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것을 들으면서 맞장구를 쳤다. 이야기를 절반 정도밖에 듣고 있지 않았지만, 이야기를 듣는 것 자체는 별로 싫지 않았다. 이야기의 내용이야 어떻든 그녀가 식탁에서 열심히 일 이야기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좋았다. 이게 가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안에서 우리는 각자 맡겨진 책무를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회사 이야기를 하고, 나는 저녁식사를 차리고 그 이야기를 듣는다. 그것은 내가 결혼하기 이전에 막연하게 그렸던 가정의 모습과는 꽤 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건 내가 선택한 것이었다. 물론 나는 어렸을 때에도 나 자신의 가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손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 나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후천적인 세계 안에 있다. 나의 가정이다. 그것은 물론 완벽한 가정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설령 어떠한 문제가 있더라도 기본적으로는 나의 가정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 했다. 그것은 결국 나 자신이 선택한 것이었으며, 만일 거기에 무슨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자 자신이 본질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문제 그 자체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p.91, 태엽 감는 새 1>
"그래요, 가노 마루타 씨. 당신은 어떻게 생각했어요, 그 여자를?"
"글쎄. 그녀와 이야기하고 있을 때 적어도 지루하지는 않았어. 지루하지 않다는 건 나쁘지 않지. 어차피 이 세상은 알 수 없는 것으로 가득하잖아. 그리고 누군가가 그 공백을 메워야 한다구. 누군가가 그걸 메워야 한다면 지루한 사람보다야 지루하지 않은 사람 쪽이 훨씬 좋지. 안 그래?"
<p.94, 태엽 감는 새 1>
누군가와 관계하는 것으로 인해 오랫동안 감정적으로 혼란해지는 일은 나에게는 거의 없다. 불쾌한 생각을 하고 그래서 누군가에게 화를 내거나 초조해한 적은 물론 있다. 하지만 길게 이어지지는 않는다. 나에게는 나 자신의 존재와 타인의 존재를 전혀 다른 영역에 속하도록 구별해두는 능력이 있다. (이것을 능력이라 해도 지장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결코 간단한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나는 무엇인가로 불쾌해지거나 초조해지거나 할 때 그 대상을 우선 나 개인과는 관계없는 어딘가의 다른 영역으로 이동시켜버린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한다. 됐어, 나는 지금 불쾌하거나 초조하다. 하지만 그 원인은 이미 여기에는 없는 영역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러니까 그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천천히 검증하여 처리하기로 하자고. 그렇게 해서 일시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동결시켜버리는 것이다. 나중에 그 동결을 풀어 천천히 검증을 해봐도 여전히 감정이 혼란해져 있을 때도 간혹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오히려 예외에 가깝다. 적당한 시간이 지나면 대개의 것은 독기가 빠져 무해한 것이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조만간 그 일을 잊어버린다.
지금까지의 인생의 과정에서 그런 감정 처리 시스템을 적용하여 나는 수많은 쓸데없는 문제를 회피해 나 자신의 세계를 비교적 안정된 상태로 지켜올 수가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유효한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적잖게 긍지로 생각해왔다.
<p.158, 태엽 감는 새 1>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득실을 따지지 않고 돈으로 사버리는 게 최고야. 남는 에너지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위해서 확보해두면 돼."
<p.233, 태엽 감는 새 1>
몽골의 새벽은 정말 멋있었소. 어느 순간에 지평선이 하나의 희미한 선이 되어 어둠 속에서 떠오르고, 그것이 쓰윽 하고 위쪽으로 끌어올려져갔소. 마치 하늘 위에서 커다란 손이 내뻗어와서 밤의 장막을 땅에서 천천히 걷어내는 것처럼 보였소. 그것은 웅장한 광경이었소. 그 웅장함은, 아까도 얘기했듯이, 나라는 인간의 의식 영역을 훨씬 뛰어넘는 종류의 웅장함이었소. 그것을 보고 있는 동안 나는 내 생명이 그대로 점점 엷어져서 사라져버리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오. 거기에는 사람의 행위와 같은 사소한 일은 조금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소. 생명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어느 하나 존재하지 않았던 태곳적부터 이와 똑같은 일이 몇억 번, 몇십억 번이고 행해져왔던 것이오. 나는 경계를 서고 있다는 것도 잊고, 그 새벽의 광경을 단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소.
<p.291, 태엽 감는 새 1>
"그 나이 또래의 남자아이들은 곧잘 그렇게 말해. 자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제대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과는 터무니없이 동떨어진 것을 일부러 말하거나 행동하거나 하지. 그리고 무의미하게 남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자신이 상처를 받거나 하는 거야. 어쨌든 너는 전혀 못생기지 않았어. 아주 귀엽다고 난 생각해. 거짓말이거나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냐."
<p.43, 태엽 감는 새 2>
나는 지금까지 오카다 씨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이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없소.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 귀에는 분명히 나의 이 이야기가 황당무계한, 지어낸 이야기로 들릴 거요.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모두 불합리하며 생각할 가치도 없는 것으로 무시하고 묵살해버린다오.
<p.60, 태엽 감는 새 2>
하지만 타인과 둘이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뭔가를 만들어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외아들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고독증후군을 갖고 있었다. 진지하게 무엇인가를 할 때는 나 혼자서 하는 것을 좋아했다. 누군가에게 일일이 설명해서 이해시켜야 하는 일이라면 차라리 시간이나 노력을 들이더라도 혼자서 묵묵히 하는 쪽이 편했다.
<p.123, 태엽 감는 새 2>
"요컨대 자신이 언젠가는 죽을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오히려 사람들은 자신이 사는 의미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을까요? 정말 그렇잖아요? 언제까지고 늘 영원히 살 수 있다면 누가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겠어요. 그럴 필요가 있겠어요? 만일 가령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해도 말이에요, '시간은 아직 충분히 있으니까. 언젠가 가까운 시일 내에 생각하면 되니까.' 하게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죠. 우리들은 여기에서, 이 순간을 생각하지 않으며 안 돼요. 내일 오후 나는 트럭에 치여 죽을지도 몰라요. 사흘 후 아침에 태엽 감는 새 님은 우물 속에서 굶어죽어 있을지도 몰라요 그렇죠? 무엇이 일어날지 아무도 몰라요. 그러니까 우리가 진화하기 위해서는 죽음이라는 것이 아무래도 필요한 거예요.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죽음이라는 존재가 생생하고 거대할수록 우리는 필사적으로 사물을 생각하게 되는 거죠."
<p.174, 태엽 감는 새 2>
"그러나 오카다 씨, 아무쪼록 조심하세요. 스스로 증상을 안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예를 들어 사람은 자기 얼굴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는 건 불가능하죠. 거울에 비추어 그 반영을 볼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우리는 거울에 비친 형상이 옳다고 경험적으로 믿을 뿐이죠. 조심하세요."
<p.218, 태엽 감는 새 2>
"신중히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나 여러가지 것들이 몹시 복잡하게 얽혀 있어 하나하나 풀어서 독립시킬 수가 없어요. 어떻게 풀어나가면 좋을지 저도 모르겠어요."
"그것을 잘 풀기 위한 비결 같은 게 있지. 그 비결을 모르기 때문에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는 거야. 그리고 실패한 후 이러쿵저러쿵 시시껄렁한 소리를 하거나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지. 나는 그런 예들을 물릴 정도로 보아왔고, 솔직히 말해서 그런 모습을 보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그래서 구태여 이렇게 잘난 체를 하지만. 그 비력이란 우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부터 정리해나가는 거야. 다시 말해서 A부터 Z까지 번호를 매긴다고 치면, A부터 시작하는 게 아니라 X, Y, Z 부근부터 시작해보는 거야. 너는 사건들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어 손을 쓸 수 없다고 말했는데, 그건 제일 위에서부터 사건을 해결해가려 했기 때문은 아닐까? 뭔가 중요한 것을 결정할 때는 먼저 어떻게 돼도 상관없는 것부터 시작하는 편이 좋아. 누가 봐도 알 수 있고, 누가 생각해도 알 수 있는, 정말로 시시한 것부터 시작하는 거야. 그리고 그 시시한 것에 충분히 시간을 들이는 거라고. (...) 보통 사람들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것 같은 시시한 것은 간단히 뛰어넘어서 조금이라도 빨리 가려고 하지.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아. 시시한 것에 제일 많이 시간을 투자한다고. 그러한 것에 시간을 투자하면 할수록 뒷일이 제대로 풀려가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
<p.331, 태엽 감는 새 2>
"그렇다면 무엇인지 확실히 알 때까지 자신의 눈으로 사물을 보는 훈련을 하는 편이 좋을 것 같구나. 시간을 들이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돼. 충분히 무엇인가에 시간을 들이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제일 세련된 형태의 복수란다."
<p.334, 태엽 감는 새 2>
그래도 이따금 외로움이 마음을 세차게 찔러댔다. 마시는 물이나 들이마시는 공기마저도 길고 날카로운 바늘을 지니고 있고, 손에 잡히는 책갈피의 모서리가 마치 얇은 면도날처럼 하얗게 빛을 내며 가슴을 섬뜩하게 했다. 새벽 네 시의 조용한 시각에는 고독의 뿌리가 조금씩 자라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p.21, 태엽 감는 새 3>
"하지만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 동물원이 정말로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동물원이었는지 나로서는 왠지 확신을 가질 수가 없어요.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이따금 그것이 지나치게 선명한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어요. 그리고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대체 그 선명성의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부터가 나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것인지 판단할 수 없게 되는 거예요. 마치 미궁에 빠져든 것처럼 말이에요. 당신은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나요?"
<p.134, 태엽 감는 새 3>
어쩌면 세상이라는 것은 회전문처럼 그저 그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희미해져가는 의식 속에서 그는 문득 생각했다. 그 칸막이의 어디로 들어가느냐 하는 것은 단지 발을 내딛는 방식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어떤 칸막이 속에는 호랑이가 있고, 다른 칸막이 속에는 호랑이가 없다. 요컨대 그 밖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거기에는 논리적인 연속성은 거의 없다. 그리고 연속성이 없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라는 것 따위도 실제로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자신이 세상과 세상의 어긋남을 잘 느낄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p.144, 태엽 감는 새 3>
"그리고 이건 쓸데없는 참견인지도 모르지만, 이 세상에는 모르는 채로 있는 편이 나은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일수록 사람들은 기를 쓰고 알고 싶어합니다. 이상한 일이죠."
<p.193, 태엽 감는 새 3>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에요, 자신이 이런 식으로 일의 일부가 되어간다는 것에 대해서 나는 전혀 나쁜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아요. 위화감 같은 것도 별로 느끼지 않고요. 아니, 오히려 나는 그렇게 개미처럼 한눈도 팔지 않고 일을 함으로써 점점 '참다운 나 자신' 에게 가까이 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조차 드는 거예요. 뭐라고 할까요,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자신의 중심에 다가가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내가 '약간 이상' 하다고 말한 것은 이런 점이에요.
<p.213, 태엽 감는 새 3>
삼 년 전에 누군가로부터, 너는 지금으로부터 삼 년 뒤에 산속 공장에서 시골 처녀들과 함께 가발을 만들고 있을 거야, 하는 말을 들었다면, 흥 하고 코웃음을 쳤을 테니까요. 그런 일은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었어요. 그러니까 거꾸로 말하면, 지금으로부터 삼 년 뒤에 내가 뭘 하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얘기죠. 태엽 감는 새님은 삼 년 뒤에 자신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있나요? 틀림없이 모를 거예요. 지금 여기에 있는 돈을 다 걸어도 좋지만 삼 년 뒤는커녕 한 달 뒤의 일조차도 알 수 없을걸요.
<p.216, 태엽 감는 새 3>
그런데요,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이라든가 세계라는 것은, 다소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일정한 법칙이 있다고(혹은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며 사는 게 아닐까요? 주위 사람들과 얘기를 하다가 자주 그런 생각을 해요. 무슨 일인가 일어나면, 그 일이 사회적인 것이든 개인적인 것이든 사람들은 흔히 "결국 그건, 저것이 이랬으니까 그렇게 된 거야." 라는 식으로 말하고, 대개의 경우 다들 "아아, 정말 그렇구나." 하고 납득하고 말지만, 나는 그 점을 잘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저것이 이렇다', '그래서 그렇게 되었다' 라고 하는 것은 마치 전자레인지에 계란찜 재료를 집어넣고 스위치를 누른 후 땡 하고 울려서 문을 열어보니까 계란찜이 되어 있는 것처럼, 전혀 아무런 설명이 없는 게 아닐까요? 그러니까 그 스위치와 땡 하는 소리 사이에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문을 닫아버리니까 전혀 알 수가 없잖아요. 계란찜 재료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암흑 속에서 일단 마카로니 그라탱으로 변했다가, 그러고 나서 다시 계란찜으로 되돌아오는 것인지도 몰라요. 하지만 우리들은 계란찜 재료를 전자레인지에 집어넣고 땡 했으니까 당연히 계란찜이 만들어졌을 거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해요. 나는 오히려 계란찜 재료를 집어넣고 땡 해서 문을 열면 이따금 마카로니 그라탱이 나오는 쪽이 안심될 것 같아요. (...)
아니면, 세상에는 몇 가지 유형의 인간이 있어서 어떤 사람에게는 인생이나 세계가 계란찜과 같이 일관된 것이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마카로니 그라탱과 같이 우연한 것일까요? 나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청개구리 같은 우리 부모는 만약 계란찜 재료를 집어놓고 땡 한 뒤 마카로니 그라탱이 나왔다 하더라도, 아마 "내가 실수로 마카로니 그라탱을 집어넣은 모양이군." 하고 중얼거리지 않을까요? 아니면 마카로니 그라탱을 손에 들고, "아니야, 이것은 얼핏 보기엔 마카로니 그라탱 같지만 사실은 계란찜이야." 하고 열심히 자신을 납득시키려고 할지도 몰라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내가 만일 "계란찜 재료를 집어놓고 돌렸는데 그것이 마카로니 그라탱으로 변하는 일도 가끔씩은 있어요." 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해도 절대로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버럭 화를 낼 거예요. 태엽 감는 새 님은 그런 걸 이해할 수 있겠어요?
<p.247, 태엽 감는 새 3>
"옷을 디자인하는 건 나에게는 다른 세계로 통하는 비밀의 문이었어요. 그 조그만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곳에는 나 혼자만의 세계가 펼쳐지는 거예요. 그곳에서는 상상력이 전부예요. 자신이 상상하고 싶은 걸 제대로 완벽히 상상할 수 있으면 그만큼 현실에서 멀어질 수 있거든요. 그리고 가장 기뻤던 건 그것이 공짜라는 것이었어요. 상상을 하는 데는 돈이 한 푼도 들지 않죠. 얼마나 멋있어요? 아름다운 옷을 머릿속에서 그려내 그림으로 옮기는 일은 그저 단순히 현실을 떠나서 몽상에 잠길 수 있는 즐거움을 줄 뿐만 아니라, 나에게 있어서는 살아가기 위해서 빼놓을 수 없는 일이었던 거예요. 그것은 호흡처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그래서 누구나 다 차이는 있어도 비슷한 걸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지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특별히 그런 일을 하고 있지 않으며, 하려고 생각해도 잘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어요. 그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나는 어떤 의미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달라. 그러니까 다른 삶의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는 거야.' 라고 말이에요."
<p.10, 태엽 감는 새 4>
운명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자기 몫을 챙겨가고, 그 몫을 손에 넣을 때까지는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
<p.93, 태엽 감는 새 4>
"오카다 씨, 한 인간이 누군가를 미워할 때 어떤 미움이 가장 강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말이지요, 내가 열렬히 갈망하는데도 못 얻는 걸 힘들이지 않고 손쉽게 쟁취하는 녀석을 볼 때입니다. 내가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세계에, 얼굴 하나로 어렵지 않게 들어가는 녀석을 손가락을 빨며 보고 있을 때랍니다. 상대방이 주변에 가까이 있으면 있을수록 그 증오심은 더해지지요. 그런 겁니다. 나에게 그런 증오심을 심어준 사람이 바로 와타야 선생님이었던 겁니다."
<p.147, 태엽 감는 새 4>
헤엄친다는 것은 내 인생에서 일어난 멋진 일 중의 하나였다. 그것은 내가 안고 있는 어떤 문제도 해결해주지 않았지만, 또 어떤 문제도 더 어렵게 만들지는 않았다.
<p.189, 태엽 감는 새 4>
"안녕, 가사하라 메이. 무엇인가가 너를 굳건히 보호하기를 기도하겠다."
<p.303, 태엽 감는 새 4>
하루키의 주인공들은 생활이라는 삶의 구체적 물질의 기반을 상실한 채 허공 위를 떠서 흘러간다. 하루키는 텅 빈 방, 텅 빈 거리, 텅 빈 세계의 공허함 위에 세워져 있는 삶의 우수, "이 텅 빈 세계 속에서" 외롭게 혼자 춤추고 있는 사람들의 그 무상의 행위를 그려나간다. 실재가 사라져버리고, 그것이 기호와 이미지로 대체되어버린 고도자본주의적 삶의 핵심이다. 하루키란 작가는 고도자본주의 사회가 주는 물질적 풍요와 편리함을 기꺼이 향유하면서도 그 근원에서는 텅 빈 공동을 안고 살아가는, 텅 빈 세계를 다만 스쳐 지나갈 뿐인 현대인들의 삶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 장석주(문학평론가)
<p.310, 태엽 감는 새 4>
기묘한 이야기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로는 <상실의 시대>와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정도를 읽었고, 이후에 연거푸 <1Q84>, <해변의 카프카>, <태엽 감는 새>를 읽었더니 원래 이 작가의 스타일이 이렇구나,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 것 같다. 내게 무라카미 하루키는 기묘한 이야기를 쓰는 작가로 기억될 듯하다.
이 책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은 쉽지 않다. 주된 이야기가 있지만 그 사이사이에 작은 이야기들이 상당히 많은 곁가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긴 장편소설의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해 보고자 대강의 줄거리를 적어보고자 한다. 이 책의 주인공은 '오카다 도루'라는 서른 살의 남성이다. 그는 6년 전 동갑의 아내 '오카다 구미코'와 결혼하여 고양이를 한 마리 키우면서 살고 있었다. 그는 법률 사무소를 다니다 얼마 전 그만두고 현재는 전업 주부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키우던 고양이가 사라진다. 아내가 직장에서 일을 하는 동안 주인공은 고양이를 찾아 나서지만 그가 발견한 것은 이웃한 버려진 집에 있는 우물과 이웃에 살고 있는 여고생 '가사하라 메이' 다. 그리고 곧이어 아내도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으니 더 이상 나를 찾지 말라는 의문의 편지 한 통을 남긴 채 사라져 버린다. 한순간에 주인공은 텅 빈 집에서 혼자가 돼버린다. 그는 아내가 사라진 데에는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며 남는 시간을 우물 안에 들어가 보내게 되는데 이때 여러 환상을 경험한다. 그리고 얼굴에 신비한 능력을 가진 반점을 갖게 되고 아내의 실종 배경에는 그의 오빠인 '와타야 노보루'가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와타야 노보루는 대학 교수이자 현재는 힘 있는 정치가인데 불길한 기운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어 날이 갈수록 현실에서 힘을 갖게 되는 존재이다. 주인공은 아내 구미코를 와타야 노보루로부터 구출하기 위해서는 우물이 가진 환상의 힘을 이용해 우물을 구미코가 있는 곳으로 가는 통로로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버려진 집을 사기 위해 자신의 반점이 가진 치유 능력을 정계 상류층에게 사용하여 돈을 버는 아카사카 너트메그와 그의 아들 아카사카 시나몬을 만난다. 이를 통해 그는 주기적으로 우물 속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으며 점점 와타야 노보루와 아내 구미코에게 가까워져 결국 우물을 통한 환상 속에서 와타야 노보루를 야구방망이로 내리쳐 중상을 입게 한다. 그리고 그의 의지가 아내 구미코에게도 닿아 그녀는 의식을 잃은 와타야 노보루의 생명유지장치를 제거하고 감옥에 가면서 자유를 얻게 된다. 현실 세계에서의 악의 근원인 와타야 노보루를 제거한 뒤 주인공은 구미코가 감옥에서 나올 날을 기다리면서 이야기가 끝난다. 그 외에 와타야 노보루의 조수인 우시카와의 이야기, 가노 구레타와 가노 마루타, 주인공과 가사하라 메이와의 관계, 너트메그와 시나몬의 이야기, 마미야 중위의 전쟁 시절 이야기 등 미처 언급하지 못한, 그러나 주된 줄거리와 얽혀 있는 이야기들이 여럿 있지만 그것까지 다 적다가는... 얘기가 산으로 갈 것 같아서 이 정도로만 줄여야겠다.
이 책을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는 주인공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아내를 찾는 추리 소설인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 속에 너무나도 많은 환상이 등장하고 그러다 보니 점점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비현실인지 구분하기가 힘들어졌다. 아내를 찾는 일도, 아내가 사라진 이유도 명확한 근거와 논리를 찾을 수 없었다. 결국은 마술 혹은 환상이라고 불리는 일들을 통해 '사라락' 하고 일들이 진행된 건데 그래서인지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도 '그래서 아내가 왜 사라진 거라고?'라는 물음이 남았다. 이 밖에도 풀리지 않는 물음들이 많이 남아 있다. 예를 들어, '가사하라 메이는 이 소설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시나몬이 말을 못 하게 된 그날 밤 그가 창 밖으로 본 두 남자는 무슨 의미인가?', '가노 구레타와 가노 마루타는 소설 중반부터 왜 등장하지 않는가.' 등등. 주인공을 둘러싼 인물들의 이야기 중에서도 작가가 꽤나 비중을 들여 설명과 묘사를 했음에도 결과적으로 소설의 전체적인 맥락과는 크게 관련이 없는 경우가 많아 이건 정말 맥거핀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나서 이런 장르를 마술적 사실주의(Magical Realism)라고 부르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오컬트적인 요소나 초현실주의적 존재, 의식 세계처럼 현실에 마술적인 요소들을 더하는 장르를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이런 장르의 소설과 잘 맞지 않는 것 같다. 워낙에 유명하고 팬덤이 강한 작가다 보니,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서라면 왠지 아는 체를 하거나,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 게 있었다. 특히나 한국에서 유명세를 탄 작품도 <상실의 시대>이고, 나처럼 작가의 여러 책 중 그 책을 처음 읽어 본 사람이라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대다수는 원래 마술적 사실주의 장르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내가 몇 달 전 <1Q84>와 <해변의 카프카>를 읽고 느낌이나 생각을 적어보려고 했었을 때도 마땅히 적을 말이 없어 꽤나 고심했었는데 아마 비슷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 속에 많은 비유와 상징이 담겨 있지만 미처 전부 이해하기 어려운... 이런 이유 때문에 읽을 때는 상황과 인물에 대한 묘사가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만 다 읽고 나면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의문 때문에 알쏭달쏭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재미를 추구하는 소설에서 재밌으면 그만이지 거창하게 의미까지 찾을 필요가 있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적어도 한 권의 책을 읽고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할 수 있어야 재미도 있고 의미도 찾을 수 있는데 내용 파악이 잘 안 되다 보니 그런 막연한 느낌을 받은 것 같다. 어쩌면 작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혹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아직까지는 이러하다고 적어두고 싶다. 그렇다고 앞으로 작가의 책을 안 읽어보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지나 미래의 내가 지금의 감상을 어떻게 생각하게 될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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