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밖의 일이란 소설이나 영화처럼 일정한 의도에 따라 만들어진 허구 세계뿐만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아무런 의도 없이도 매우 구체적이고 엄연하게 벌어지기도 한다.
<p.35>
먹고사는 일, 어쩌면 그것이 우리 삶에서 절대 도려낼 수 없는 가장 뿌리 깊고 본질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인생이란 것이 아주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그 모든 것이 함께 먹고살려는 단순한 동기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부정한 방법으로 최고 권력을 탐한 자도, 빵을 몇 개 훔쳐 가슴에 품고 달아난 자도 결국 식솔과 함께 먹고살기 위해서라는 가장 원초적인 스타팅 블록에 발을 디디도 출발한 것인지도 모른다.
<p.119>
미국 오리건 주는 1997년부터 안락사를 허용했는데,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약 70퍼센트가 '자기 선택'에 의한 조력 자살을 찬성했다고 한다. 안락사를 허용하기 전에 사회학자들은 공공보험 인프라에서 소외된 채 노령을 맞은 가난한 자가 몰릴 것이라고 우려했지만, 실상은 오히려 경제력 있는 고학력자들이 우르르 자원했다. 혼자 살기 힘든 것도 인생, 혼자 죽기 힘든 것 또한 우리 인생이다.
<p.232>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인간의 특성을 지성으로 보고, 기술을 연마하고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는 '호모 파베르Homo Faber'의 지성이 인류를 성공으로 이끈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그 지성이야말로 인류사회를 해체로 이끌 가장 큰 위험 요소라고 봤는데, 만년의 베르그송에겐 양가성을 극복할 방법을 밝히는 것이 가장 큰 철학적 과제였다. 인류를 살리는 것도 지성, 괴멸시키는 것도 지성이라니, 살아 있을 때의 생계 수단이 한순간 죽음의 도구로 전락한 채 발견되는 자살 현장과 일맥상통한다.
지성을 가진 도구의 인간, 호모 파베르가 그 지성으로 자살 도구를 고른다. 참으로 잔혹한 아이러니다. 하지만 본질적인 아이러니는 인간의 생사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등을 맞댔을 뿐, 사람의 생명과 죽음은 결국 한 몸통이고 그중 하나를 떼놓고는 절대 성립하지 않는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쉬지 않고 나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 인생, 인간 존재의 아이러니다.
<p.236>
특수청소라는 생소한 직업을 떠나 작가의 글솜씨와 감수성에 놀랐다. 아마 작가는 다른 어떠한 직업을 가졌어도 그 속에서 삶에 대한 많은 생각과 의미를 찾을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우리는 살면서 대부분 직업을 가지고 이를 통해 돈을 벌어 생계를 꾸린다. 그러나 나는 어떠한 직업도 돈만 보고 계속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돈 이외에 보람이 되었건, 막중한 책임감이 되었건, 즐거움이 되었건 각자의 직업 속에는 각자만이 가지고 있는 의미들이 숨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포함해 다수는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거나 나름의 의미를 찾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 아마 그 이유는 먹고살기 바쁘다는 것이 가장 크겠지만 어쩌면 우리가 속한 사회가 우리에게 예민하고 섬세한 감수성보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판단 능력을 강조하기 때문은 아닐까. 감상적이기에는 세상이 돌아가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작가는 마치 시인이 변하는 계절과 흘러가는 일상 같은 사소한 것에서 영감을 얻듯이 직업인으로서 일상과도 같은 일 속에서 삶에 대한 다양한 의미를 발견하고 이 책에 기록했다. 이 책이 사람들의 관심을 끈 건 작가의 글솜씨뿐만 아니라 죽은 자의 집을 청소한다는 생소한 직업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꼭 그 직업이 아니더라도 이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온갖 종류의 다양한 직업이 있다. 그 일을 하는 누군가는 별 거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묵묵히 하던 일을 하겠지만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여전히 특별하고 대단한 일인 것이다. 그리고 그 특별함은 그 일이 제공하는 보수나 사회적 명성과는 큰 관계가 없기도 하다. 각자가 하는 일에 자신의 철학을 담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고자 노력하는 것. 그것이 세상 모든 일과 직업, 노동에 대한 존엄성을 회복하는 첫 단계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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