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지 않는 사람은 편안한 믿음 속에서 안온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여행을 떠난 이상, 여행자는 눈앞에 나타나는 현실에 맞춰 믿음을 바꿔가게 된다. 하지만 만약 우리의 정신이 현실을 부정하고 과거의 믿음에 집착한다면 여행은 재난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p.35>
인간의 행동은 입버릇처럼 내뱉고 다니는 신념보다 자기도 모르는 믿음에 더 좌우된다. 모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된다. '흑인은 지적으로 열등하다' 같은 고정관념도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인종차별주의적인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 백인은 어쩌다 뛰어난 지적 성취를 이룬 흑인을 만나면 '흑인이지만 정말 대단하다'는 대사를 칭찬이랍시고 치게 된다.
<p.58>
그래서 일상사가 번다하고 골치 아플수록 여행지의 호텔은 더 큰 만족을 준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 문제들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고 나에게 그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할 것만 같다. 삶이 부과하는 문제가 까다로울수록 나는 여행을 더 갈망했다. 그것은 리셋에 대한 희망이었을 것이다.
<p.66>
작가는 우렁찬 목소리보다는 작은 속삭임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자신 없는 음성으로 낮게 읊조리는 소심한 목소리에 삶의 깊은 진실이 숨어 있을 때가 많다. 그런 웅얼거림을 잘 들으려면 발화자 가까이에서 귀를 기울여야 한다.
<p.79>
영감을 얻기 위해서 혹은 글을 쓰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지는 않는다. 여행은 오히려 그것들과 멀어지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격렬한 운동으로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을 때 마침내 정신에 편안함이 찾아오듯이, 잡념이 사라지는 곳, 모국어가 들리지 않는 땅에서 때로 평화를 느낀다. 모국어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지만, 이제 그 언어의 사소한 뉘앙스와 기색, 기미와 정취, 발화자의 숨은 의도를 너무 잘 감지하게 되었고, 그 안에서 진정한 고요와 안식을 누리기 어려워졌다. 모국어가 때로 나를 할퀴고, 상처내고, 고문하기도 한다. 모국어를 다루는 것이 나의 일이지만, 그렇다고 늘 편안하다는 뜻은 아니다.
<p.80>
무슨 이유에서든지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은 현재 안에 머물게 된다. 보통의 인간들 역시 현재를 살아가지만 머릿속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후회와 불안으로 가득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지난밤에 하지 말았어야 할 말부터 떠오르고, 밤이 되면 다가올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뒤척이게 된다. 후회할 일은 만들지를 말아야 하고, 불안한 미래는 피하는 게 상책이니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미적거리게 된다. 여행은 그런 우리를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부터 끌어내 현재로 데려다놓는다. 여행이 끝나면, 우리는 그 경험들 중에서 의미 있는 것들을 생각으로 바꿔 저장한다. 영감을 좇아 여행을 떠난 적은 없지만, 길 위의 날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또다시 어딘가로 떠나라고, 다시 현재를, 오직 현재를 살아가라고 등을 떠밀고 있다.
<p.82>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여행하는 인간
- 가브리엘 마르셀(철학자)
<p.87>
반면 카프카의 관점을 따르는 출연자도 있다. 카프카는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현대의 복잡한 시스템 속에서 누구도 자신이 어디에 있고, 어디를 향해 가는지를 알기 어렵다는 것, 아니 그 목적지가 과연 존재하기나 하는지조차 모른다고 보았다. 그런 관점에서 선택할 수 있는 태도는 일종의 불가지론이다. 어차피 알 수 없다는 것. 많은 것들이 그저 우연으로 결정된다는 것. 이런 태도로는 불가능한 것을 통제하려는 충동을 줄일 수 있겠지만, 필연적으로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p.108>
내가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우리의 현재를 위협하는 이 어두운 두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이 거듭하여 말한 것처럼 미래에 대한 근심과 과거에 대한 후회를 줄이고 현재에 집중할 때, 인간은 흔들림 없는 평온의 상태에 근접한다. 여행은 우리를 오직 현재에만 머물게 하고, 일상의 근심과 후회, 미련으로부터 해방시킨다.
<p.109>
여행의 경험은 켜켜이 쌓여 일종의 숙성과정을 거치며 발효한다. 한 층에 간접경험을 쌓고 그 위에 직접경험을 얹고 그 위에 다시 다른 누군가의 간접경험을 추가한다. 내가 직접 경험한 여행에 비여행, 탈여행이 모두 더해져 비로소 하나의 여행 경험이 완성되는 것이다.
내 발로 다녀온 여행은 생생하고 강렬하지만 미처 정리되지 않은 인상으로만 남곤 한다. 일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모호한 감정이 소설 속 심리 묘사를 통해 명확해지듯, 우리의 여행 경험도 타자의 시각과 언어를 통해 좀더 명료해진다. 세계는 엄연히 저기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세계와 우리 사이에는 그것을 매개할 언어가 필요하다. 내가 내 발로 한 여행만이 진짜 여행이 아닌 이유다.
<p.117>
이런 환대는 어떻게 갚아야 할까. 언젠가 읽은 여행기에서 나는 답을 발견했다. 저자는 북유럽을 여행하던 중에 버스를 타게 되었는데, 그제야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당황하는 그녀 대신 현지인 할머니가 버스 요금을 내주었다. 나중에 갚겠다고 하자 할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자기에게 갚을 필요 없다, 나중에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발견하면 그 사람에게 갚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환대는 이렇게 순환하면서 세상을 좀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그럴 때 진정한 가치가 있다. 준 만큼 받는 관계보다 누군가에게 준 것이 돌고 돌아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세상이 더 살 만한 세상이 아닐까. 이런 환대의 순환을 가장 잘 경험할 수 있는 게 여행이다.
<p.147>
우리의 정체성은 스스로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타인의 인정을 통해 비로소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p.165>
간혹 입국심사관이 서툰 한국어로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기도 한다. 친절의 포즈 정도로 이해하고 지나가는 사람이 많지만 실은 진짜 한국인인지 간단하게 판별하는 질문이다. 한국인이라면 밝은 표정으로 살짝 미소를 띠며 그 인사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위조된 한국 여권을 가지고 입국하려던 외국인이라면 심상하게 그 인사를 받아넘기지 못할 것이다.
<p.167>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야 그 시기에 내가 겪은 것이 단순한 게임 과몰입이 아니라 가벼운 우울증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 뜻대로 풀리지 않던 시절이면 나는 무엇에든 쉽게 중독되어 자신을 잊기를 바랐다.
<p.178>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사회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때로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p.180>
인간은 이야기를 읽으며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과 대면한다.
<p.197>
이야기는 다르다. 현실과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만 질서가 있다. 제한된 인물들, 특히 주인공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과학자들이 실험실에서 실험을 하듯, 작가들은 현실에서 어지러운 잡음을 제거한 뒤 이를 이야기로 재구성한다. 작가는 이야기를 적절히 통제하여 독자들이 이를 경험할 수 있도록 제공한다. 소설이나 영화에서도 별똥별은 운석이 되어 지붕 위로 떨어질 수 있지만, 현실과 달리 이런 사건들은 주인공의 삶과 인생에 중대한 의미를 부여한다. 이야기를 통해 인간은 현실에서 무질서하게 일어나는 여러 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배운다. 죽음과 재난, 사랑과 배신 같은 일들이 우리 의지와 무관하게 닥쳐올 때,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지켜내야 하고 그럴 때 이야기가 우리에게 심리적 틀을 제공하는 것이다.
<p.200>
지금도 나는 비행기가 힘차게 활주로를 받차고 인천공항을 이륙하는 순간마다 삶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는 기분이 든다. 휴대전화 전원은 꺼졌다. 한동안은 누군가가 불쑥 전화를 걸어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모든 승객은 안전벨트를 맨 채 자기 자리에 착석해 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어지러운 일상으로부터 완벽하게 멀어지는 순간이다. 여행에 대한 강렬한 기대와 흥분이 마음속에서 일렁이기 시작하는 것도 그때쯤이다. 내 삶이 온전히 나만의 것이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되는 것도 바로 그 순간이다.
뉴욕 시절에 아내가 말했던 그 '여행'은 아마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했을 것이다. 어느새 뉴욕에서의 생활도 말 그대로 생활이 되어가고 있었다. 일상은 파도처럼 밀려온다. 해야 할 일들, 그러나 미뤄두었던 일들이 쌓여간다. 언젠가는 반드시 처리해야 할 일들이다. 일상에서 우리는,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듯 통제력을 조금씩 잃어가는 느낌에 시달리곤 한다. 조금씩 어떤 일들이 어긋나기 시작한다.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생긴다. 욕실에 물이 샌다거나, 보일러가 낡아서 교체해야 한다거나, 옆집이 인테리어 공사에 들어가 너무 시끄러워진다거나 하는 일들. 여행자는 그렇지 않다. 떠나면 그만이다. 잠깐 괴로울 뿐,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는다. 그렇다. 어둠이 빛의 부재라면, 여행은 일상의 부재다.
<p.203>
누군가를 만나 내 직업을 밝히면 많이 듣는 얘기가 있다. '여행 많이 다니시겠어요. 너무 좋겠다.' 혹은 '어디 어디 가보셨어요? 어디가 제일 좋았어요?' 같은 말이다. 전자의 질문은 나를 '여행 좋아하는 사람'으로, 후자의 질문은 나를 '여행 잘 아는 사람'으로 염두에 두고 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과연 나는 그런 사람일까? 이 책을 3년 만에 다시 읽으며 여행에 대해서도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되었다.
조종사나 승무원처럼 해외에 자주 나가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긴 비행으로 몸이 피곤해도 꼭 시간을 내어 그 나라의 명소나 맛집을 가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람 사는 건 다 비슷비슷하다며 푹신한 침대가 있는 호텔에서 피로를 풀고자 하는 사람. 앞의 사람은 잠깐이라도 시내에 나가 사람 구경도 하고 바람도 쐬어야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다면 뒤의 사람은 호텔에서 본인의 루틴을 지키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야 에너지가 충전되는 것이다. 때때로 전자는 후자를 두고 호텔에만 있는 건 시간 낭비다, 이 좋은 기회에 바깥에 나가서 더 많은 경험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 등의 얘기를 한다. 그러면 후자는 전자를 두고 이미 구경은 한 번 해서 볼 건 다 봤다, 또 나가는 건 시간과 돈과 체력의 낭비다 등의 얘기를 하며 가벼운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논쟁의 결론은 'agree to disagree'이다. 서로 다른 것뿐이지,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난 몇 년 간의 내 삶을 돌이켜봤을 때 나는 후자에 더 가까운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런 내게도 최근에 시간을 내어 시내로 나가는 것의 즐거움을 알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 나라 혹은 그 지역의 도서관, 서점을 찾아가는 일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 도서관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일종의 수집욕까지 생기면서 비행을 갈 때마다 그 곳의 도서관이나 서점을 알아보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호텔에서부터 도서관까지 교통편은 어떻게 되며, 도서관에 들렀다 주변에 갈 만한 곳이 있는지, 중간에 점심은 어디서 어떻게 먹을지 등에 대한 계획을 세우자 그것만으로도 근사한 하루치 여행 계획이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은 꽤나 좋은 여행이었다. 도서관에 갔다가 오는 단순한 여정이지만 그 속에서 대중교통을 타고 그 나라 사람들을 구경하고, 낯선 도시를 헤매며 걷고, 뜻밖의 사람들을 만나고 의외의 재미를 찾게 된 것이다. 때로는 오히려 긴 여정 끝에 도착한 도서관은 별 볼일 없었는데 근처에서 먹었던 점심 식사나 오는 길에 들렀던 공원이 기가 막히게 좋았던 경우도 있었다. 결국 여행의 목적은 그 곳에 도착하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그곳으로 가는 여정이 진짜 여행이었던 것이다. 여러 도서관에 가보고 싶다는 단순한 목적 덕에 여행을 하게 되고 그 속에서 재미와 의미를 얻게 된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간 다양한 여행의 목적들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관광 명소 둘러보기, 맛집 가서 맛있는 음식 먹기, 예쁜 카페 가기, 쇼핑하기, 멋진 사진 남기기 등 셀 수 없는 많은 여행의 목적이 있었지만 그중에는 나와 맞지 않는 것들도 많았다. 관광 명소 같은 곳은 한 번이면 족하다고 생각했고, 멋진 사진을 찍는 일도 크게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쇼핑하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고 예쁜 카페도 혼자서 가는 거라면 '굳이'라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알게 되자 그것을 위한 여정이 더 이상 귀찮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껏 내가 피곤한 몸을 일으켜 호텔 밖으로 나서지 않았던 이유는 내가 '호텔에서 쉬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내가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찾지 못해서였을지 모른다. 주변의 동료들 중에는 커피를 좋아하거나, 위스키를 좋아하거나, SNS를 열심히 하기 때문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 과거에는 어디서 저런 에너지가 나오는지 궁금했었는데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각자의 고유한 목적을 위해 떠난 여정 속에서 보고 듣고 겪은 경험들이 다양한 여행의 기록으로 남았을 거라고 생각하니 부러운 마음도 든다. 그런 걸 보면 여행을 한다고 밖으로만 나갈 것이 아니라 내가 뭘 좋아하고, 뭘 원하는지를 찾는 내면세계로의 여행이 먼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지에 대한 탐구, 그것을 목적으로 떠난 여정, 여행의 본질은 목적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 속에 있다는 깨달음. 진부한 말이지만 삶과 여행은 이런 점에서 닮은 모습을 띤다. 요즘 들어 삶이 어딘가 심심하고, 에너지가 없음을 느낀다면 그것은 목표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목표를 이뤘거나 더 이상 이룰 필요가 없다면 남은 삶을 즐기면서 편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삶은 목표가 있어야 그 과정이 즐거운 여행이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최근 몇 년간 어딘가 무기력해진 내 일상이 마치 호텔의 푹신한 침대 위에 있는 것과 같았다면 세계 곳곳의 도서관을 가본다는 단순한 목적이 나를 호텔 밖으로 끌어낸 것처럼 단순하지만 정말로 좋아하는 삶의 내적 동기가 내게도 생기기를 기대해본다.
끝으로 아래는 내가 2020년 같은 책을 읽고 네이버 블로그에 남겼던 글이다. 기록해두고 싶어서 여기에 남긴다. 그때는 이런 생각을 했었나보다.
김영하 작가가 생각하는 여행의 이유를 적은 산문. 여행의 시대이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여행을 참 많이도 다닌다. 자유 여행도 있고, 패키지 여행도 있고, 여행지에서 동행을 찾아 같이 다니는 여행도 있다. 어쩌다 갑자기 이렇게 다들 여행을 떠나게 되었을까? 아마도 국민 소득의 향상으로 더 이상 의식주에만 매달리는 삶이 아닌 여행과 같은 경험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 늘어났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여행이 일종의 고급 취미나 사치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큰 돈을 주고 남들이 쉽게 가지 못 하는 곳에 가서 사진을 찍고 이를 자랑하는 모습이 마치 값비싼 한정판 명품백을 사서 매고 다니는 모습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가끔 농담으로 값비싼 명품백을 든 사람에게 명품백을 모시고 다닌다고 말한다. 또 값비싼 신발을 신기가 아까워 집에만 두고 있거나 밖에서 신을 때는 비닐을 덧씌우는 사람들이 있다. 가방과 신발의 기능적 가치는 사라진 것이다. 처음 살 때도 매고 다니기 편한지, 신어도 발이 아프지 않는지 등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매거나 신을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행도 우르르 몰려가 사진 한 장 찍고 다시 우르르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여행이 있다. 어떻게든 좋은 구도로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 30분씩 줄서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동 중간에는 아침 일찍부터 움직이기 시작한 데에 시차까지 더해져 버스에서 자기 바쁘다. 그리고 여행이 끝나면 찍은 사진들을 예쁘게 편집하여 SNS에 올린다. 이 사람들에게는 주어진 시간에 얼마나 많은 명소에 들르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지가 중요했을 것이다. 여행 할 목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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