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한 도시를 아는 편리한 방법은 거기서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사랑하며 어떻게 죽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p.12>
물음: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답: 시간의 길이를 구체적으로 체험할 것.
방법: 치과 병원 대기실에서 불편한 의자에 앉아 여러 나절을 보낼 것. 일요일 오후를 자기 방 앞의 발코니에서 보낼 것.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어로 하는 강연을 경청할 것. 가장 길고 가장 불편한 철도의 코스를 골라 가지고 물론 입석으로 여행할 것. 공연장의 매표구 앞에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차례가 오면 표를 사지 말 것 등등.
<p.40>
재앙이란 모두가 다 같이 겪는 것이지만 그것이 막상 우리의 머리 위에 떨어지면 여간해서는 믿기 어려운 것이 된다.
<p.54>
특히 모든 우리 시민들은 이별의 기간이 얼마나 될지 헤아려 보던 습관을 아주 빨리, 심지어 공공연하게 떨쳐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왜냐하면, 가장 비관적인 사람들이, 예를 들어서 그 기간을 육 개월로 정하고서 장차 그 육 개월 간에 닥쳐올 모든 고초를 미리 다 맛볼 대로 맛보고 나서, 가까스로 그러한 시련의 경지에 걸맞도록 용기를 키우고, 그토록 오랜 세월에 걸친 고통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버티기 위해 마지막 힘을 다하고 있다가도, 어쩌다 우연히 만난 친구라든가, 신문에 실린 전망이라든가, 근거 없는 의혹이라든가, 혹은 불현듯이 생기는 통찰이라든가 하는 것 때문에 결국은 그 유행병이 육 개월 이상 가지 말라는 법도 없으며, 아마 일 년, 또는 그 이상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 말이다.
<p.99>
만약 우리들 중 누가 우연히 자기 내심을 털어놓거나 모종의 감정을 말해도, 그 사람이 받을 수 있는 대답은 어떤 종류건 간에 대개는 마음을 아프게 하는 대답이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상대방과 자기가 서로 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었다. 사실 그는 오래 두고 마음속에서만 되씹으며 괴로워하던 끝에 그 심정을 표현한 것이었으며, 그가 상대방에게 전달하고자 한 이미지는 기대와 정열의 불 속에서 오래 익힌 것이었다. 그와 반대로 상대방은 습관적인 감동이나 시장에 가면 살 수 있을 상투적인 괴로움이나, 판에 박힌 감상 정도로 상상하는 것이다. 호의에서건 악의에서건 그 응답은 언제나 빗나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단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더 이상 침묵을 견딜 수 없게 된 사람들의 경우, 남들이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쓸 줄 모르게 된 이상, 자기들도 결국 시장에 굴러다니는 말을 쓰고, 그들도 역시 상투적인 방식으로, 단순한 이야기나 잡보, 이를테면 일간지 기사 비슷한 말투로 이야기하고 마는 것이었다.
그 경우에도 가장 절실한 슬픔이 흔해 빠진 대화의 상투적 표현으로 변해 버리기 일쑤였다. 페스트의 포로가 된 사람들은 바로 그러한 대가를 치르고서야 겨우 아파트 수위의 동정이나 옆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가 있었던 것이다.
<p.104>
잠시 후, 의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 신문기자의 행복에 대한 조바심에도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리유에 대한 그의 비난은 정당했던가? '선생님은 추상적입니다.' 페스트가 더욱 성해져서 일주일에 사망 환자 수가 평균 오백 명에 달하고 있는 병원에서 보낸 그날들이 정말로 추상적이었을까? 그렇다, 불행 속에는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일면이 있다. 그러나 추상이 우리를 죽이기 시작할 때에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 추상과 대결해야 한다.
<p.120>
"선생님 자신은 신도 믿지 않으시면서 왜 그렇게까지 헌신적이십니까? 선생니의 답변이 제가 대답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늘에서 얼굴을 내밀지도 않은 채 의사는 그 대답은 이미 했으며, 만약 어떤 전능한 신을 믿는다면 자기는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것을 그만두고 그런 수고는 신에게 맡겨 버리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심지어는 신을 믿는다고 생각하는 파늘루까지도, 그런 식으로 신을 믿는 이는 없는데, 그 이유는 전적으로 자기를 포기하고 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며, 적어도 그 점에 있어서는 리유 자신도 이미 창조되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거부하며 투쟁함으로써 진리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p.170>
"그런데, 타루." 그가 말했다. "뭣 때문에 이런 일에 발 벗고 나서지요?"
"나도 모르죠. 아마 나의 윤리관 때문인가 봐요."
"어떤 윤리관이지요?"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p.175>
절망에 습관이 들어 버린다는 것은 절망 그 자체보다 더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p.238>
그래도 시간이 경과하면서 자연적으로 식량 보급이 어려운 지경에 이름에 따라 이 외에도 여러 가지 불안한 문제점들이 있었다. 게다가 투기가 성행해서, 일반 시장에 부족한 가장 긴요한 생활필수품들이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팔렸다. 그래서 빈곤한 가정은 무척 괴로운 처지에 놓였지만, 반면에 부유한 가정들은 부족한 것이라곤 거의 없었다. 페스트가 그 역할에서 보여 준 것 같은 효과적 공평성으로 말미암아 시민들 사이에 평등이 강화될 수도 있었을 텐데, 페스트는 저마다의 이기심을 발동시킴으로써 오히려 인간의 마음속에다 불공평의 감정만 심화한 것이었다. 물론 죽음이라는 완전무결한 평등만은 남아 있었지만 그런 평등은 아무도 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처럼 굶주림에 시달리는 빈곤한 사람들은, 전보다 더한 향수에 젖어 생활이 자유롭고 빵이 비싸지 않은 이웃 도시들과 시골들을 그리워했다.
<p.308>
'그러나 가장 나쁜 것은, 그것은 그들이 잊힌 사람들이라는 사실과 그들 역시 그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을 아는 사람들도 다른 생각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 생각을 잊고 있는바, 그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역시 그들을 거기서 끌어내기 위한 운동이나 계획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 생각을 잊어버렸던 것이다. 끌어내는 일에 급급해서, 끌어내야 할 사람에 대해서는 잊고 마는 것이다. 그것도 역시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결국에 가서는, 비록 불행의 막바지에 이른 경우라 할지라도 어떤 사람을 정말로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을 정말로 생각한다는 것, 그것은 어느 순간에도 결코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살림 걱정도 안 하고, 날아다니는 파리도 안 보이고, 밥도 안 먹고, 가려움도 안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리라든가 가려움이라든가 하는 것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래서 인생은 살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p.313>
나는 인간의 모든 불행은 그들이 정확한 언어를 쓰지 않는 데서 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p.330>
이 책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이러하다. 알제리의 해안 도시 오랑에서 피를 토하며 죽는 쥐떼를 시작으로 사람들 사이에 페스트가 발병한다. 이에 오랑은 그 누구도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없는 고립된 도시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이 책은 페스트가 치료되고 외부와의 단절이 끝날 때까지 도시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책에는 여러 인물이 등장하지만 주요 등장인물들은 이러하다. 주인공이자 서술자인 리유는 의사로서 민간 보건대를 결성하여 페스트 치료를 위한 본인의 역할을 다 한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10대 때 가출하여 줄곧 오랑에 산 타루는 리유를 도와 보건대를 결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시에서 말단 서기로 근무하는 그랑은 눈에 띄지는 않지만 성실하게 보건대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신문기자로서 잠시 오랑에 머물다 갇혀 버린 랑베르는 처음에는 어떻게든 오랑을 빠져나가려고 노력하지만 결국은 마음을 바꾸고 보건대에 참여하여 사람들을 돕는다. 코타르는 페스트로 도시가 혼란해진 틈을 타 이득을 취하는 인물이다. 파늘루 신부는 페스트가 하느님이 죄인에게 내리는 벌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느 날 어린아이가 페스트에 걸려 고통스럽게 죽는 모습을 보고 고뇌에 빠진다.
이 책을 읽고 같은 작가의 다른 책 <이방인>을 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인물의 심리와 상황 묘사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 페스트라는 질병을 대하는 군중들의 태도와 심리가 시간이 흐르면서 어떻게 달라지는지, 도시 전체를 감싸는 음울한 분위기를 어떤 방식으로 표현했는지, 주요 등장인물들의 대화 속에 개개인의 가치관을 어떻게 담아냈는지 등이 인상적이었다. 개별 사건들에 대한 묘사가 치밀했던 것 때문인지, 페스트라는 재난을 다룬 것 치고는 발병부터 확산, 치료, 고립 해제까지 그 전개가 매우 빠르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금세 한 권의 소설을 읽을 수 있었다. 특히 오통 판사의 어린 아들이 페스트에 걸려 고통 끝에 죽는 것을 모두가 지켜보며 하룻밤을 보내는 장면과 군중들이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연극을 보다가 쓰러진 가수의 모습에 하나둘 헐레벌떡 공연장에서 도망치는 장면이 압권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겪은 코로나 바이러스 시절을 떠올리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점은 이 책이 지금으로부터 76년 전에 쓰였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작가가 전염병을 직접 겪은 일도 아니다. 만약 페스트가 창궐한다면... 하고 상상해서 쓴 소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많은 부분에서 몇 년 전 우리가 실제로 겪은 팬데믹 사태와 비슷한 모습이 있었다. 이 말은 곧 재난이 닥쳤을 때 인간이 경험하는 불안과 행동양식은 시대와 상관없이 비슷한 모습을 띄며, 또 이것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통해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는 뜻이리라. 과학 기술과 문명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불가항력의 재난 속에서 인류는 속수무책으로 늘 비슷한 행동양식을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왠지 허무했다. 특히 이성으로 이룩한 윤리와 사회 제도가 인간의 생존 욕구와 본능이 위협받는 순간에는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는 점과 그간 우리가 그런 것들을 앞세워 인간과 동물을 구분 지으며 우월감을 느껴왔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졌다. 생존의 위협과 본능적 욕구 앞에서는 결국 인간도 원시 상태의 동물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도덕과 윤리를 지키고 남에게 선을 행하며 그에 따른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건 우리가 먹고살만한 상태에 있기에 가능한 걸까?
이 글을 쓰며 생각해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많은 디스토피아 소설에서도 그렇고, 실제 역사적 사례를 돌아봤을 때도 전쟁이나 재난, 기근, 전염병의 순간에도 나보다 남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소설 속에는 페스트에 걸릴 위험을 무릅쓰고 병에 걸린 사람들을 돕는 리유와 보건대 사람들이 있다. 전쟁의 시기에도 다친 군인을 돕는 사람들이 있고, 고아가 된 아이들을 거두어 기르는 사람들이 있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식량을 남에게 나누는 사람들이 있다. 이미 세상은 혼돈과 무질서의 상태가 되었음에도 그 속에서 선을 행하고 개인의 윤리와 신념을 지키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분명 인간과 동물을 구분 짓게 하는 모습일 것이다. 사회적 약속으로써 법과 제도가 존재하지 않아도 개인의 양심과 가치관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대단히 어려운 일이기에 도덕과 윤리의 밑바닥에 처하는 상황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사람들의 본모습을 알 수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만약 내가 오랑에 있었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아니 그렇게 멀리 갈 것도 없이 작년, 재작년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계를 뒤덮었을 때 나는 어떤 삶을 살았나. 나를 포함한 우리들은 어떻게 행동했었나. 생존 욕구와 본능에 충실한 나머지 도덕과 윤리는 마음 한 켠으로 미뤄놓았던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치관을 지키고 선을 행하고자 노력했던가. 시간이 흐르고 전염병의 위협에서 벗어난 지금, 과거를 생각했을 때 스스로 당당할 수 있는지 아니면 내 밑천을 드러낸 것 같아 부끄러운지는 아마 자기 자신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어땠는지 스스로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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