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시간을 1차원이라 가정하고, 여기에 하나의 시간 차원을 덧붙여보자. 시간의 2차원. 그러한 세계를 살고 있는 존재는 세계를 어떻게 경험할까? 그의 시간은 선의 시간이 아니라 면의 시간이다. 그는 우리가 걸어서 언덕을 넘어가듯 시간의 언덕을 자유롭게 넘어서 과거나 미래를 접할 것이다. 우리가 인터넷에서 영상을 보듯 그는 우리를 볼 것이다. 우리를 앞으로 빨리 감거나 잠깐 멈추거나 과거 어느 순간으로 되돌릴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의 3차원을 사는 존재는 어떨까? 시간을 입체로 경험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에게는 시작과 끝이 동시에 존재할 것이고, 시간의 좌와 우를 말하는 것이 헛소리로 들리지 않을 것이다.
차원에 대한 생각은 신비하고 흥미롭다. 우리는 사유를 계속 확장해 나갈 수 있다. 6차원의 시공간을 살아가는 존재는 어떤 모습일까? 세계를 9차원으로 경험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추가 차원이라는 더 높은 단계의 세계를 경험하는 존재는 낮은 차원에서 분리되어 있는 존재들을 미분리의 통합적인 존재로 볼 것이고, 3차원의 우리에게 서로 다른 것으로 보이는 사물들이 그 근원에서는 하나임을 쉽게 직관할지 모른다. 2차원의 존재에게는 동전의 앞면과 뒷면이 다른 것으로 경험될 테지만, 우리에게는 한 동전의 다른 측면으로 이해되는 것처럼 말이다.
<p.74, 0>
현대인은 자신이 과거의 사람들보다 진보했다고 믿는다. 고대인은 어쩐지 교육받지 못했고 미개하며 원시적인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이러한 생각은 타당할지 모른다. 인류는 기나긴 역사의 시간 동안 지식을 축적했고, 더 나은 삶을 위해 기술을 발전시켰으며, 삶의 환경을 적극적으로 개선해왔으니까. 우리는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청결한 화장실을 갖고 있으며, 인터넷으로 전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동시에 궁금하기도 하다. 그렇다면 오늘의 나는 고대인보다 지혜로운가? 그들보다 인생을 더 가치 있게 살아가고 있는가? '그렇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것은 우리에게 고전이 남아 있어서다. 우리가 태어나기 수백 년 전, 수천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남긴 기록 안에서 오늘 나의 고뇌와 욕망을 고스란히 비춰보게 되어서다. 그들은 우리와 다른 존재가 아니었다.
<p158, 0>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 도대체 왜 이렇게 낯선 문서에 대해 알아야 하는 걸까? 살면서 들어본 적도 없는데 말이다. 맞는 말이다. 인도는 한국에서 참 먼 나라다. 물리적 거리보다 정서적 거리가 문제다. 실제로는 유럽이 거리상 더 멀지만 유럽의 문화는 어쩐지 친근하다. 인도는 정서적으로 다른 우주에 있는 것만 같다. 그러다 보니 인도 사상은 한국인에게 메이저가 아니라 마이너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선호하는 브랜드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편견과는 달리 인도 사상은 인류 역사에서 매우 중심적인 사상이었다. 특히 인도 사상의 뿌리가 되는 <베다>는 세계의 절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류에게 가장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문서는 두 가지다. 하나는 <구약>이고, 다른 하나가 <베다>다. 우선 <구약>은 아브라함 계열의 3대 종교인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의 뿌리가 된다. 이 세 종교는 인류 절반의 세계관을 형성해 왔다. 나머지 절반의 세계관은 <베다>에 기반을 둔다. <베다>는 <우파니샤드>와 힌두교, 불교의 뿌리가 되었고, 이들은 인도와 동양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의 한국인은 근대 이후 미국식 프로테스탄티즘의 영향을 받아 <구약>의 세계관에 익숙한 반면, 인류 절반의 세계관인 <베다>는 낯설어한다.
우리가 굳이 낯선 세계관인 <베다>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나의 세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다. 우리는 쉽게 해외로 여행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시간과 비용만 있으면 못 가는 곳이 없다. 실제로 평생 동안 한국인은 많은 곳을 여행한다. 하지만 나의 내면 세계 안에 가려진 미지를 향해 여행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는 나의 세계관이 세계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저 너머에 다른 세계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 주변에서 나를 걱정해 주는 이들, 가족, 학교, 사회, 국가, 이념, 종교는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조차 위험한 일이라고 나를 단속해 왔으니 말이다.
<p.180, 0>
오늘날 우리에게 이상적인 삶의 모습은 무엇인가? 당신은 인생에 대해 어떤 전망과 계획을 갖고 있는가? 좋은 대학에 가고, 높은 연봉의 회사에 취업하고, 더 좋은 집과 더 좋은 자동차를 갖고, 안락한 노후를 보내길 꿈꾸고 있는가? 당신은 누구인가? 도대체 어떤 존재로 이 세계에 눈떴기에 그런 꿈을 좇고 있는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단 한 번도 자신을 찾기 위한 시간을 가져본 적 없는 우리가 고대의 인류보다 더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조금 부끄러운 일이다.
<p.213, 0>
아르주나는 세속적 의무 앞에서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갑자기 탈속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에 대해 크리슈나는 지혜롭게 답해준다. 세속과 탈속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세상이 너에게 쥐여준 의무를 행하라. 그리고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 그럴 때 행위는 업을 만들지 않을 것이고, 너를 신에게 향하는 길로 인도할 것이다.
여기에 <바가바드 기타>의 보편적 가치가 있다. 아르주나의 고민은 당시 인도인만의 고민이 아니다. 이것은 시대와 지역을 초월한 모든 인간의 고민이다. 그렇지 않던가? 우리는 너무나도 중요한 순간에 갑자기 의지를 상실하고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다. 부모로서의 의무, 자녀로서의 의무, 학생으로서의 의무, 직장인으로서의 의무, 시민으로서의 의무 등. 우리가 그것을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이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냐고 주저할 때, 크리슈나는 우리에게 지혜롭게 말해주는 것이다. 네가 준비해왔던 바로 그 주어진 의무를 성실히 행하라. 다만 그것의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 그럴 때 너의 마음은 평온해질 것이고, 자유로워질 것이며, 네 안의 신에게 다가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가바드 기타>가 오늘날까지 많은 이의 사랑을 받아온 이유다.
<p.231, 0>
즉, 윤회와 업의 실제 의미는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사회 제도 안에서의 착한 행동, 나쁜 행동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우주의 질서 안에서의 행위와 거스름이 삶과 죽음의 형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 차이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전자는 타인의 시선이 내 행위의 평가 기준이 되는 반면 후자는 자기의 내면 안에서 우주적 질서와 자연스러움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p.240, 0>
노자는 이렇게 정리한다. 덕이 없는 사회에서는 인이 강조되고, 인이 없는 사회에서는 의가 강조되며, 의마저도 없는 사회에서는 예만 강조된다. 쉽게 말하면, 자기 내면의 질서를 따르지 않는 사회에서는 사람들 사이에 인자함이 중요시되고, 인자함이 사라진 사회에서는 의리가 중요해지며, 의리가 사라진 사회에서는 예절이 강요된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어떤 의미인지 와 닿지 않고 무슨 말장난인가 싶었는데, 사회생활을 하고 경제 활동을 하고 여러 사람들과 다양한 집단들을 거치면서 노자의 통찰이 새삼 날카롭다고 느낀 적이 있다. 그렇지 않던가? 아직 어린아이들에게는 그들 자신의 내면의 질서나 인자함을 기대할 수 없다. 왜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기 전에 우선 말과 행동과 신체를 제어하는 예절부터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아이들이 성장하면 그들은 친구와의 약속과 의리가 왜 중요한지를 스스로 알게 되고, 장년이 되어서는 인자함을 체득하게 되며, 노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기 내면의 질서를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하나의 사회도 마찬가지다. 아직 성숙하지 못한 사회에서는 위로부터 강제되는 질서와 규율을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 중요시되지만, 때가 이르러 그 사회가 성숙하면 구성원 각각의 사상의 자유가 인정되고 그들의 권리가 보장된다.
<p.274, 0>
노자는 아름다워 보이고 말을 잘하고 이것저것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직스럽고 선하고 깊게 아는 사람이 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그러한 이상적인 사람을 성인이라 부른다. 성인은 자기만의 것을 고집하지 않는다. 재산이든 지식이든 권한이든, 그는 그것을 내려놓고 다른 이에게 내어놓는다. 노자는 이러한 행위가 역설적이게도 더 많이 갖고 더 많이 쌓게 되는 행위라 말한다. 실제로 그렇지 않던가? 자신이 피같이 모은 재산이라며 움켜쥐고 있는 사람에게, 자신이 힘들에 얻은 지식이라며 공유하지 않는 사람에게 사람들은 등을 돌리고 하나둘씩 떠난다. 그는 재산과 지식을 조금 더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만큼 더 사람을 잃게 될 것이다. 반대로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이에게 사람들은 모이고, 진실한 관계망 속에서 그의 삶은 더 풍요로워진다. 노자는 이것이 하늘의 도라고 말한다. 버리고 내려놓는 것. 움켜쥐었던 손을 풀고 모든 것이 그저 자신을 거쳐 가게 하는 것. 이것이 하늘의 도이고, 성인의 덕이다. 우리가 이와 같을 때 모든 것은 이루어지고, 사람들 사이의 싸움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p277, 0>
탈속과 세속. 얼핏 모순되어 보이고 화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양극단의 가치는 어떤 면에서 인간 영혼의 보편적 무늬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이렇다 저렇다 규정할 수 없는 넓은 범위를 아우르며 현실과 이상을 동시에 살아가고 있는 존재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p.284, 0>
인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서고자 할 때 남부터 세워주고,
자기가 이루고자 할 때 남부터 이루게 한다.
자기를 미루어 남을 이해한다면 가히 인의 방법이라 할 것이다.
- 논어, 옹야
<p.294, 0>
초기 불교 경전인 <아함경>에는 연기를 이해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잘 설명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불을 본다. 여기서의 법은 우주의 법칙, 즉 진리를 말하고 불은 부처, 즉 깨달은 자를 말한다. 다시 말해, 우주의 실체가 연기임을 꿰뚫어 보는 자는 진리를 보게 되고, 그것이 곧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p.344, 0>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떤 면에서 무아설은 논리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불교가 무아설을 말하는 동시에 <베다>의 윤회설을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궁금한 것은 이것이다. 고정된 실체로서의 자아가 없는데, 고대체 그 무엇이 윤회하고 삶을 반복한다는 것인가? 변하지 않는 영혼 같은 것이 있어야 헌 옷을 버리고 새 옷을 입듯 다음 생으로 건너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질문은 합리적인 귀결이다. 실제로 붓다의 제자들도 스승에게 이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하지만 붓다는 이러한 질문은 핵심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쉬운 비유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이것은 '독화살의 비유'라고 알려져 있다.
수행승 마룬캬는 어느 날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이 세상은 영원한가, 덧없는가, 끝이 있는가, 끝이 없는가? 나의 생명이란 몸과 같은 것인가, 생명과 몸이 다른 것인가? 사람은 죽은 뒤에도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혹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가?'
그리고 이를 스승께 여쭈었다. 스승은 대답했다.
"마룬카여, 가령 어떤 사람이 독이 묻은 화살에 맞았다고 하자. 그의 친구나 동료나 가족이 그를 위해 화살을 빼낼 의사를 부를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말했다. '나를 쏜 사람은 왕족인가, 바라문인가, 서민인가, 노예인가? 이를 알지 못한다면 이 화살을 빼지 않겠다.' 또 이렇게 말했다. '나를 쏜 사람의 키가 큰가, 작은가, 중간인가? 나를 쏜 사람의 피부색이 검은가, 황색인가, 금빛인가? 이를 알지 못한다면 이 화살을 뽑지 않겠다.' 마룬카여, 그것을 알지 못하는 동안에 그의 목숨은 끝날 것이다."
'예?'라며 마룬캬가 혼란에 빠졌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동문서답인가? 붓다의 대답은 질문을 회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대답에는 가르침의 핵심이 담겨 있다. 그것은 붓다의 무아설이 자아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론이 아니라는 점이다. 차라리 그것은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로 여김으로써 발생한 고통을 제거하기 위한 실천적 가르침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질문 안에서 논쟁하길 좋아하고 그 안을 헤매는 것에 시간을 쏟는다. 이에 대해 붓다는 소모적 논쟁 안에서 방황하지 말고 그 밖으로 직접 걸어 나가 행동부터 할 것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네가 고통 속에 있다면 그 고통부터 제거하라. 붓다는 말한다.
"마룬캬여, 독화살을 맞은 이는 그 독화살을 먼저 뽑는 것이 순서가 아니겠는가?"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내 안의 독화살부터 빼내는 것이다. 물론 어떤 이들은 이러한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문제를 해소한 것이지, 해결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p347, 0>
붓다 입멸 후 100년이 되던 해에 두 번째 결집이 있었다. 이를 2차 결집이라 한다. 대략 기원전 383년경의 일이었다. 아난다의 제자였던 야사는 인도 각 지역의 장로들인 700명의 비구들을 바이샬리에 소집했다. 일부 비구들이 계율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러한 행동이 계율에 부합하는지 아닌지를 심의하기 위한 결집이었다.
이때 논의되었던 열 가지 행위를 보면 매우 흥미로운데, 이런 내용이다. 첫째 뿔로 만든 용기에 소금을 담아 다니다가 식사 때마다 사용하는 행위, 둘째 규정된 식사 시간 이후에 식사를 하는 행위, 셋째 다른 마을에 가서 보시를 받는 행위, 넷째 다른 지역의 승단 집회에 참석하는 행위, 다섯째 연유나 꿀을 우유에 타서 밥 대신 먹는 행위, 여섯째 병 치료의 목적으로 술기운이 있는 야자즙을 마시는 행위, 일곱째 몸이 큰 사람은 큰 방석을 사용하는 행위, 여덟째 계율에 명시되지 않은 스승의 개인적인 습관을 따르는 행위, 아홉째 다른 비구의 의중을 짐작하여 행동한 뒤 나중에 억지로 용서를 구하는 행위, 열째 금이나 돈을 보시받는 행위.
비구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죄가 되는지 아닌지를 심의했던 것이다. 너무 디테일해서 웃기게 보일 수도 있지만, 계율을 중시하는 비구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붓다가 입멸한 지 백 년이나 지났고 강산이 수없이 바뀌며 시대가 달라졌다. 붓다의 뜻이 중요한 것이지, 세부적인 규율을 그대로 지키는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이것이 흥미로운 것은 모든 거대 종교와 이념이 많은 시간이 흐르고 규모가 커지면서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보편적인 고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 주위에는 두 종료의 사람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근본주의, 원리주의, 권위주의, 절대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철저한 규율 준수와 정통 계승을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가치로 여긴다. 반면 다른 이들은 자유주의, 상대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상황과 맥락에 따른 어느 정도의 융통성을 인정한다. 개개인의 판단과 행위를 존중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한다고 여긴다.
<p. 353. 0>
마찬가지로 당신의 마음이 지옥이라면 이것은 흔적으로 남아 당신의 다음 삶을 결정할 것이고, 당신의 마음이 천국이라면 당신의 다음 삶도 그렇게 결정될 것이다. 붓다가 윤회의 고리를 끊는 방법으로 왜 팔정도를 강조했는지, 왜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는 등의 도덕 선생님 같은 이야기를 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내가 바른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은 그것을 심판하는 자가 있어서가 아니라, 나의 모습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나의 마음이어서다.
<p.378, 0>
세계가 내 마음의 반영이고, 그러므로 세계와 자아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설명은 세계를 진지하게 통찰하고자 하는 모든 이가 결국에 도달하게 되는 최종 결론이다.
초기 대승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경전 중 하나인 <화엄경>은 이러한 결론을 매우 명료하게 표현한다. 바로 '일체유심조'다. 세상의 모든 것이 마음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단순히 '네가 마음먹은 대로 될 것'이라는 자기 계발적인 메시지로 해석되기에는 너무도 묵직한 개념이다. 일체유심조는 존재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꿰뚫는다. 우리가 언젠가 이 말 뜻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될 때, 아마도 우리는 더 지혜로워질 것이다. 내 앞에 드러난 현상 세계가 내 마음이 지어낸 것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욕망에 집착하지 않으며 그로써 자유로워질 테니 말이다.
<p.381, 0>
우리가 고대인의 사상과 종교를 들춰보고 그들이 말하는 바에 귀 기울여야 하는 것은 그들 중 누군가가 진리를 말해고 다른 누군가가 거짓을 말했는지를 밝혀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나의 삶 때문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내가 찾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계관'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자신에게는 세계관 같은 건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눈에는 드러나지 않는 하나의 세계관의 대륙에 발을 딛고 산다. 우리가 자신의 세계관을 들여다보아야 하는 것은 나의 세계관이 내가 일어설 수 있는 단단한 대지를 제공해주기는 하지만 동시에 이것이 나의 한계이자 울타리가 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는 나의 의지가 아니라 나의 세계관이 답한다. 기독교인은 결국 기독교적 모범으로 자신의 삶을 수렴하고, 불교인은 불교적 모범으로 수렴하며, 과학주의자는 유물론적 결론에, 자본주의자는 경제적 결론에 도달한다. 우리가 고대인의 사상과 종교를 들춰보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하는 것은 수많은 낯선 대륙에 상륙하기 위해서다. 다른 세계관에 발을 디딤으로써 나의 작은 세계관의 영토를 가볍게 넘어서기 위해서다. 수많은 세계관의 대륙을 탐험하고 돌아온 사람만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대답을 자신의 세계관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따라 결정할 수 있다.
<p.385, 0>
소크라테스와 관련된 일화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그가 받은 신탁에 대한 것이다. 그의 친구이자 제자였던 카이레폰은 어느 날 델포이 신전에 가서 사제에게 신탁을 청했다. 질문은 "이 세상에서 소크라테스보다 현명한 사람이 있는가?"였다. 신탁은 "없다"라고 나왔다. 당시 아테네에서 신의 지위는 오늘날의 일반적인 종교 정도가 아니었다. 신성모독은 사형까지 가능한 죄였다. 물은 사람이나 그 대답을 들은 사람이나 신탁을 장난으로 혹은 실수로 생각할 수는 없었다. 카이레폰으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들은 소크라테스는 이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보다 현명한 사람이 없다니,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아테네에는 이름난 소피스트가 수없이 많았고, 권력이나 부 면에서 뛰어난 사람도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지혜롭다고 소문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이 지혜롭지 않음을 증명하려 했다. 정치인, 시인, 장인 등을 만나 그들과 대화했다. 그리고 결국 소크라테스는 알게 되었다. 자신이 그들보다는 그나마 덜 무지하다는 것을 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면서도 자신이 무엇인가를 매우 잘 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반명 소크라테스는 최소한 자신이 무엇인가를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것을 '무지의 지'라고 한다. 진정한 현명함이란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는 것에서 출발할 수 있음을 소크라테스는 알고 있었다.
<p.418, 0>
"많은 단순한 이가 신은 저기에 있고 자신들은 여기에 있는 것처럼 신을 보아야 한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신과 나, 우리는 하나다. 인식을 통해 나는 신을 내 속으로 들어오게 하고, 사랑을 통해 나는 신 안으로 들어선다."
- 에크하르트
<p.540, 0>
다음으로는 당신 인생에 대한 존재론적 이유를 들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세계관'이라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자신에게는 세계관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슬픈 말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수감자라는 것을 모르는 수감자와도 같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세계관은 감옥이다. 감옥 안에 있는 자에게는 감옥 밖의 한 줌의 공간도 결코 허락되지 않는다. 세계관도 마찬가지다. 세계관은 당신 내면의 감옥이다. 우리는 누구나 특정 세계관 안에서 탄생하고 성장하며 죽는다. 그 바깥으로는 나가지 않고, 심지어 그 바깥이 있는지조차 상상하지 못한다. 어떤 이들은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태어나서 기독교인으로 성장하고 기독교도로 죽는다. 그는 한 번도 불교의 세계관에, 이슬람의 세계관에, 유물론의 세계관에 발을 디뎌보지 않고 자신의 세계가 전부라고 믿으며 눈을 감는다. 어떤 이들은 불교의 세계관에 태어나 불교인으로 성장하고 불교도로 죽는다. 그는 한 번도 다른 세계관에 발을 디뎌보지 않고 눈을 감는다. 어떤 이들은 유물론자로 태어나서 유물론자로 죽고, 어떤 이들은 실용주의자로, 어떤 이들은 허무주의자로, 어떤 이들은 과학주의자로 태어나고 성장했으면서도 자신에게는 세계관 같은 건 없다고 믿으며 눈을 감는다.
세상 모든 이가 각자 발 딛고 있는 수많은 세계관을 가장 근원적인 기준으로 나눈 것이 일원론과 이원론이다. 어떤 이들은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을 보고, 세계가 자기 내면의 반영임을 매 순간 느끼며 성장하다가 죽는다. 어떤 이들은 자아와 세계가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이미 존재하는 세계 위를 걸어 다니는 존재라고 매 순간 인지하며 성장하다가 죽는다. 그리고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은 이원론의 세계관 위에 서 있다. 우리는 여기서 태어나, 여기서 죽을 것이다. 그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심지어 그 바깥이 있는지 생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문제는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갖가지 느낌과 상념이 사실은 우리가 이원론의 세계관 위에 발 딛고 있기에 필연적으로 갖게 된 것들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눈앞의 세계가 실재한다고 믿는 것도, 그래서 마음이나 정신은 소홀히 하고 눈앞의 물질세계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도, 세계와 자아를 독립된 실체로 느끼며 자신이 소멸한 이후에도 세계가 존속할 것이라고 믿는 것도, 그러니 나의 인생이라는 것은 덧없고 허무하다고 느끼는 것도, 나의 내면은 보이지 않으니 그 안을 들여다볼 생각은 하지 못하고 타인의 말에 휘둘리게 되는 것도 모두 우리가 자아와 세계를 나누는 이원론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에 갖게 된 사유의 흔적들이다.
우리가 이원론을 넘어 일원론의 세계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 한 발을 내디뎌 익숙하지 않은 미지의 세계로 들어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잃어버린 절반의 세계인 일원론의 세계, 그곳의 주인이 원래 당신이기 때문이고, 당신이 들어서기 전까지 그곳은 깊은 어둠 속에 버려져 있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 외부의 폭풍을 가라앉히고 내가 가진 모든 선입견을 판단중지 한 후, 내면의 가려진 대륙을 향해 발을 내디뎌 보자. 고대의 위대한 스승들이 그 깊은 곳에 출구가 있다고, 그 출구는 우주와 연결되어 있다고 말해주고 있으니.
<p.549, 0>
팟캐스트 <지대넓얕>의 오랜 팬으로서 이 책은 내게 또 한 번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이 책 보다 먼저 출간된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1, 2>를 읽었을 때만 해도 팟캐스트의 채사장 목소리를 통해 이미 익숙한 내용들이라 이 정도의 놀라움은 없었는데 이번 제로 편은 위의 두 편과 확연히 다른 책인 듯하다. 현실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시작한 탐구가 하나둘씩 저변을 늘려가더니 '나는 누구인가'라는 지점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 참 대단하다. 이 시리즈를 읽은 일부 사람들이 책이 다루는 지식의 깊이가 너무 얕다거나, 이거 다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 아니냐고 얘기하곤 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이미 배운 지식의 파편들을 한 군데에 모아 개요를 만들고, 분류를 하고, 정리를 해서 하나의 일관된 흐름 속에 넣어 결국 궁극적인 질문에 도달했다는 데에 이 책의 가치를 높이 사고 싶다.
탈속과 세속 그 사이 어딘가. 내 생각에는 일원론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나 이원론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나 공통적으로 번뇌에 도달하는 지점이 바로 이 지점인 것 같다. 짧은 인간의 삶이 끝나면 천국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현실에서 하루만 굶으면 머릿속은 먹을 거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찬다. 우주와 내가 하나이고 이 모든 것은 내면의 의식이 만든 환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돈이 없어 추운 날 길거리에서 벌벌 떨게 되면 정신적 깨달음보다 당장의 따뜻한 잠자리를 갈구하게 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일원론이든 이원론이든 그 어떤 강력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현실에서 일어나는 아주 작고 사소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무력해지고 마는 존재인 것이다. 우리의 삶이 우주의 시간에 비하면 찰나의 순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더라도 당장 우리가 느끼는 일분일초의 시간을 완전히 무시하고 살기는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현실의 내가 직접 느끼고 영향을 받는 것이 바로 그 일분일초의 기쁨, 분노, 슬픔,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실에 발을 붙이고 사는 이상 완전한 탈속이라는 건 불가능한 일일 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상관없이 어떻게든 현실에서 생기는 먹고사는 문제들을 해결해야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얼마만큼 세속적이어야 하는지, 얼마만큼 탈속적일 수 있는지 그 정도를 고민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먹고살 수만 있으면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현실을 너머 존재하는 신을 믿고 천국을 믿기 때문에, 혹은 현실은 내 의식 세계의 일부이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생존을 위해 먹고 살 수만 있어도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먹고 살 수 있으면 된다는 정도가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누구는 잘 수 있는 곳과 하루 세끼만 주어져도 된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누구는 자가인 집과 하루 세끼에 먹고 싶은 것을 사 먹을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고, 누구는 가능하면 더 많은 돈을 벌어 부유한 삶을 누리고 싶다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과연 부유하게 산다고 남들보다 더 세속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반대로 가난하게 살면 더 탈속적이고 믿음이 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탈속과 세속 사이 본인이 생각하는 적당한 위치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먹고사는 것에 대한 이런 다양한 기준이 나타나는 거라고 생각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탈속과 세속 사이 내가 어디에 위치할 것인지를 스스로 고민해 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인생의 순간순간에 '그래, 이게 인생이지'라며 현실을 쫓을 때도 있고, '이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라며 현실을 벗어나려 할 때도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지나치게 현실을 추구하면서 사는 태도로도, 지나치게 현실을 벗어나려는 태도로도 치우치지 않으려 하다 보면 결국 그 적정 선이 어디인지 고민하는 순간에 이르게 된다. 이때 대부분은 주위를 둘러보고 다른 사람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거나, 사회가 제시하는 혹은 바라는 모습은 어떤지를 알려고만 할 뿐 본인 스스로에게서 답을 찾으려고 하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 그러나 그 적절한 위치를 타인의 기준 맞추어 살다 보면 우리는 지나치게 세속적으로 살려고 하거나, 지나치게 탈속적으로 살려고 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의 세계관과의 괴리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계와 나에 대한 관념이 나로부터 왔듯이, 현실과 현실 너머의 세상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찾는 일도 결국은 나의 몫이라는 생각이 들고, 그 적절한 균형을 유지할 때 비로소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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