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인 사람을 정의할 때, 20세기 심리학자들은 '남들이 생각해내지 못하는 엉뚱한 아이디어를 쏟아내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창의력 테스트가 대부분 "'둥글다'라는 단어가 들어간 문장을 만들어보시오"라는 과제를 주고 몇 개의 문장을 만들어내는지 센다거나, "신문지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나열하시오"라는 과제를 주고 행동을 관찰하는 정도였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데 21세기, 새로운 시대에 주목받는 창조적 능력은 남들이 생각해내지 못하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능력만이 아니라 '개성적인 통찰력'을 요구한다. 복잡한 현실에서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파악하는 능력, 문제의 본질을 남들과 다르게 새롭게 정의하는 능력, 그리고 황당한 아이디어를 현실 가능한 아이디어가 되도록 구체화할 수 있는 능력 등이다.
<p.32>
당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은 이미 누군가 그려놓았다. 당신이 찍고 싶은 사진은 이미 누군가 찍어놓았다.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시대에 거기에 물 한 바가지 더 들이붓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정보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정보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조직하는 것이다. (...)
'창작'이라는 개념은 아직도 고상한 아우라를 듬뿍 뒤집어쓰고 있다. "아, 떠오른다, 떠오른다, 오선지..." 창작의 순간을 이렇게 묘사하는 것은 낡은 낭만주의 수사법이다. 학생들에게 나는 늘 영감을 일으키는 기계적 절차가 있다고 가르친다. 그게 뭐냐고? "구글에 들어가 검색창에 낱말을 타이핑하고 엔터키를 치라." 그러면 단지 그 낱말이 포함되어 있다는 단순한 이유에서 이제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수많은 텍스트가 화면에 나타날 것이다. 바로 그것이 디지털 시대의 기계적 영감이다.
<p.48>
더욱 중요한 것은 실제로 셀카족들은 정확한 자신의 모습을 찍기 원하는 것이 아니라 '셀카만의 이미지'를 즐기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정확한 삶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 모습을 가장 예쁘게 변형해서 담고 싶은 '나르시시즘적 욕망의 구현'이다. (...)
내가 찍는데도(혹은 내 가장 가까이에서 찍는데도) 나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 '가장 왜곡된 모습'을 담아낸다는 점에서 셀카는 '삶의 기록'이 아니라 '욕망의 기록'이다.
<p.127>
"나이가 들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라는 말이 있다. 외모와 행위의 아름다움 사이에 직접적 인과관계가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주관적으로, 행위에 대한 윤리적 평가가 외모에 대한 인상을 좌우하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행위가 아름다운 사람의 얼굴은 깊게 팬 주름마저도 순결한 번뇌의 흔적으로 느껴지고, 행위가 너저분한 사람의 얼굴은 매끈한 피부조차도 뺀질거리는 것으로 느껴지지 않던가. 아름다운 행위는 그것을 하는 사람의 얼굴에 뭔가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부여한다.
<p.162>
선거철만 되면 여론조사와 설문 조사가 기승을 부린다. 과연 얼마나 정확할까? 설문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도 의심스럽지만, 더 황당한 것은 설문 조사 자체가 참가자들의 행동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다.
예를 들어, 선거일 전날 "당신은 투표할 의향이 있습니까?"라는 설문 조사에 참여하게 되면, 그들이 투표할 확률이 무려 25퍼센트나 올라간다. 게다가 이번 선거에서는 예년에 비해 투표율이 크게 올라갈 것으로 예상된다는 뉴스를 접한 그룹은 그렇지 않은 그룹보다 투표에 참여할 확률이 20퍼센트 이상 올라간다. 물건을 구매할 때도 비슷한 효과가 나타난다. 미국인을 대상으로 50개 주에서 4만 명 이상 표본 조사한 결과, "앞으로 6개월 안에 휴대전화를 구매할 의사가 있습니까?"라는 간단한 질문만으로도 구매율을 35퍼센트나 높일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람들의 의도를 측정하는 설문 조사가 그들의 구매 의사와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p.209>
'광산의 카나리아'라는 표현이 있다. 예전 광부들이 갱도에 들어갈 때 유독가스에 민감한 카나리아를 함께 데리고 들어갔다는 데서 유래한 이 표현은 '산업 전반에 불어 닥친 혁명의 첫 번째 희생자'를 의미한다.
<p.307>
나는 스티브 잡스의 'Connecting the dots' 이야기를 좋아한다. 이 이야기는 그가 2005년 스탠포드 대학 졸업식 연설에서 했던 이야기 중 하나인데 간단히 요약하면 이러하다. 평범한 부부에게 입양되어 자란 스티브 잡스는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당시 비싼 등록금 때문에 대학을 중퇴하기로 결심한다. 더 이상 졸업에 필요한 과목을 들을 필요가 없어진 그는 대신 재미있어 보였던 캘리그래피 수업을 수강한다. 그는 당시 이 수업이 인생에 쓸모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수업은 10년 뒤 그가 매킨토시를 개발할 때 타이포그래피(typography), 즉 아름다운 활자디자인을 만드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덕분에 그는 지금 윈도우의 유일한 대항마인 맥, 마이크로소프트를 넘은 애플이라는 회사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10년 전에 들었던 캘리그래피 수업이 지금에 와서 보니 인생의 전환점 중 하나였다고 말하는 스티브 잡스는 이 말을 덧붙이며 이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So you have to th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과거를 돌아보면 내게도 많은 점이 존재했다. 주로 학창시절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했던 취미들이다. 중학생 때는 X-Japan, 베르나르 베르베르, 플라이트 시뮬레이터, 펜 돌리기, 비트박스에 빠진 적이 있다. 고등학생 때는 농구, 루빅스 큐브, 힙합, 기타, 일본 소설에 빠진 적이 있고, 군대를 포함한 대학생 때는 여행, 사진, 일본어, 달리기 등에 빠져있곤 했다. 1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지금, 몇몇 점은 현재와 이어져 지금의 나를 만드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조종사의 꿈을 갖게 된 계기가 된 플라이트 시뮬레이터가 그렇고, 책과 글쓰기에 대한 흥미를 계속 가질 수 있게 한 베르나르 베르베르나 일본 소설이 그렇다. 하지만 현재와 이어지지 않고 혼자 있는 점들도 많다. 펜 돌리기, 힙합, 사진, 일본어, 그 외 나를 스쳐간 무수히 많은 내 관심사들이다. 현재의 내 삶에 아무 영향을 주지 않는 이 점들은 아마도 어린 시절의 재미있는 추억 중 하나로 남아 있을 확률이 크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만약 이 점을 이을만한 미래가 아직 오지 않은 거라면? 그 미래가 당장 5년 뒤, 내년, 아니 다음 주일지도 모른다면? 그때 가서 '중학생 때 친구들과 재미로 했던 펜 돌리기가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어요'라고 말하게 될지는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일 것이다.
요즘 학생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그들도 나름대로 자신의 관심과 흥미에 따라 자신의 삶에 작은 점을 찍으며 나아가기를 바란다. 인생의 전부가 공부라고 생각하는 학교와 부모님 밑에서도 친구들과 쉬는 시간에 취미를 공유했으면 좋겠다. 학교가 끝나면 학원에 가고 밤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오는 하루 사이에도 내가 정말 좋아하고 재밌어 하는 일들을 할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공부가 물론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그 시절을 공부만 하는 좁은 길만 보며 걸을 필요는 없다. 정해진 길을 따라 걸어가되 길을 좀 넓게 쓰면 되는 것이다. 목표로 가는 길에 이런저런 다양하고 재미있는 것들에 재미도 느끼고 감동도 받고 새로운 경험도 하면서 하나둘 점을 찍으며 앞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그들 중 언젠가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생각하게 될 점이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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