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에서 발생하는 에피소드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씹을 줄만 알았지 즐기는 법은 전혀 배우지 못한 것이었다. 에피소드란 맹랑한 것이 아니라 명랑한 것임에도.
<p.11>
이십대란 나이는 무언가에게 사로잡히기 위해서 존재하는 시간대다. 그것이 사랑이든, 일이든 하나씩은 필히 사로잡힐 수 있어야 인생의 부피가 급격히 늘어나는 것이다.
<p.17>
우리들은 남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납득할 수 없어한다.
<p.21>
내 인생은 나의 것이지만, 그러나 진모에게는 누나의 인생이기도 하고 어머니에게는 딸의 인생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진모의 인생은 나의 남동생의 인생이다. 주체를 나로 놓고 보면, 그러면, 중요도가 확 달라진다. 조용히 입 다물고 구경만 할 수는 없다. 내 인생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나의 남동생의 인생도 가끔씩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다고 크게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p.52>
"사랑이란... 사랑이란 말이야. 사랑에 빠지지 않겠다고 조심 또 조심을 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 것처럼, 영원무궁토록 사랑하겠다고 아무리 굳은 결심을 해도 내 마음대로 되지가 않는 것이야. 사랑이란 그런 것이라고, 알아?"
<p.58>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p.127>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억울하다는 생각만 줄일 수 있다면 불행의 극복은 의외로 쉽다.
<p.188>
사랑하지 않고 스쳐 갈 수도 있었는데,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걸음을 멈춰준 그 사람이 정녕 고맙다고.
<p.191>
나영규에게는 없는 것, 그것이 확실히 김장우에게는 있었다. 나영규와 만나면 현실이 있고, 김장우와 같이 있으면 몽상이 있었다. 사랑이라는 몽상 속에는 현실을 버리고 달아나고 싶은 아련한 유혹이 담겨있다. 끝까지 달려가고 싶은 무엇, 부딪쳐 깨지더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무엇, 그렇게 죽어버려도 좋다고 생각하는 장렬한 무엇. 그 무엇으로 나를 데려가려고 하는 힘이 사랑이라면, 선운사 도솔암 가는 길에서 나는 처음으로 사랑의 손을 잡았다.
<p.195>
사랑은 그 혹은 그녀에게 보다 나은 '나'를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의 발현으로 시작된다. '있는 그대로의 나'보다 '이랬으면 좋았을 나'로 스스로를 향상시키는 노력과 함께 사랑은 시작된다. 솔직함보다 더 사랑에 위험한 극약은 없다. 죽는 날까지 사랑이 지속된다면 죽는 날까지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절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지 못하며 살게 될 것이다. 사랑은 나를 미화시키고 나를 왜곡시킨다. 사랑은 거짓말의 유혹을 극대화시키는 감정이다.
<p.218>
단조로운 삶은 역시 단조로운 행복만을 약속한다. 지난 늦여름 내가 만난 주리가 바로 이 진리의 표본이었다. 인생의 부피를 늘려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애쓰는 불행이라는 중요한 교훈을 내게 가르쳐준 주리였다. 인간을 보고 배운다는 것은 언제라도 흥미가 있는 일이었다. 인간만큼 다양한 변주를 허락하는 주제가 또 어디 있으랴.
<p.229>
한 번 더 강조하는 말이지만 이모부는 심심한 사람일지는 몰라도 절대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돌출을 못 견뎌하고 파격을 혐오한다고 해서 비난받아야 한다는 근거가 어디 있는가. 어쩌면 나는 이모의 넘쳐나는 낭만에의 동경을 은근히 비난하는 쪽을 더 쉽게 선택하는 부류의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이모부 같은 사람을 비난하는 것보다는 이모의 낭만성을 나무라는 것이 내게는 훨씬 쉽다. 그러나 내 어머니보다 이모를 더 사랑하는 이유도 바로 그 낭만성에 있음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랑을 시작했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미워하게 된다는, 인간이란 존재의 한없는 모순...
<p.232>
인간에게는 행복만큼 불행도 필수적인 것이다. 할 수 있다면 늘 같은 분량의 행복과 불행을 누려야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라고 이모는 죽음으로 내게 가르쳐주었다. 이모의 가르침대로 하자면 나는 김장우의 손을 잡아야 옳은 것이었다.
그러나 역시 이모의 죽음이 나로 하여금 김장우의 손을 놓아버리게 만들기도 했다.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하게 보였던 이모의 삶이 스스로에겐 한없는 불행이었다면,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들에게 불행하게 비쳤던 어머니의 삶이 이모에게는 행복이었다면, 남은 것은 어떤 종류의 불행과 행복을 택할 것인지 그것을 결정하는 문제뿐이었다.
나는 내게 없었던 것을 선택한 것이었다. 이전에도 없었고, 김장우와 결혼하면 앞으로도 없을 것이 분명한 그것, 그것을 나는 나영규에게서 구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이모가 그토록이나 못 견뎌했던 '무덤 속 같은 평온'이라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울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이독경, 사람들은 모두 소의 귀를 가졌다.
<p.297>
새삼스런 강조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이란 누구나 각자 해석한 만큼의 생을 살아낸다. 해석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사전적 정의에 만족하지 말고 그 반대어도 함께 들여다볼 일이다. 행복의 이면에 불행이 있고, 불행의 이면에 행복이 있다. 마찬가지다. 풍요의 뒷면을 들추면 반드시 빈곤이 있고, 빈곤의 뒷면에는 우리가 찾지 못한 풍요가 숨어있다. (...)
작가란 주어진 인생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현실을 소설 위에 세우기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허구의 이야기를 통해서 한 번뿐인 삶을 반성하고 사색하게 하는 장르가 바로 소설이라고 나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여일하게 믿어왔다. 남의 소설을 읽을 때나 내 소설을 쓸 때도 나는 이 기본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주어진 인생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이야기와 새로운 현실에서 얻은 감동을 더불어 나눌 수 있는 세상, 그것이 바로 작가가 꿈꾸는 세상이다.
<p.304, 작가의 말>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아마 고등학생 때 이 책을 한 번 읽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도서관에 꽂혀 있는 이 책을 봤을 때 제목이 낯이 익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도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예전에 이 책을 한 번 읽어봤었다는 확신을 주는 문장이 있었다. "사랑이란... 사랑이란 말이야. 사랑에 빠지지 않겠다고 조심 또 조심을 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 것처럼, 영원무궁토록 사랑하겠다고 아무리 굳은 결심을 해도 내 마음대로 되지가 않는 것이야. 사랑이란 그런 것이라고, 알아?" 이 문장에 다다랐을 때 이 문장이 옛날에 내가 노트에 적어놓았던 그 문장임을 기억할 수 있었다. 아아 사랑을 글로 배우던 시절이었다.
이 책은 쌍둥이 자매인 안진진의 어머니와 이모의 삶을 통해, 그리고 안진진의 삶과 연애를 통해 삶의 모순과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는 재밌는 소설이다. 영화 <타짜>에서 '이 바닥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원수도 없다'라고 했었던가. 이 책을 읽은 뒤에는 '삶에는 영원한 행복도, 영원한 불행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은 공평해서 누구에게나 1인칭 시점으로 주어진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을 사는 사람도, 남들이 불쌍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모두 결국 자신의 삶은 1인칭으로 살아간다. 이 말은 곧 외부에서 바라보는 3인칭의 시선이나 평가가 1인칭 시점의 당사자에게는 의미도 없고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밥 안 먹어도 배부르겠다' 싶은 사람도 끼니때가 되면 배가 고프다. '웃을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겠다' 싶은 사람에게도 웃을 일은 생긴다. 실제로 유명한 연예인이나 대기업 회장이 우울증으로 자살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말기 암 환자를 둔 배우자가 국내 여기저기를 여행하며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보내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결국 겉으로 보이는 삶의 속내는 그 삶을 살아가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마치 겉으로 부족할 게 없어 보이던 안진진의 이모가 소설 속 줄거리의 마지막에 자살을 택한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남들이 부러워하는, 바라는 삶을 살고자 애를 쓴다. 소설 속 안진진도 마찬가지다. 이모는 죽음으로써 이 사실을 안진진에게 알려준다. 그러나 그런 안진진조차 스스로의 한계를 초월하지 못하고 결국 나영규를 선택한다. 결국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어쩔 수 없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조언과 숱한 가르침에도 삶의 본질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끝에 가서야 후회 한다. 이것이 삶의 모순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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