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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누구인가 > 강신주 외, 2016

by Ditmars 2023. 5. 31.

<나는 누구인가> 강신주 외, 2016

 

 자의식은 쉽게 말해 인정 욕망이면서 동시에 자신에 대한 의식으로 하루 종일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를 생각하고 그것이 내 안의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타인이 곧 나를 비추는 거울인 셈이지요. 그런데 이때 그 타인의 기준이란 것이 아주 명확합니다. 바로 돈 많고, 예쁘거나 잘생기고, 스펙 좋고 등의 성공한 사람입니다. 이는 곧 화폐의 지배입니다.
 이 거울을 통해 자신을 비추어보면 어떤 느낌이 들까요. 무능력하고 무기력하고 보잘 것 없을 것입니다. 능력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살면 되는데 외부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다 보니 그렇게 살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정신적으로 지나치게 비만이어서 욕망과 능력이 극단적으로 분화되기 때문입니다.

<p.56>

 

 설령 다행히 짝을 만나 결혼을 했더라도 집, 땅, 차에 대한 끝없는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서로에게 점점 더 큰 요구를 하다 보면 결국 상처투성이가 되고 맙니다. 그 많은 가구와 전자 제품으로 많은 육체노동에서 해방되었음에도 우리는 이 행복을 누리는 방법을 모릅니다. "행복도 훈련받아야 한다."는 니체의 말이 실감날 정도입니다.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스스로 한없이 추락하면서 그 감정을 상대의 탓으로 돌립니다. 자책과 원한이 끝없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수많은 트라우마의 원천입니다.

<p.66>

 

 보통 화폐는 매개를 통해 초월적인 존재가 됩니다. 내가 화폐에 집착하는 순간, 돈은 수단의 역할에서 벗어나 나를 지배하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자기 지배력을 가진 화폐, 즉 자본은 무조건 증식합니다. 멈추는 경우가 없습니다. 돈에는 삶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느냐'라고 말할 때의 돈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돈이 목적이 되지 않으려면 돈을 어떻게 벌고,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서사가 담겨 있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액수가 전부인 돈이 아니라 스스로 어떤 성취를 이루었는지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삶의 서사가 없을 때의 돈은 맹목적인 욕망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 결과 자본이 되어 모두를 파멸시키거나, 간신히 살아남는다 해도 주변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p.70>

 

 그렇다면 인문학이 추구하는 기본 가치는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는 인문학적 삶을 통해서 삶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까요? 저는 인문학이 추구하는 기본 가치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것은 나 자신에게 진실된 삶, 이웃과 더불어 사는 도덕적인 삶, 그리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멋진 삶과 의미 있는 죽음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p.92>

 

 음식도 지금 먹는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음미하면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습니다. 마치 굶주린 짐승이 먹이를 삼킬 때처럼 허겁지겁 먹어 치우기만 해서는 음식 맛을 즐길 수 없습니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로 그저 허겁지겁 살아버리면 사는 맛을 알 길이 없겠지요. 살면서 서로 사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야 제대로 사는 것입니다.

<p.139>

 

 하지만 질문은 그냥 질문입니다. 질문이 생겼다는 것은 내 안에 관심과 호기심이 작동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질문을 했다는 사실에 의미가 있는 것이지, 질문 자체에 옳고 그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옳고 그름이라는 것은 항상 이미 정해져 있는 것, 이미 확고하게 뿌리내리고 있는 것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를 따지는 일입니다. 그런데 인류 역사상 모든 창조적인 것, 새로운 것은 다 엉뚱한 질문에서 나왔습니다. 질문의 가치는 질문하는 그 자체에 있지 거기에 절대 옳고 그름이 있지 않습니다. 질문은 질문으로 터져나온 것만으로 이미 완벽합니다.

<p.206>

 

 항상 자신이 지켜야 하는 가치와 이념의 기준을 외부에 두고 있는 사람이나 사회는 자신이 직접 기준의 생산자로 등장하는데 상당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기준의 수행자가 아니라 기준의 생산자가 되어보겠다는 것입니다. 이 외부의 기준은 항상 보편성이나 객관성으로 무장한 채 우리를 지배합니다. 외부에 기준을 두고 있는 개인들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고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 개인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영역은 항상 이삿짐처럼 초라해보입니다. 아무리 값비싼 가구나 살림살이도 이사를 가기 위해 밖으로 드러내놓는 순간 초라해지고 맙니다. 집 안의 있어야 할 곳에 자리하고 있을 때는 그럴 듯하고 멋들어져 보이던 살림도 집 밖으로 나앉아 누구나 쪼이는 햇볕 아래 놓이면 왜 그렇게 초라해보일까요.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보편적인 기준에 견주었을 때 부족하지 않은 인간이 없고, 죄인 아닌 인간이 없고, 결함 없는 인간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결국 이삿짐처럼 초라해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p.208>

 

 하지만 성인의 말씀은 모두가 성인이 경험한 사건의 결과물입니다. 우리가 혁신을 이야기하는 목적은 혁신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혁신이라는 사건을 담당하는 주인이 되는 것이지요. 다이어트에 대해 연구하고 고민하는 거은 나 스스로 직접 다이어트라는 사건의 참여자, 다이어트라는 사건을 일으키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알고 있으면서 그 아는 것으로부터 나의 사건을 추동하지 못할까요. 사건을 구성하고 있는 세상은 관념이 아니라 일상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일상의 세계에는 '우리'가 아닌 '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보편적 이념으로 나아가는 데는 목숨을 걸면서 내가 직접 살고 있는 일상을 관리하는 데는 소홀합니다. 왜 '우리'로 사는 데는 적극적이면서 '나'로 사는 데는 소홀할까요. 왜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다이어트 이론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그것을 나의 사건으로 만드는 데는 힘이 없는 것일까요.
 이는 사건을 담당할 주체로서의 '이론'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담당할 주체로서의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저는 '주체력'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신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가 공유하는 보편적 이념에 해락하고 그 보편적 이념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고유한 활동성을 가지고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나만의 고유한 힘, 나만의 고유한 욕망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사건으로 발동시킬 수 있는지가 자신의 주인으로 살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합니다.

<p.215>

 

 철학자 함석헌 선생은 "자기로부터의 혁명"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나라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강력한 인상을 줄 만한 학생운동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사람들은 모두 정의와 도덕으로 무장되어 있었지요. 그렇다면 그들이 졸업을 했을 때 사회로 진출한 그 학생들의 숫자만큼 우리 사회에는 정의와 도덕의 양이 증가했을까요. 정의와 도덕의 질이 높아졌을까요. 함석헌 선생의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혁명을 하는 개별자들이 혁명되지 않은 채 혁명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혁명이라는 모든 사람이 공감하는 이념을 수행만 했지 혁명가가 혁명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함석헌 선생은 "자기로부터의 혁명"이라는 따끔한 교훈을 만들어냅니다.

<p.219>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많은 책을 읽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책을 읽는 것은 언젠가 나도 책을 쓸 수 있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읽는 행위 속에는 읽기와 쓰기가 교차되어 있습니다. 책을 쓴다는 것은(여기서 쓴다는 표현은 반드시 글로 쓴다는 의미만이 아닙니다) 자신을 표현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말을 듣는 행위 역시 우리가 말을 하기 위해서이며, 우리가 열심히 공부를 하는 것도 언젠가는 나도 가르칠 수 있는 입장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읽는 행위에는 쓰기가 교차되어 있고, 듣는 행위에는 말하기가 교차되어 있으며, 배우는 행위에는 가르치기가 교차되어 있습니다.
 살아가는 일은 정해진 것을 수용하는 것도 아니요, 정해진 것을 학습하는 것도 아니요, 정해진 것을 실천하는 것도 아닙니다. 한 번이라도 내가 그것들을 정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나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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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상하게도 오래전부터 스스로에게나 남에게나 '본인의 철학대로 하라'는 말을 자주 해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지금도 아무것도 모르지만) 중고등학생 때도 공부를 할 때 철학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했었고, 대학생 때 멘토링을 하면서도 본인 철학대로 살라는 말을 했었고, 조종사가 된 지금도 가끔 후배들이 비행에 관한 질문을 할 때면 본인 철학대로 하라는 말을 한다. 철학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철학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쓴 건 그 안에 심오한 뜻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나는 누구나 흔히 얘기하는 본인의 주관대로 하라는 말을 그렇게 표현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말과 유사한 말들이 있다. '그냥 해' 나 '맘대로 해' 같은 말이다. 그러나 앞의 두 말과 '철학대로 해'라는 말은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봤을 때 상당히 다른 말이다. 예를 들어, '그냥 해'는 군대에서 자대 배치를 받은 신병에게 선임이 생활관 청소를 하라고 했을 때 쓸 수 있는 말이다. 생각 없이 하라는 뜻이다. '맘대로 해'는 생활관 청소를 마친 신병을 PX에 데려가 아이스크림을 고르라고 했을 때 쓸 수 있는 말이다. 기분대로 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철학대로 해'는 군대에서는 쓰기가 쉽지 않지만 굳이 예를 든다면 아이스크림을 다 먹은 신병이 '앞으로 저 군생활 어떻게 해야 하나요' 같은 질문을 했을 때 쓸 수 있는 말이다. 평소의 주관, 가치관, 신념, 생각하는 대로 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철학대로 해' 라는 말은 상대방에게 하기도 어렵고, 듣는 사람도 썩 내키지 않은 말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말 속에는 말하는 사람의 권한과 책임의 이양이 담겨 있고, 듣는 사람에게는 주체적인 사고와 행동이 기대되기 때문이다. 말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자칫 무책임한 발언이 될 수도 있고 무엇보다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쉽게 쓸 수 없는 말이다. 듣는 사람도 부담인 건 마찬가지다. 평소 주관이 뚜렷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선택의 자유와 책임의 무게에 오히려 '그냥 해'라는 말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요즘은 철학적으로 하라는 말을 사용하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주관을 갖기 어려운 세상이다. 말하는 사람은 그 나름대로 상대방의 주관을 존중하고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려워졌다. 듣는 사람도 자유를 포기하는 대가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차라리 편해졌다. 사회 전체가 효율성과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보니 개인의 주관이나 신념, 가치관이 있어야 할 자리는 권위나 눈치, 핑곗거리로 대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서 나온 철학은 강한 힘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잘 다듬어진 각자의 철학은 다른 사람의 권위에 기대지도 않고 주변 사람의 눈치도 보지 않으며 급속한 세상의 조류에도 꿋꿋이 서 있을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 생각은 내가 스스로 주관을 가지고 뭔가를 해야 할 때도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훗날 내가 누군가에게 일을 맡기거나 시켜야 하는 때가 되었을 때 더 큰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을 믿고 상대방의 철학을 존중하는 것, 그것은 또 다른 나의 철학에 대한 존중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