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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의사 박경철의 자기혁명 > 박경철, 2011

by Ditmars 2023. 6. 10.

<시골의사 박경철의 자기혁명> 박경철, 2011

 

 "낯선 것과의 조우를 통해 이성이 시작된다."
 이는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말인데, 가히 '생각'의 본질을 관통하는 선언이다. 우리는 익숙한 것들에 대해서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습관처럼 반복되는 동작과 행동들은 본능에 의존한 관성일 뿐 생각의 결과로 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이렇게 새로운 상황에 대한 생각들이 사유되고, 그것들이 의식에 젖어들어 나의 행동이 교정되고 내면화되는 과정이 바로 긍정적 습관화, 소위 긍정적 애티튜드(attitude)의 형성이다. 반면 좁은 범위에서 습관화된 행동과 생각만 반복하게 되면, 우리는 모든 낯섦을 거부한 채 누에처럼 고치를 짓고 거기에 안주하게 된다.
 따라서 나의 발전을 위해서는 의식적으로 새로운 환경에 도전해서 새로운 생각을 많이 이끌어내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습관을 만드는 태도를 형성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

 이쯤에서 다시 생각, 혹은 사유라는 문제로 돌아가보자. 생각은 감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다. 새롭게 만나보고 듣는 것 등이 새로운 환경에 대한 자극은 되겠지만, 그것들이 다 생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맛있는 음식을 먹고서 '최고야!'라고 감탄했다고해서 그것이 사색의 결과라고는 말할 수 없지 않는가.
 모든 생각은 문자의 정교한 조합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즉, 내 생각의 범위는 내가 알고 있는 문자의 범위이고, 생각은 그 문자의 조합을 넘지 못한다. 따라서 나의 생각을 넓히기 위해서는 많은 문자를 알고, 그것을 조합하는 방법을 익혀야만 한다.

<p.21>

 

 우리가 사는 세계의 크기는 내가 인식하는 시선의 범위만큼이다. 산속 바위에 핀 꽃은 내 눈이 그것에 닿지 않는 한 피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왕양명의 시 <암중화>처럼, 산속에 핀 꽃은 내가 인식하지 않는 한 꽃이 아닌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내가 인식하는 만큼이 내 세상의 크기인 것이다. 그러니 청년이 넓은 세상을 여행하고 도전하는 것은 그만큼 자기 세상의 크기를 넓히는 것이고, 그만큼 자신에게 기회를 주는 일이기도 하다.

<p.40>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필연적이고 불가피적이며 합목적적이라야 한다고 바라고 있다. 모든 종교, 거의 모든 철학, 그리고 과학의 일부까지도 인류가 자기 자신의 우연성을 안간힘을 다해서 부인하려는 인류 전체의 끈질기고도 영웅적인 노력을 입증해주고 있다.
 - 자크 모노, <우연과 필연>

<p.62>

 

 현대사회의 질서 속에 놓인 주인공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고민은 내일 일용할 양식에 대한 걱정이나 새로운 자동차 또는 요트에 대한 생각이 아니다. 그들의 망연자실함은 오히려 자기를 잃어버린 데서 오는 절대고독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고독을 느끼는 것은 타인과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여기지만, 진짜 고독은 타인과는 늘 함께하면서 참 나가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데서 오는 것이고, 이것을 가리켜 우울이라고 부른다.

<p.77>

 

 나를 둘러싼 타자의 개입을 인정해버린다면 가치혼재의 상황에 빠지게 된다. 나와 타인의 시선이 결합되어 실상이 없는 가치관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 당시에는 가치지향적인 결정이라 믿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렇지 않음을 발견하게 되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더 두려운 것은 가치부재의 상황이다. 가치에 대한 고민이나 사유 없이 단지 목적에만 충실하게 살다 보면, 언젠가 가치를 보는 눈이 성숙했을 때 나의 모든 삶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게 된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바람직하고 건강한 가치관을 정립하고 삶의 모든 선택을 그것에 의거해 해나가는 것이다.

<p.83>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 사회철학자 칼 폴라니(Karl Polanyi)는 일찍이 '맥락화의 함정'에 대해 경고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복잡해서 한 가지 틀로 이해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비슷하거나 부분적으로 유사한 것들을 하나로 묶어 그것이 마치 거부할 수 없는 대세인 양 위장해서 대중을 현혹하거나 지배하려 든다는 것이다.

<p.109>

 

 최근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태도'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 소위 긍정심리학이다. 미래에 대한 기대와 개선에 대한 희망이 행복의 원천이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개인의 자세가 행복의 원리라는 것이다. 이런 긍정적인 자세는 '지루함'을 배격하고자 하는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찾아진다. 인간은 사회에 속하고 개인의 모든 활동은 사회와 관련되어 있으므로, 사회가 건강하고 선량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야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태도도 긍정적일 수 있다.
 결국 사회를 개선하려는 노력은 내가 행복하고자 하는 것이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은 나뿐 아니라타인의 행복을 위해 봉사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따라서 행복의 문제는 결국 개인을 벗어나 사회로 확장되는 데에 달려 있는 셈이다.

<p.142>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은 단순한 습관이나 버릇이 아니라 사물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이야기다. 실제 모든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일을 대하는 자세 혹은 태도다. 우리는 대개 성과의 차이가 능력 차이 때문에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태도의 차이, 즉 집중력의 차이 때문이다. 또한 자신이 하는 일에 몰입하는 모습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좋은 태도는 일생을 통해 교정해 나가야 할 중요한 과제다.

<p.150>

 

 목표를 이루기 위한 첫번째 발걸음은 무언가 부정적인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지금 손에 쥐고있는 나태함의 달콤함을 버리지 않은 채 긍정적인 것을 손에 넣기란 불가능하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첫걸음은 지금 내가 반복하고 있는 나쁜 습관 하나를 버리는 것이다. (...)

 예를 들어 담배를 끊어야겠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막상 끊지는 못하고 있다면 당신의 애티튜드는 아직 다른 더 큰 것을 실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당장 필요한 것도 하지 못하는 태도가 습관이 되어 있는데 더 많은 시간을 들이고 자신을 전부 던져야 하는 더 큰 결심을 어떻게 실천하겠는가. 보나마나 실패할 게 뻔하다. (...)

 결심이 강한 초기 단계에서는 이런 변화가 쉽게 일어나지만 자칫하면 금세 원위치가 되기 쉽다. 이는 습관의 힘이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기만 잘 극복하면 그 후로는 자신이 극복해온 성과에 애착이 생기며 태도가 달라진다. 그렇게 새롭게 얻어진 태도가 새로운 습관으로 대치되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나쁜 습관을 바꿀 작은 행동의 변화조차 시도하지 못하면서 인생의 꿈을 말하고 그것을 이룰 최선의 준비가 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공허한 수다에 불과하다. 그러니 긍정적 애티튜드를 만드는 출발은 내일부터 무엇인가를 하겠다가 아니라 내일부터 무엇인가를 하지 않겠다가 먼저인 셈이다. 즉 나의 목표를 이루는데 필요한 애티튜드는 버리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차차 걸음이 빨라지며 그 과정에서 새로운 애티튜드가 형성되어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긍정적 애티튜드다.

<p.154>

 

 사회학자들은 지난 20만 년간의 인류문명 발전이 그동안 이 땅에 살아온 모든 인류의 노력의 결과라고 말한다. 이것은 모든 인류에 경의를 표하는 우아한 시각이지만 진실은 아니다. 지금까지 문명과 문화의 발달은 0.1퍼센트의 창의적 인간이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꿈꾸지 않는 것을 꿈꾸며, 모두가 보지 못하는 어두운 곳에 깃발을 꽂고 이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새로운 땅이라고 외치면, 0.9퍼센트의 안목있는 인간만이 그것을 알아보고 그들과 협력하고 후원하며 새로운 문명을 건설한 결과다. 나머지 99퍼센트는 이 1퍼센트가 모든 것의 기초를 닦고, 새로운 계단을 놓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그 위에 올라와 세상 참 많이 달라졌다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또다시 그곳에 안주한다.
 - 제러미 리프킨, <엔트로피Entropy>

<p.163>

 

 책은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 중에서 부실한 부분을 지우고 새로운 지식을 입력하는 메모리반도체 같은 것이다. 새로운 지식이 들어오면 기존의 지식 중에서 진부한 것이 지워지고 그 위에 새로운 지식이 덧입혀지는 것이다. 좋은 책을 읽고 새로운 사유를 만나 지식을 얻게 되면 기존의 지식체계가 수정되고 덧칠된다. 그렇게 독서를 통해 내가 가진 지식체계를 계속 수정해나가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책읽기는 나를 연마하는 것이다.

<p.177>

 

 사막을 여행하던 사람이 쓰러지는 순간까지 걸었다고 해서 그것을 노력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을 뿐이다. 천재가 놀라운 발명을 했다고 해서 그것을 노력이라고 하지도 않는다. 대신 재능이라고 할 뿐이다.

<p.200>

 

 '시간이 없다'는 말은 위선이다. 시간은 늘 충분하다. 단지 우리가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것에 도전할 시간이 없는 것이다. 무언가 새로운 도전을 꿈꾼다면 잠을 희생하든 놀이를 포기하든 달콤하지만 의미없는 일들을 포기하고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서 충분히 준비해야 한다.

<p.214>

 

 하지만 이런 예의 매뉴얼을 어릴 때부터 몸에 익히는 것은 삶에서 중요한 태도를 형성한다. 이는 어릴 때부터 참고 통제하는 습관을 익히는 것이고, 그렇게 예가 갖추어져야 비로소 공부가 가능하다고 공자는 생각했다. 즉 예는 좋든 싫든 해야만 하는 것을 하게 하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내키지 않지만 할 일은 하는 태도와 인내심이 길러지며, 이런 인내의 바탕 위에서 비로소 자신을 견제하고 다스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를 배우지 못하면 자제력과 인내심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예가 본래의 목적을 넘어 위세를 과시하는 데 이용되거나, 공자 이후의 시대처럼 그것이 목적으로 바뀌면 부작용이 나타나게 된다.
 지금 우리 시대는 예의 중요성이 완전히 경시되어 인내심과 자제력을 기를 수단을 상실해버렸다. 타인에 대한 배려를 배우지 못한 아이들은 음식점에서 마구 뛰어다니고, 스승에 대한 예를 익히지 못한 아이들은 체벌이 없으면 스스로를 정돈하지 못한다. 예 교육이 가정과 사회에서 실종되면서 우리 아이들의 참을성과 배려, 인내심도 사라져버린 것이다.
 예는 좋은 교육에 의해 자발적으로 생성되는 것이므로 강요될 수 없고 강요되어서도 안 된다. 예는 타인에게 나를 대하는 방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향한 나의 습관화된 태도의 일종이다.

<p.241>

 

 우리는 너무 관념적인 것을 선호한다. 무언가 목표를 세우면 이를 깨물고 실행할 다짐을 하고 산에 올라 일출을 보면서 "그래, 결심했어!"를 외치지만 그 결심은 며칠도 안 돼 오뉴월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기 일쑤다. 왜 그럴까? 관념은 허무한 것이기 때문이다.
 관념이 나의 행동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평소에 해오던 습관이 관성이 되고, 관성이 태도를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태도의 작은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환경을 조성하는 게 사실은 더 실효성 있는 실천의지인 것이다.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고 마음먹은 학생의 우선순위는 구호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책상을 정리하고 주변에서 자신을 유혹하는 것들을 없애고 책상에 앉을 때 의자를 당겨앉는 것이다. 또 직장에서 성과를 내고 싶으면 책상에 작은 선인장을 하나 놓고 볼펜과 메모지부터 정리하는 것이 우선이다.

<p.248>

 

 예술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런 영감, 즉 그들의 언어를 읽는다는 뜻이다. (...) 따라서 내가 이런 영감의 언어들을 이해할 수 없다면(예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영감이 표현된 장면들이 나의 한정된 언어에 갇히게 된다. 그러면 나의 영감을 확장하거나 표현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길이 막혀버리고 만다. 그래서 입시 위주의 교육에서 이런 영감의 언어를 배울 기회가 없었던 우리는 눈앞에 보석을 놓고도 먼 산만 쳐다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p.271>

 

 공자는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라고 했다. 이는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구절로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리석어지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로워진다'는 뜻이다. 인류가 세상에 글을 남긴 이래 '공부'에 대한 말 중에서 이보다 압축적이고 탁월한 것이 또 있을까. 공부를 생각할 때 뼈에 새겨두어야 할 구절이다. (...)

 돌아보면 공부가 늘 그랬다. 의과대학 시절 점수에 연연해 외운 지식들은 모두 허공으로 흩어졌다. 결국 의사로서 진정한 내 실력으로 이어진 공부는 모두 현장에서 환자를 진료하고 고민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의과대학에서 학점을 따고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외우기에 급급했던 공부는 남들에게 평가를 받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던 것이다. (...)

 <사서십주>에서 두번째로 강조한 '배운 것을 익힌다'는 말은 우리가 흔히 쓰는 한자어 '학습(學習)'의 의미로 바로 연결된다. 우리는 흔히 배우는 것, 즉 누군가 가르치는 내용을 흡수하는 것을 공부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공부는 반드시 학에 습이 병행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습'자를 파자해보면 두 개의 날개로 나는 형상이다. 새를 관찰해보면 아기새는 어미새가 날갯짓하는 것을 보고 날개를 움직여 파닥이면 날 수 있다는 것을 배운다. 그러나 스스로 날개를 파닥이며 나는 연습을 하지 않는다면 아기새는 영원히 날 수 없다. 박태환 선수에게 수영을 배우며 그의 영법을 아무리 외워도 실제 내가 물에 들어가서 물을 먹어가며 익히지 않으면 헤엄을 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결국 공부는 배우는 것과 익히는 것 두 개의 날개로 나는 새다. 그런데 우리는 대개 배우는 것만 공부라고 여기고 제대로 익히지 않으니, 실제 현실에서 배운 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공부는 배움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익히고 생각하고 실천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다. 리쩌허우가 <논어금독>에서 지적한 것은 "지성이 배제된 감성은 맹목적이고, 감성이 배제된 지성은 공허할 뿐"이라는 칸트의 말과도 같은 맥락이다.

<p.276>

 

 독서를 통해 사람들이 각자 다르게 생각하는 언어와 말하는 언어를 배우고, 내 생각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사람의 생각은 언어로 고정되어 있고, 언어는 맥락이 있어야만 뜻이 형성된다. 언어, 즉 어휘가 부족하면 생각이 풍부할 수 없고 언어를 맥락화할 수 없다면 체계적인 생각을 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유'란 맥락화된 생각을 가리킨다. 그래서 독서는 사유를 배우는 제1의 수단이며 창의력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

 마지막으로 독서는 우연의 씨앗을 뿌리는 과정이다. 스티브 잡스에게 아이폰을 만들 기회가 주어진 것은 이전에 그가 디자인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결과다. 찰리 멍거가 위대한 투자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동안 쌓아온 인문, 사회, 철학에 대한 방대한 관심이 시대의 패러다임을 읽는 통찰적인 안목으로 발산된 결과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일생을 통해 독서를 해나간다는 것은 언젠가 새로운 기회를 만날 씨앗을 뿌리는 행위이며 나를 준비된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독서는 가능성이다.

<p.286>

 

 "새로운 것에 대한 선의,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호의를 가져라."
 - 니체

<p.307>

 

 중독이 되는 이유는 끊임없이 갈구하기 때문입니다. 도파민은 우리를 충동질하고 미치게 만듭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만족감과 행복을 약속하지만 절대로 온전히 가져다 주지 않습니다! 진화의 설계에 따라, 우리는 행복을 갈구하지만 결코 지속적으로 그것을 느끼지는 못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습니다. 미칠 노릇이지요! 미국의 헌법에도 '행복추구권'이 보장되어 있다고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행복을 탐색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찾아서 손에 넣는다는 보장은 없다는 겁니다. 탐색은 평생토록 계속됩니다. 그리고 어떤 지름길을 택할 때마다 목적지에서 점점 더 멀어집니다. 비극적이면서도 희극적이고 비인간적이면서도 인간적이며, 우주 최대의 해학이자 심술이 아닐 수 없습니다.
 - <행복은 혼자 오지 않는다>, 히르슈하우젠(Eckart von Hirshhausen)

<p.316>

 

 개인의 비극적 선택을 두고, 다른 사람과의 단순 비교를 통해 나약한 선택을 했다고 비하하거나 외면해선 안 된다. 사람은 각자 견딜 수 있는 임계치가 다르고 자극에 반응하는 방식도 제각각 다르다는 점을 인식하지 않고 모두를 일반화하게 되면 비극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p.321>

 

 SNS의 약점은 역설적으로 '대중성의 부족'에 있다. 기본적으로 SNS는 온라인상의 친분이 우선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나에게 호감을 가진 사람들만 반응한다. 때문에 SNS상에서 나의 견해는 늘 옳은 것처럼 보인다. 관계를 맺지 않은 대중들이 모두 자유롭게 반응하는 기존의 방식과 달리 집중적이고 확산성이 강한 SNS는 정작 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동종교배가 일어날 수 있는 폐쇄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트위터에서 나의 팔로어는 기본적으로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고 나와 성향이 비슷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혹은 오프라인에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 신분을 공개하며 온라인상에서도 관계를 이어가는 경우도 많다. 때문에 이 그룹에서 나의 견해에 반대하는 비율은 지극히 낮을 뿐 아니라, 동의하지 않는 경우에도 반대의사를 드러내지 못하는 침묵의 나선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때문에 SNS에서 오고가는 담론은 서로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통되고 소비되며, 한 가지 견해를 두고 모두가 옳다고 착각하는 '무오류성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만약 정치인이라면 자신의 정책이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다고 착각할 것이고 언론사라면 자사의 논조가 대중의 중심을 대표한다고 오해할 것이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못마땅한 사람은 입을 다물고 동의하는 사람은 적극적으로 맞장구를 친다. 그래서 SNS상의 의견들은 비판에 민감하고 그래서 비판은 암암리에 위축된다.

<p.338>

 

 '변화'는 사실 우리가 습관처럼 쓰는 말이다. 기업이나 정치권에서는 '변화'와 '혁신'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있고 개인들도 비슷하게 '변화'를 추구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가장 변하지 않는 말이 있으니, 바로 '변화해야 한다'는 말 자체다. 늘 변화를 외친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그만큼 변화를 두려워하고 변화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의 반증인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슬로건은 콤플렉스의 반영이다. 어떤 이가 반복적으로 무언가를 외친다면 그의 최대 약점이 바로 그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

 변화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스스로 변화하는 것이다. 가만히 서서 지나가는 KTX를 보면, 마치 야구공이 지나간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신발을 벗어들고 같은 방향으로 달리면 객차가 보이고 자전거를 타고 따라가면 사람이 보인다. 하지만 그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를 알려면 KTX에 직접 올라타야 한다.
 변화는 스스로 변화하는 사람에게만 모습을 드러내는 무지개와 같다. 매일 스스로 변화해 어제와 다른 오늘, 오늘과 다른 내일 아침과 다른 저녁을 맞는 사람에게 변화하는 패러다임 혹은 세상은, 속속들이 들여다보이는 느린 장면이 된다. 하지만 모니터 앞에 앉아 습관처럼 연예기사나 살피면서 무의미한 논쟁을 벌이고, 매일 갖는 술자리에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한탄만 늘어놓는 사람에게는 '번쩍!' 하고 지나가버리는 번갯불처럼 실체를 보여주지 않는다.

<p.361>

 

 차세대 리더를 꿈꾸는 청년들은 바로 여기서 중요한 힌트를 얻어야 한다. '시대의 요구는 시대의 과잉이 아닌 결핍과 일치'하며, 그 결핍은 다음 세대의 필수 덕목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지금 청년들은 현재 대표적 과잉 중 하나인 무모한 스펙전쟁이 아니라 대표적 결핍인 공공성을 갖추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사회적 건강성에 헌신함으로써 차세대 리더에게 요구되는 리더십을 획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즉 과거에는 잘난 사람의 리더십이 중요했지만, 지금은 대중의 팔로십이 중요한 시대다. 예전에는 유아독존이더라도 만 명을 먹여살리는 한 명의 인재가 '팔로 미(follow me)'를 외치면 9,999명이 뒤를 따라 뛰었지만, 이제 그런 시대는 끝났다. 공공의식이 없는 리더십에는 대중이 곧 염증을 느낀다. 어떻게든 성공만 하면 되고, 남을 짓밟고 올라서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고, 잘나고 똑똑하면 모두가 따르던 리더십에 염증을 느낀 대중들이 간절하게 공공의식을 가진 공감형 리더십을 요구한다. 때문에 공공의식을 교육받지 않은 사람들은 사회에서 성공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국가지도자건 사회지도자건 '팔로 미'가 아닌 '위드 미(with me)'를 말하는 사람, 함께 가고 헌신하며 먼저 실천하는 사람이 리더로서 인정을 받는 시기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모두가 개인의 성공을 위해 질주하는 스펙경쟁의 시대에 오히려 공공의식을 몸에 익힌 사람이 승자가 되는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고 있다. 지금 청년세대가 미래의 리더가 되는 가장 중요한 자질은 기성세대와 같은 '탁월성'이 아닌 '공공의식'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p.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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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대, 20대에는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일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상황이 그렇게 변해 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새 학기가 시작된다거나 군대를 가야 한다거나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는 일들이 그랬다. 몇몇 일들은 그럭저럭 할만했다. 그러나 어떤 일들은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다. 아무리 미리 알아보고 준비를 하고 주변의 도움을 받아도 시행착오와 실수를 피할 수 없었다. 어찌어찌 넘어가거나 대충 수습하고 마무리 한 일도 많았다. 특히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 맺는 일은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긴장 반 설렘 반,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그 시간 속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많은 것을 배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삶이란 게 원래 이렇게 항상 빠르게 변하고 또 그것에 부지런히 적응하는 과정인 줄 알았다. 

 

 30대가 된 지금은 좀처럼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일을 할 기회가 없다. 언젠가 작년, 재작년 이맘때 내가 뭐 하고 있었지? 하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놀랍게도 작년, 재작년에도 나는 지금과 비슷하게 살고 있었다. 이 세상이 연극이라면 내가 맡은 배역은 이제 정해진 것 같고, 이 세상이 공장이라면 내가 담당할 컨베이너 벨트의 위치가 정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몇 년간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똑같이 해왔고, 앞으로도 이변이 없는 한 그럴 것이다. 언제 그렇게 빠르게 변하는 삶을 두려워했었냐는 듯 금세 나의 삶은 단조로워졌다. 이제는 삶이 빠른 속도로 변하는 게 아니라 무심히 흘러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참 웃긴 건 한동안 단조로운 삶 속에서 너무 많은 안정을 누렸는지 이제는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사람, 새로운 일이 그립다는 것이다. 알 수 없는 자신감도 붙어서 이제는 새로운 일도 즐기면서 잘할 수 있을 것 같고, 예전처럼 긴장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어떤 외부 요인으로 인해 내 삶에 변화가 생기는 일은 별로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결국 변화를 원한다면 그 변화는 내 안에서 일어나야 한다. 변화의 열쇠는 내가 쥐고 있다. 시간과 비용을 들여서 내가 나를 새로운 환경에 가져다 놓고, 새로운 일을 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끔 만들어야 나는 변화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내년 이맘때의 나도 지금의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자기혁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