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논증의 아름다움을 구현하려면 꼭 지켜야 하는 규칙 세 가지를 먼저 소개하겠다. 평소 생각하고 말하고 판단할 때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칙이다. 나는 칼럼을 쓰거나 토론을 할 때 최선을 다해 이 규칙을 지킨다. 내게는 일종의 '영업기밀'이지만 알고 보면 기밀이랄 것도 없을 만큼 간단한 규칙이다.
첫째, 취향 고백과 주장을 구별한다. 둘째, 주장은 반드시 논증한다. 셋째, 처음부터 끝까지 주제에 집중한다. 이 세 가지 규칙을 잘 따르기만 해도 어느 정도 수준 높은 글을 쓸 수 있다.
<p.19>
인간은 존재 그 자체가 기적과도 같은 생명체다. 인간은 의식을 가진 존재이며 의식은 뇌에 기거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하지만 뇌를 아무리 잘게 부수어도 의식이란 것을 찾을 수는 없다. 의식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질인 우리 몸이 물질이 아닌 의식을 만들고, 물질이 아닌 그 의식이 거꾸로 물질인 몸을 움직인다고 하니 신기하지 않은가? 게다가 내 의식이 내 몸만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언어로 소통해 타인의 의식에 영향을 줌으로써 타인의 몸까지도 움직인다. 다른 사람도 같은 방식으로 내 의식과 몸을 움직일 수 있다.
<p.21>
위계 조직은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 존엄과 만인의 평등이라는 이상을 버릴 수도 없다. 어떡하든 이상과 현실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조직의 위계를 인격의 위계가 아니라 역할 분담으로 해석하는 관점이다. 조직의 위계와 서열은 인격의 높고 낮음과 관계가 없다. 신분 차이나 지배, 종속 관계도 아니다. 단지 인격적으로 평등한 개개인이 조직 전체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합의에 따라 서로 다른 역할을 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위계 조직 안에서 타인과 관계를 맺고 협력한다. 조직에서 지위와 서열이 낮은 사람을 존중하는 것은 곧 '인간의 평등과 존엄성'이라는 이상을 존중하는 행동이다.
<p.40>
말과 글로 논증하고 토론할 때 지켜야 할 규칙을 이해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렇지만 그 규칙을 지키면서 글을 쓰는 것은 훨씬 어렵다. 이해는 생각만 해도 할 수 있지만 실천은 삶으로 몸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몰라서 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하지만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더 많다. 글쓰기도 그런 것이다.
<p.45>
타고난 소질이 있어도 갈고닦지 않으면 꽃피우지 못한다. 리오넬 메시의 축구 실력이 오로지 타고난 재능 덕분만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고 해서 노력하면 뭐든 다 똑같이 잘 할 수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메시만큼 연습한다고 해서 누구나 메시만큼 공을 찰 수 있는 건 아닌 것처럼, 무슨 일이든 재능이 일정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하다.
<p.50>
독재 정부는 군대와 경찰과 사법기관의 폭력으로 지배하며 폭력에 대한 공포감을 이용해 대중을 통제한다. 폭력과 공포를 이겨내려면 다수 대중이 한꺼번에 일어나 싸워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는 쉽지 않다. 동서고금 어디에도 모든 사람이 이심전심 한날한시에 죽기를 각오하고 궐기한 사례는 없었다. 성공한 혁명은 화려해보이지만 그 뿌리는 언제 어디서나, 참혹한 패배를 예감하면서도 먼저 일어나 싸운 사람들의 희생에 닿아 있다. 자기 자신은 승리의 과실을 맛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인생을 걸고 싸운 사람들이 있었기에 인류는 오늘 이만큼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p.57>
나는 고등학교 교련 시간에 카빈소총 분해 조립을 익혔다. 군대에 가서는 미제 M16소총으로 했다. 요즘은 국산 K2소총으로 할 것이다. 개인용 소총을 1분 안에 분해 조립하는 일은 누구나 다 한다. 그걸 익히지 못하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사람에 따라 속도 차이가 조금 있을 뿐이다. 공작기계를 만들어가 집을 짓는 일도 더 잘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학습과 훈련과 경험이다. 재능이 아니다. 누구든 노력하고 훈련하면 비슷한 수준으로 해낼 수 있다.
<p.59>
정말 하고 싶은 말을 단문으로 일단 내지르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일단 내지르고 난 다음에 차분히 설명하면 된다.
<p.84>
글은 쓴 사람의 인격을 반영하지만 인격 그 자체는 아니다. 글을 자신의 인격으로 여기면 편집자의 수정 요구를 불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
초고를 보여주고, 지적과 비판과 조언을 듣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 반영해서 글을 고치는 것은 나쁠 게 없다. 직업적 글쟁이만이 아니라 글을 쓰는 사람 누구나 그렇게 하는 게 바람직하다. 글을 썼으면 남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혹평을 받더라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혹평도 반갑게 듣고 즐겨야 한다. 그렇게 해야 글이 는다. 남몰래 쓴 글을 혼자 끌어안고만 있으면 글이 늘 수 없다.
<p.93>
독해력을 기르는 방법은 독서뿐이다. 결국 글쓰기의 시작은 독서라는 것이다. 독해력은 글쓰기뿐만 아니라 모든 지적 활동의 수준을 좌우한다. 눈으로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텔레비전을 보거나 강연을 들을 때도 핵심을 잘 파악하지 못한다. 독해력은 체력과 비슷하다. 체력이 부족한 사람은 어떤 스포츠도 잘 할 수 없다. 독해력이 부족한 사람은 글쓰기만이 아니라 논리적 사고를 요구하는 어떤 과제도 잘해내기 어렵다.
<p.100>
말 못하는 아기한테도 자주 말을 걸어주어야 한다. 아기는 부모가 하는 말을 이해하려고 무의식적으로 노력한다. 부모가 다정하게 말을 걸어줄 때 아기의 뇌에서는 행복한 비상사태가 일어난다. 청각신경이 포착한 음성 정보를 해독하고 적절한 대응을 하기 위해 아기의 뇌는 언어를 담당하는 영역에 더 많은 뉴런을 배치하고 교신을 더욱 강화한다. 따라서 반쪽짜리 말을 하는 아이라도 완전한 문장으로 대화해야 한다. '찌찌' '때때' '응가' 같은 반쪽짜리 말을 가르치고, 아이가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부모도 같은 방식으로 말하면 아이의 뇌는 쉬운 숙제를 받은 학생처럼 느긋해진다. 더 많은 신경세포를 배치하고 더 많은 시냅스를 만들어 더 효율적으로 교신하려는 노력을 덜하게 된다.
<p.119>
중학교 첫 2년 동안은 코넌 도일의 <셜록 홈스> 시리즈를 위시해 학교 도서관에 있던 추리소설을 모조리 읽었다. 중학교 3학년이 되어 고교 입시 공부를 시작한 후에는 교과서와 참고서만 팠다. 독서 편력은 일단 멈춤 상태에 들어갔다. 가뭄에 콩 나듯 소설 몇 권을 읽었을 뿐이다. 고등학생 때 읽은 책과 아버지가 권하신 교양서 몇 권과 공부가 잘되지 않을 때 심심풀이로 읽은 세계 명작소설이 전부였다. <좁은 문> <적과 흑> <죄와 벌>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책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독서가 재미있다는 생각은 했다. 본격적인 독서는 대학생이 된 뒤에 했다. 시간은 있는데 다른 할 일이 없을 때는 무조건 책을 읽었다. 서울에 아는 사람도 없고 돈도 없는 지방 출신 대학생한테는 독서 말고 즐길 만한 레저가 없었다. 실컷 놀아도 허무하거나 자책감을 느끼지 않는 놀이 또한 독서만 한 것이 없었다. 학회 도서 목록에 있는 책만 읽었던 것은 아니다. 20대 청년 시절 나는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체호프를 비롯한 러시아 작가의 소설과 최인훈, 김승옥, 윤홍길, 오정희, 박완서, 조세희, 이청준, 황석영 등 우리나라 작가들의 소설책을 끼고 다녔다. (...)
가장 좋은 독서법은 아이들 스스로 흥미를 느끼는 책을 읽게 하는 것이다. '어린이를 위한 고전 100선'이니 '추천 청소년 필독서 50선'이니 하는 광고에 현혹되지 마시라. '어린이 논어'니, '어린이 사서삼경'이니, '청소년용 그리스, 로마 신화'니 하는 책을 재미있게 읽을 아이는 거의 없다. 어린이 독서는 책 읽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독서를 생활 습관으로 만들고 자신이 읽은 것을 활용해 무엇이든 자기 머리로 생각하는 버릇을 들이면 된다. 많은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독서 교육의 목표는 아니다. 재미를 붙이기만 하면 아이들은 스스로 자기 나름의 독서 이력을 만들어간다. 만화, 판타지소설, 무협소설, 추리소설, 역사소설, 잡지, 그 무엇이든 괜찮다.
<p.123>
임재춘 선생은 한 문장에 하나의 개념(생각, 주장)만 담는다는 글쓰기의 원칙을 설명하려고 이 예문을 들었다. 한 문장에 생각 하나를 담으면 저절로 단문이 된다. 나는 문장을 단문으로 쓰는 원칙에 전적으로 공감하며, 글을 쓸 때 이 원칙을 따르려고 노력한다.
<p.131>
'행복한 가정은 다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이유가 다르다.'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이다. 정말 그런 것 같다. 가정이 행복하려면 여러 조건을 동시에 갖추어야 하는데, 그러면 어느 집이나 비슷해 보일 수밖에 없다. 반면 불행해지는 데에는 많은 게 필요하지 않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데 꼭 필요한 여러 조건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크게 어긋나면 불행한 가정이 될 수 있다.
<p.167>
인생에서 특히 경계해야 할 감정이 여럿 있는데, 허영심도 그중 하나다. 허영심은 아주 고약한 감정이다. 허영심에 빠진 사람은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이며 의미 없는 일에 시간과 열정을 쏟는다. 글 쓰는 사람이 빠지기 쉬운 허영심은 지식과 전문성을 과시하려는 욕망이다. 이 욕망에 사로잡히면 난해한 글을 쓰게 된다.
<p.250>
기술만으로는 훌륭한 글을 쓰지 못한다. 글 쓰는 방법을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내면에 표현할 가치가 있는 생각과 감정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훌륭한 생각을 하고 사람다운 감정을 느끼면서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그런 삶과 어울리는 글을 쓸 수 있게 된다. 논리 글쓰기를 잘하려면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떳떳하게 살아야 한다. 무엇이 내게 이로운지 생각하기에 앞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고민해야 한다. 때로는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원칙에 따라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기술만으로 쓴 글은 누구의 마음에도 안착하지 못한 채 허공을 떠돌다 사라질 뿐이다.
<p.264>
어떤 사람들은 엄청나게 큰 행운을 손에 넣고도 그게 행운인 줄 모른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데도 꼭 필요하지도 않은 다른 것을 찾으려고 몸부림친다. 그렇게 살면서 자신과 타인을 괴롭힌다. 행운을 행운으로 알고 자기가 가진 것을 소중하게 여기면 삶이 훨씬 즐겁고 행복해진다는 것을 모른다.
<p.271>
글을 잘 쓰고 싶은 마음에 읽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잘 살고 잘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배운 책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한 친구가 내게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 '창작물과 창작자를 별개로 봐야 하는가?'라는 질문이었다. 예컨대 그 친구는 가구를 만드는 일을 하는데 자신이 만든 가구는 자신과는 별개의 창작물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 친구의 동업자는 창작물은 창작자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에 그 친구는 내게 '너는 어떻게 생각해?'라며 물었다.
훅 들어온 질문에 당황했지만 시간을 좀 두고 조심스레 말한 내 대답은 이랬다. '그건 창작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창작물을 받아들이는 사람 마음에 달려있는 것이 아닐까? 창작물을 소비하는 사람이 그것을 창작자의 분신이라고 생각하면 그는 창작물을 창작자와 연결 지어 이해할 것이고, 반대로 창작자와 별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창작물을 독립적으로 이해할 것 같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된, 최근에 접한 충격적인 소식을 친구에게 전했다. 그것은 바로 가을방학의 멤버 정바비가 전 연인 폭행 및 불법촬영 등의 이유로 징역형을 받았다는 소식이었다. (당시는 1심에서 징역을 선고받은 상태였는데, 이 글을 쓰기 위해 찾아보니 지난 6월 1일 항소심에서 불법촬영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받고 일부 폭행에 대해서만 벌금형을 받았다.) 이 사건은 2020년에 발생한 사건이지만 나는 이 일을 2022년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가을방학의 노래를 듣던 중 우연히 보게 된 멜론 댓글에 의해서였다.
댓글창은 말그대로 난리가 나 있었다. '듣고 싶은데 들을 수가 없다', '지난 몇 년 동안 위로받은 걸 생각하면 역겹다', '진심으로 좋아했기에 더 화가 난다', '내 추억 돌려내'라는 댓글이 많았다. 그러나 그중에는 '음악은 죄가 없다', '누가 만들었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가 중요하다', '추억만 떠올리면서 노래를 듣겠다' 같은 댓글도 있었다. 나 역시 혼란스러웠다. 가을방학은 나도 대학생 때 참 많이 좋아했던 밴드로 그때까지도 가끔씩 생각날 때마다 들었기 때문이다. 나를 통해 우연히 이 소식을 듣게 된 내 친구도 가을방학의 노래를 좋아했기에 역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창작자와 창작물은 별개라고 생각하던 친구도 앞으로 가을방학의 노래를 들으면 왠지 찜찜할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과연 우리는 앞으로 가을방학의 노래를 어떻게 들어야 할까?
그런데 그 전에, 생각해 보면 의외로 이런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고은 시인이 그렇다. 이 책에서도 작가가 고은 시인의 시를 좋게 평가하며 인용했었는데, 나도 고은 시인의 시 중 좋아하는 시가 있다. 그러나 고은 시인은 2018년 우리 사회에 미투 운동이 불어닥쳤을 때 성폭력 논란에 휩싸였고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수많은 연예인들이 비슷한 논란에 휩싸였다. 최근에 논란이 되고 있는 임창정, 유아인부터 시작해서 음주운전과 마약, 사기 등 갖은 범죄 행위를 저지른 연예인이 한둘이 아니지 않은가. 그럼에도 그들의 작품이나 TV쇼는 과거에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과 감동을 주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앞으로도 임창정의 노래를 듣고, 유아인이 나온 영화를 보고, 길이 나온 무한도전을 재방을 보면서 웃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현재의 나도 그렇다. 나는 아직도 가끔씩 가을방학의 노래를 듣는다. 가을방학의 노래에는 나의 20대의 많은 추억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노래들을 통해 나는 그날을 회상하고 그때의 감정을 기억한다. 밴드의 멤버 한 사람이 범죄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한 순간에 그 노래들을 모두 포기하기가 어려웠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나는 대학에 입학해서 군대를 다녀오고,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할 때까지 종종 일기를 쓰곤 했었는데 늘 똑같은 노트를 일기장으로 사용했다. 그 노트는 옥스퍼드 스프링 노트인데 지금 와서 노트를 만드는 회사가 범죄를 저지른 나쁜 기업이라고 해서 일기를 적은 노트를 더 이상 보지 않거나 버린다면 너무나도 아쉽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창작물이 창작자의 손을 떠나는 순간 창작물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맞게 변형되어 창작자가 만든 최초의 창작물과 다른 모습을 갖게 된다고. 물론 그렇다고 최초 창작물의 모습이 아예 사라져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개인이 그 창작물을 좋아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니까. 다만 창작물을 접한 개개인의 취향과 특성, 상황에 맞게 개인은 그것을 조금 다른 버전의 창작물로 받아들이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우리는 같은 이름이지만 제각기 다른 창작물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순수한 창작은 창작자로부터 나오지만 창작의 결과에는 개인의 개입이 들어가게 된다.
그럼에도 사실 마음이 계속 쓰이는 건 있다. 가을방학이나 임창정의 노래를 스트리밍 할 때마다, 고은 시인의 시집을 살 때마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정바비와 임창정, 고은에게 수익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이다. 창작자의 부정을 응징하기 위해서라도 개개인이 창작물을 보이콧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된 근거 중 하나이다. 그리고 사실 이 부분은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이며 뭐라 반박하기 어려운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다양한 창작자과 창작물이 존재한다. 애초부터 나쁜 마음을 가졌지만 그것을 숨기고 만든 창작이 있는가 하면 과거 착하고 순수한 마음에서 했던 창작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나쁜 길로 들어선 창작자도 있다. 또는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기 어렵거나 그것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한 창작자나 창작물도 있다. 원본에서 나온 2차 창작과 3차 창작의 경우는 또 어떠한가. 개인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 옳은지를 따지려니 머리가 지끈지끈해진다...
글의 첫머리에서 나는 글쓰기를 잘하기 위해서 이 책을 읽었지만 먼저 잘 살고 잘 생각해야한다는 것을 배웠다고 했다. 그 말은 결국 좋은 글은 좋은 작가의 좋은 삶과 생각으로부터 나온다는 뜻이다. 이 지점에서 예전에 친구가 했던 질문이 떠올라 이런저런 글을 적어본 것이다. 완성된 창작물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창작물에 있어서도 창작자와 똑같은 윤리적 잣대를 들이미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분명한 건 모든 창작물은 창작자의 영향 아래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언젠가 나중에 기회가 되었을 때 이 주제에 대해서 한 번 토론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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