓴다. 사회과 인간을 이렇게 보면 세상의 소란에 신경 쓰지 않고 이방인으로 살다 가는 쪽이 자연스럽다.
사회의 진화가 '제도의 자연선택'이라면 제도는 무엇인가. 베를런에 따르면 제도는 종국적으로 "개인과 사회의 관계와 기능에 관한 일반적인 사고방식"이며, "일정한 시기에 통용되는 모든 제도의 총체"가 그 시대의 생활양식이 된다. 지배적인 생활양식은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그 시대를 지배하는 정신적 태도"다. 그런데 사회제도의 총체로서 한 시기의 지배적인 생활양식 또는 습관적 사고는 환경이 변화를 강요하지 않는 한 무한정 지속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이렇게 전승되는 제도, 습관적 사고, 견해, 정신적 태도와 소질은 그 자체가 보수적인 요인이 된다. 모든 인간은 보수적이다. 물리학에서 인정되는 관성의 법칙이 사회제도와 사고방식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그런데 생활환경은 계속 변화한다. 다라서 지배적 생활양식과 습관적 사고방식은 그 시기의 생활환경 또는 상황에 잘 부합하지 않게 된다.
어느 시점엔가 변화한 환경이 기존의 지배적인 생활양식과 습관적 사고를 더는 허용할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한다. 사회의 진화는 이럴 때 일어난다. 사회의 진화는 개인이 어쩔 수 없이 변화한 상황에 부합하는 새로운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을 받아들이는 정신적 적응 과정이다. 개인의 정식적 적응은 환경의 변화가 몰고 온 압력이 강하고 개인이 기존의 지배적 생활양식을 고수하면서 그 압력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이 약할수록 더 잘 일어난다. 생활환경의 변화가 주는 압력에 덜 노출되거나 둔감한 사람일수록, 그 압력을 버텨낼 힘이 있는 개인일수록 더 오래 정신적 적응을 거부할 수 있다. 유한계급이 바로 그런 개인들의 집단이다. 유한계급은 물질적 이익이나 기득권 때문에 보수적인 것이 아니다. (...)
베블런의 주장은 현실에 잘 들어맞는다. 그렇지만 그는 인간과 사회에 대해 지나치게 비관적이었다. 나는 그가 호모사피엔스를 과소평가했다고 생각한다. 똑같은 생활환경의 변화에 똑같이 노출되어 있어도 사람들의 반응은 서로 다르다. 인습적 사고와 행동 방식을 바꾸는 데 민감하고 능동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둔감하고 소극적인 사람도 있다. 전자는 진보적이고 후자는 보수적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더 유연하게 인습적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을 교정하는 수고를 기꺼이 감수하는 것일까? 똑같은 생활환경의 변화에 노출되어 있다고 해도 자신에 대해,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 사회제도에 대해 더 넓고 깊게 이해하고 성찰하는 지성적인 사람일수록 더 유연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두뇌 활동이 활발하고 많이 배우고 다양한 문화를 폭넓게 경험한 사람일수록 더 진보적일 수 있는 것이다. 역사는 문명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평균적 지성과 성찰 능력도 더 높이 발전하며, 제도의 진화 역시 그만큼 빠르고 수월해진다는 것을 이미 보여주었다.
<p.240>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보다 의지와 노력일 것이다. 그러나 인생이 의지와 노력만으로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 누구의 삶에서든 행운 또는 불운이 남긴 흔적을 찾을 수 있다.
<p.270>
독서는 책과 대화하는 것이다. 책은 읽는 사람의 소망과 수준에 맞게 말을 걸어주고 그가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p.313>
이 책은 유시민 작가가 청춘의 시절 읽었던 책들을 최근에 다시 한 번 읽고 그에 대한 감상을 기록한 책이다. 여기에 나오는 책들은 <죄와 벌>, <전환시대의 논리>, <공산당 선언>, <인구론>, <대위의 딸>, <맹자>, <광장>, <사기>,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종의 기원>, <유한계급론>, <진보와 빈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역사란 무엇인가> 이렇게 총 14권이다. 이 책을 비롯해 이전에 읽은 <장정일의 공부>, <책은 도끼다> 처럼 누군가가 책을 읽고 그에 대한 감상을 기록한 것을 읽는 일은 내게 질리지 않는 재미를 준다. 대면으로 할 수 없는 작가와의 독서 모임을 책을 통해 하는 듯한 기분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내 청춘의 독서 목록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청춘을 나이로 구분 짓고자 한다면 지금도 나는 청춘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 나는 불안정한 삶 속에서 미래에 대한 고민과 두려움이 있었던 시기를 청춘이라고 하고 싶다. 그 시절 나를 크게 변화시킨 책은 어떤 것이 있었을까. 곰곰히 생각해보니 몇 권의 고전이 떠올랐다...라고 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아쉽게도 특별히 떠오르는 책이 없다. 공부가 잘 안 될 때 혹은 시험이 끝난 여유를 만끽하기 위해 몇 권의 소설을 읽었던 기억은 난다. 사실 그 시절에 책을 읽는 여유 같은 건 일종의 사치였다. 대학을 다니며 시험 준비를 하던 중간에 시간이 생기면 영어 공부를 하거나 스펙을 쌓기 위해 뭐라도 해야 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날이 갈수록 더 커져갔지만 그 대답을 책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 대답은 내가 발을 붙이고 있는 현실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바빴다.
이런 점에서 유시민 작가가 대학에 입학한 뒤 학회 활동을 하게 된 건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대학생은 성인이 되긴 했지만 아직은 학생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시기이다. 바깥의 매서운 현실에 눈을 뜨기 전 꿈과 이상을 그려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나 다름 없다. 그 시기에 선후배 혹은 동기들과 같은 책을 읽고 이상적인 삶이나 사회의 모습에 대해 토론한 시간들은 훗날 사회에 나왔을 때 이상과 현실 그 중간 어딘가에 위치할 나를 찾는데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꿈꾸던 이상과 다른 현실의 모습에 실망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앞으로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조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를 비롯한 지금의 대학생들은 두려운 현실에 맞서 미리 현실적인 사람이 돼버리곤 한다. 그러나 내가 맞닥뜨린 현실에서 정작 필요한 건 가슴속에 품고 갈 삶의 철학이었다. 그것은 내가 현실에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비록 삶의 철학은 이상적인 모습이었다가 현실에 맞게 깎이고 변화하겠지만 최소한의 뼈대와 심지는 남아 있게 된다. 그리고 그 뼈대와 심지가 시시각각 바뀌는 현실에서 우리를 올바르게 살 수 있도록 한다. 이런 이야기가 떠오른다. 두 나무꾼이 있다. 각각에게 도끼를 주고 나무를 베라고 하였을 때 한 사람은 바로 나무를 도끼로 내려 찍기 시작했고 다른 한 사람은 먼저 도끼날을 갈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이다. 먼저 날이 선 도끼날 같은 삶의 철학을 가져야 어떤 현실이 찾아오건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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