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관련해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조한혜정 교수는 앞으로 우리 사회가 복합적이고 불확실한 위험 사회로 이행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때문에 '공부를 이만큼 하면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는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식의 근대적 발상의 룰이 완전히 없어진다는 것이다.
나는 조 교수의 말처럼 미래 사회가 점점 복합적이고 불확실한 위험 사회로 가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혈연과 지연, 학연으로 인해 찌들었던 기성세대들에 비하면 우리 아이들이 커 나갈 사회는 참으로 살맛 나는 세상일 것도 같다. 정해진 엘리트 코스가 없는, 성공의 척도가 개인의 노력과 의지에 의해 좌우되는 세상, 생각만 해도 얼마나 멋진 일인가.
하지만 개인의 자유의지가 커지는 만큼 '존재의 불안함'도 커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인류에게 종교와 결혼, 가족 제도가 있는 것은 어딘가 기댈 곳을 찾는 존재의 불안함 때문이다. 나의 존재 의미를 스스로 찾는 것이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그것을 외부에서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혹자는 그것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살시키고 삶을 구속하는 족쇄라고 하지만, 어찌 되었건 사람은 존재의 불안함으로 인해 스스로 구속받기를 원하는 본성이 있다.
그런데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자꾸 커지게 되면 불안함은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매사에 모든 것을 선택하고 책임져야 하는 부담감은 물론, 주체할 수 없는 자유에 맞닥뜨렸을 때 느끼는 불안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을 자율적으로 혼자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사회 변화 속에서 우리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사회가 불확실할수록, 개인의 자유가 커지고 선택의 폭이 다각화될수록 가장 필요한 것은 '자아 정체성(Self-identity)'이다. 자아 정체성은 자기 자신에 대한 내적인 느낌, 자아상, 외부의 평가 등이 통합되어 내가 누구인가를 자각하는 것이다. 이는 외부의 환경이나 주위 사람과의 접촉 속에서도 자아가 분열되거나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한다. 이것을 갖춘 사람은 혼자 있으면서도 외롭지 않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상대의 프라이버시를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정신적인 끈을 공고하게 유지해 나간다.
또한 자아 정체성이 강한 사람은 스스로를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볼 줄 안다. 그것은 곧 자기가 원하는 일을 빨리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것이 미래 사회에서 성공의 지름길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나는 내 아이들이 자아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으로 자라나기를 원한다. 그런데 이 자아 정체성이라는 것은 그 특성상 어느 한순간에, 급한 마음으로 서두른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억지로 가르치려 든다고 해서 주입되는 것은 더군다나 아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작해서 엄마를 알고, 엄마를 통해 세상을 알고, 나아가 세상과 맞부딪치며 무수한 실패와 좌절을 이겨 내는 과정을 통해 어렵게, 그리고 늦되게 얻어지는 것이다.
아이의 자아 정체성은 세상과 부딪치며 실수를 한 기억, 그것의 피드백으로 얻어진다. '아 이건 안 되는구나, 이건 내게 맞는 방법이 아니구나' 하는 깨달음을 통해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자아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쉽게 말해 많이 넘어져 본 아이가 그만큼 자기 정체성이 강하다.
그런데 우리 엄마들은 도무지 아이가 마음껏 경험하고 실패해 볼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저 남들이 다 가는 안전한 길만을 따라가라고 재촉할 뿐이다.
그래서 지금 결과가 어떠한가. 엄마와 학교가 시키는 대로 공부만 죽어라 하다가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야 자기 존재의 의미, 자기 정체성에 대해 고민을 한다. 그전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차압당한 채 수동적으로 살아오다가 갑자기 자기 자신을 찾아가려니 방황하는 것이 당연하다. 본격적으로 인생의 의미나 나아갈 방향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해야 할 시기에, 뒤늦게 자아 정체성의 확립이라는 문제에 부딪쳐 방황을 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일을 제대로 찾아내기만 해도 아이는 성공의 절반은 이룬 셈이다. 그러나 이를 '제대로' 찾아내려면 오랜 시간과 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부모가 대신 찾아 줄 수도 없다. 절대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억지로 강요하려 들지도 말자.
<p.20>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먼 길을 걸어가는 것과 같기 때문에 절대로 서두르면 안 된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
<p.37>
이런 영유아기의 특징을 바탕으로 제시된 교육 이론을 보면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원 스텝 비하인드One step behind'와 '원 스텝 어헤드One step ahead'가 그것이다.
원 스텝 비하인드 이론은 말 그대로 한 박자 늦게 대응하는 것을 말한다. 아이가 하는 대로 그저 지켜보다가 무언가 호기심을 보이면 그때 엄마가 살짝 밀어주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맞장구를 쳐 주는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이에 반해 원 스텝 어헤드 이론은 아이보다 한 박자 앞서는 것을 말한다. 쉬운 예로 아이가 밥을 앞에 두고 "바바바바~" 할 때, 엄마가 옆에서 "밥!"하고 확실하게 말해 주는 것이다. 나는 이 두 가지 방법이 적절히 병행될 때 최고의 교육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p.49>
요즘 사람들은 "스트레스 받는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인다. 하지만 스트레스는 어른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요즘에는 아이들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늘 쾌활하고 즐거운 듯이 보이는 아이들에게 무슨 스트레스가 있을까 싶지만 아이들도 분명 스트레스를 받는다. 문제는 안타깝게도 아이들은 자신의 고통을 정확한 언어로 다른 이에게 전달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멀쩡하던 아이가 학교에 안 가겠다고 버티고,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 물건을 훔치는 등의 이상 행동을 보여도, 그것이 스트레스 때문인 줄 미처 파악 못하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부모는 그것이 자신이 고집하는 육아 스타일 때문이라는 것도 모르고 늘 아이를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가만 고민한다.
<p.58>
모성은 타고난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나는 모성은 길러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진정한 모성은 엄마의 노력 없이, 그리고 아이와 부대끼며 여러 갈등을 극복해 가는 경험 없이는 생길 수 없다.
<p.66>
부모는 아이가 세상에서 만나는 최초의 교사이며, 그 영향력은 그 어떤 존재보다 막강하다. 아이에게 세상에서 가장 절대적이며 친밀한 존재가 바로 부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엄마들은 그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자신이 아이에게 얼마나 막대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지, 자신의 노력으로 인해 아이가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말이다. 그래서일까. 승진 시험에는 밤을 새우며 열심히 공부를 하면서도, 부모로서의 길에 대해서는 전혀 공부하려는 모습들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부모됨의 중요성을 모르고 공부를 안 하니 이런 말이 나올 수밖에. 부모란 아이에게 있어 단지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시간 맞춰 공부만 시키면 되는 존재가 아니다. 때론 부모 자체가 아이에게 세상의 전부이기 때문에, 스스로 소양을 쌓고 끊임없이 공부하며 노력해야 한다. 아이에게 부족함 없는 든든한 세상이 되어 주기 위해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p.85>
"현대의 교육 이론들은 아이들에게 간섭하지 않는 태도의 긍정적 가치를 너무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 버트런드 러셀
<p.88>
아이가 똑똑하다고 세상에 내놓는 바로 그 순간부터, 아이 앞에는 외롭고 힘든 나날이 열릴지도 모른다. 또한 그로 인해 득보다 실이 많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현명한 부모라면 아이가 똑똑하다고 무조건 그것을 광고할 일은 아니다. 감출 건 아이 자신조차 모르게 감추면서, 그 안에서 아이의 능력을 살리는 게 더 옳은 길이 아닐까 싶다.
<p.92>
지능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을 말한다.
- 피아제Piaget
<p.96>
특히 도스토예프스키Dostoevskii의 <죄와 벌>을 인상 깊게 읽던 나는 인간의 굴레에 대해 생각하다가 문득 나 자신의 굴레는 무엇일까 고민하게 되었다. 결론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여자로 태어난 것'. 나는 그때 그 굴레로부터 조금이라도 자유로워질 수 있는 일을 갖겠다고 마음먹었고, 그래서 생각한 직업이 의사였다.
원래 다방면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학교 시험이 지겨워 공부하기를 싫어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의사가 되기 위해 일단 우수한 성적이 필요하다는 목적이 생기자 자연히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되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시험용 공부의 특성을 파악하고, 예상 문제를 뽑아 보는 일에 능숙해졌다는 게 맞을 거다. 학교 성적을 올리는 공부와 진정으로 나의 내적인 사고력을 키워 가는 공부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학습을 '살아가는 방식(a way of life)', 즉 세상과 부딪치고 거기에 적응해 나가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엄마들은 학습이라고 하면 머리라는 창고에 새로운 지식을 채우고 보존하는 것으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머리에 온갖 지식을 쌓으면 뭐하겠는가. 새로운 상황에 놓였을 때, 그동안에 쌓아 둔 많은 지식을 활용하여 주체적으로 해결해 나가지 못하면 헛공부한 거나 다름없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학습은 결코 책상머리에 앉아 반짝 공부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다. 학습은 결국 주변으로부터의 자극, 그에 대한 수용, 끊임없는 사고를 통해 평생 얻어 가야 할 성질의 것이다.
<p.122>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말하지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당장 한 치 앞을 예측하기가 어렵다.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빠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래 사회에서는 위기가 찾아왔을 때, 그걸 제대로 소화하여 역으로 활용할 줄 아는 지혜가 꼭 필요하다. 즉 위기가 닥쳤을 때 그 상황을 정확히 직시한 다음, 그것을 논리적인 사고력으로 분석하고, 어떻게 해결할지 방안을 찾아 마지막으로 실행에 옮기는 능력, 다시 말해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이다. (...)
그러므로 내 아이가 "엄마 어떻게 해?" 하고 물어 오거든 무조건 덮어놓고 "엄마가 해 줄게" 하고 다가서지 말라. 오히려 아이가 제 스스로, 논리적으로 문제를 풀어가게끔 격려해 주고 다독여 주어라. 현명한 위기관리법은 아이가 앞으로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꼭 갖춰야 할 중요한 무기 중의 하나니까.
<p.136>
우리는 어린이에 대해 전혀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재 지니고 있는 그릇된 생각을 바탕으로 하여 논의를 진행시켜 간다면 앞으로 나아갈수록 우리들은 더 그릇된 방향으로 빠지게 될 것이다. 가장 현명한 사람들조차도 어른들이 알아 두어야 할 중요한 일에만 전념하는 나머지 어린이들이 현재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에게는 아이 특유의 사물을 보는 법, 생각하는 법, 느끼는 법이 있다. 그런데 그들의 방법 대신 어른들이 보는 법, 생각하는 법, 느끼는 법을 가르쳐 주려고 하는 것처럼 분별없는 짓은 없다. 따라서 열 살 된 아이에게 판단력을 요구하는 것은, 아이에게 6척의 키를 요구하는 것과 같다.
- <에밀>, 루소
<p.149>
"아이가 먼저 동기를 갖기 전에 미리 부모들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제공하면 아이는 하고 싶고 되고 싶은 게 없는 아이로 성장할 우려가 있다."
-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조한혜정 교수
<p.152>
인생의 일할을
나는 학교에서 배웠지
아마 그랬을 거야
매 맞고 침묵하는 법과
시기와 질투를 키우는 법
그리고 타인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는 법과
경멸하는 자를
짐짓 존경하는 법
그중에서도 내가 살아가는 데
가장 도움을 준 것은
그런 많은 법들 앞에 내 상상력을
최대한 굴복시키는 법
- <학교에서 배운 것> 유하
<p.162>
경모의 그런 변화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렇다. 사회라는 틀에 자신을 제대로 맞출 줄 알게 된 것.
단순히 틀에 자신을 가두는 게 아니었다. 즉, 스스로를 버려 가며 틀에 맞추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도 자신의 욕구를 이룰 줄 안다는 걸 의미했다. 외부의 요구를 받아들이면서도 자신 또한 버리지 않는 것. 그것이 곧 틀에 '제대로' 맞추는 것이다.
처음에 경모는 마지못해 억지로 따라왔다. '잘못하면 엄마에게 혼나니까, 선생님께 야단을 맞아야 하니까'가 그 이유의 전부였다. 그런데 한 3년 이러저러한 경험을 하는 동안 그 '억지로'가 '스스로'로 바뀌어 있었다.
만일 경모가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버렸더라면 "잘못하면 늦겠다"는 식의 말은 절대 하지 못했을 것이다. 따르긴 따를지언정 그것이 결코 자발적이지는 못했을 거란 얘기다.
내가 학교라는 곳을 부정하고 과연 내 아이를 맡길 곳인가 의심하는 순간에, 경모는 바로 그 학교에서 '틀 안에서 자유롭게 적응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그것은 경모가 나중에 사회생활을 해 나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바탕이 될 것임에 분명했다.
나는 경모의 그런 변화가 학교라는 공간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거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이해관계 없이 사람과 사람이 순수하게 만나 관계를 맺고 교류하고 타협하는 것, 그리고 정해진 틀에 따르면서도 즐거움을 찾는 것은 학교가 아니면 그 어느 곳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일이다.
<p.169>
어느 날인가 너무 힘들어서 일이냐, 아이냐를 놓고 고민하다가 우연히 미국의 한 잡지를 보게 되었는데 한 줄의 문구가 나를 붙잡았다.
'저주(Curse)냐, 축복(Blessing)이냐.'
그것은 아이를 갖는다는 것이 직장 생활을 하는 젊은 여성에게 저주가 될 것인가, 축복이 될 것인가란 내용이었다.
'아이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축복받을 일이지 절대 저주받을 일이 아니다. 만약 저주로 끝난다면 내 아이가 너무나 불쌍하다. 그 아이가 무슨 죄인가. 가장 사랑받아야 할 엄마에게 '엄마의 인생을 망친 장본인이 바로 너다'라는 원망을 들어야 하다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나를 위해서건, 아이를 위해서건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다는 결심이 섰다.
<p.196>
그런데 대부분의 부모가 자기 기분이야 어떻든 간에 아이만 바라본 채, 말로 달래 보고 안아 줘도 보다가 결국은 화를 내고 손을 대고야 마는 판에 박힌 과정을 되풀이한다. 그럴 때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화를 누르고 이성을 찾는 것은 부모의 아이큐나 지적인 면에 달려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오히려 지성인이라고 칭하는 사람들이 아이를 함부로 대하고, 있는 대로 자기감정을 내세우는 경우를 많이 본다.
감정 조절은 절대적인 훈련과 노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물론 선천적으로 감정 조절이 잘 되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아이 기르는 일 자체가 워낙 인내와 희생이 따르는 일이다 보니 인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워낙 다혈질인 내가 감정 조절을 위해 선택하는 것은 음악 감상이다. 평소 등산 등 운동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여건일 때를 대비해 마련한 차선책이다. 차분한 음악을 듣고 있으면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되는 것을 느낀다.
<p.237>
하지만 그런 모든 것들을 배제하고 나서라도 우선되어야 하는 건, 아이로 하여금 학습을 긍정적이고 재미있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어릴 때 형성되어 평생 이어진다. 바꿔 말하면 학습에 들어가는 첫 단계에서 자칫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면 평생 공부를 원수처럼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적어도 공부에 대해 흥미를 잃게 되는 상황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다.
<p.248>
하지만 이것이 가능하려면 아이와 부모 사이에 신뢰가 있어야만 한다. 부모가 어떤 원칙을 일방적으로 가르칠 때, 즉 '훈육'을 해야 할 순간에 평소 혼만 내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그 말을 그저 잔소리로 흘려듣는다. 그런 아이들이 자라 사춘기가 되면 부모 말을 코웃음으로 흘려버리는 '괴물'이 되고 만다.
하지만 평소에 부모와 타협을 하고 부모의 배려를 자주 느낀 아이는 부모가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강요할 때, 설령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정말 그래선 안 되는구나' 하고 진심으로 따른다. (...)
아이가 자라면 자랄수록 부모는 아이가 하기 싫은 것들, 지키기 싫은 것들을 가르치게 된다. 그런 훈육이 아이에게 제대로 전달되는, 다른 사람 말을 안 들어도 부모 말은 듣게 하는 그 힘은, 초기에 부모가 아이의 말을 끊임없이 들어주고 배려하던 자세에서 비롯된다.
우리 아이들은 내가 가끔 매를 들더라도 그 이유를 제대로 안다. 정말 잘못한 게 있기 때문에 혼나는 것이지, 절대 엄마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내가 만약 아이들을 협상 테이블로 이끌어 절충안을 모색하는 연습을 게을리했더라면, 그런 결과를 얻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p.257>
답은 하나다. 약간 부족한 듯할 때까지가 그 한계선이다. 그리고 채워지지 않은 그 나머지 부분이 바로 '여백'이 된다. 그 여백으로 인해 아이는 자기가 배운 것들을 갖고 혼자 궁리도 해 보고 자기 생활과 연결도 해 보며 나름대로 소화도 시킨다. (...)
'여백의 미'에 대해 알게 된 다음부터 나는 정모에게 이것저것 더 가르칠 생각을 아예 버렸다. 그 시간에 차라리 혼자 제 마음껏 상상하며 놀도록 내버려 둔다. 어릴 때 우리가 하늘에 떠가는 구름이나 벽지에 그려진 그림들을 보며 상상의 세계에 빠져들었던 시간들을 정모에게도 갖게 하려는 거다.
<p.276>
요즘 5살 남자아이를 키우면서 드는 모순적인 생각이 있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아이를 키우려고 하는 것이 올바른 일인가라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아이를 키우고자 할수록 아이에 대한 욕심이 스멀스멀 커지기 때문이다. 얘기를 좀 더 자세히 풀어보자면 나는 내 아이가 나의 분신과도 같다는 생각이라던지,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으로 키워내고 말겠다는 욕심 같은 건 없다. 그러나 아이가 꼭 배웠으면 하는 것들은 있다. 자기 주도능력이나 자기 조절능력, 어른들에 대한 예의와 바른 심성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5살인 아이의 뇌는 백지에 가깝고 본능은 동물과도 같다. 나와 아내는 아이에게 꼭 필요한 것을 알려주고자 여러 책을 읽고 전문가들의 얘기를 참고한다. 요즘은 어른을 공경하는 태도와 참고 기다리는 방법 등을 알려주는데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가 달라지는 모습을 보면 내심 뿌듯한 마음이 든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모순적인 생각의 원인이 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것은 아이가 내 마음대로, 혹은 내가 가르치고 지도하는 대로 달라지는 것을 볼수록 아이를 더 통제하려 하고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 실망을 하거나 그것을 바로잡고자 노력한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고민한다.
부모의 지도와 통제는 어느 정도까지 용인 가능한가? 미성년자인 아이에 대한 부모의 지도와 통제의 범위가 커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이의 하루 일과와 먹을거리, 교육과 향후 진로까지 일일이 지도한다. 특히 나를 포함한 요즘 부모는 그런 경향이 더 있는데, 과거에 비해 늘어난 경제적, 시간적 여유 때문인지 아이에게 많은 공을 들이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나는 이것을 나쁘다고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 매일 같이 바쁜 부모 때문에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거나 혼자 장난감을 가지고 노느라 심심했던 아이들에 비하면 당연히 더 건강한 간식을 챙겨주고 시간을 내어 놀이공원에 가거나 박물관에 가는 것이 아이는 물론 부모에게도 더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이의 생활과 인생에 많은 신경을 쓰고 공을 들일수록 자연스레 아이에 대한 기대가 생기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아빠와 축구를 하다가 축구를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는 말에 아이를 축구 학원에 등록해 줬다면 아이의 축구 실력이 늘 것을 기대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부모로서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는 오히려 축구 학원 때문에 아이가 축구를 싫어하게 되었다던가, 축구 학원을 다녀도 축구 실력은 그대로라던가, 실력이 늘긴 늘었는데 아빠의 기대와 학원비에는 못 미치는 정도라던가 하는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다. 비슷한 예로, 아이가 건강하게 자랐으면 하는 마음에 인스턴트 음식을 제한하고 값비싼 유기농 식단으로 시간과 정성을 들인 요리로 식탁을 채워도 아이는 여전히 감기에 걸리고 또래와 비슷한 키로 자라며 부모 몰래 친구들과 인스턴트 음식을 먹는다. 부모는 아이를 위해 많은 노력과 비용을 들이며 자신을 희생한다. 그러면 내 노력이 투입된 만큼의 결과에 대한 기대를 갖게 되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린 때때로 '내가 너를 위해 뼈 빠지게 일해서 돈을 버는데' 라던지, '내가 너를 위해 잠도 못 자고 집안일이며 요리를 하는데' 같은 말들을 하곤 한다. 그러나 아이는 게임 속 캐릭터나 자기 자신, 혹은 내가 맡은 업무 같은 게 아니기 때문에 그 많은 비용과 노력이 반드시 결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노력과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나기도 하고, 나타나더라도 당장 몇 년 안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성인이 되고, 어쩌면 부모가 죽은 뒤에 그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아이에게 많은 비용과 노력을 들이지 말아야 할까? "우리 때는 돈 벌고 집안일하느라 바빠서 너희들한테 제대로 신경도 못 썼어. 그래도 너희들이 알아서 잘 커줬지."라고 말하는 우리 세대 부모님들처럼 우리도 아이들에게 신경을 좀 덜 써야 할까? 이 부분에서 나는 어쩌면 의식적으로 부모의 노력과 비용을 제한할 필요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마치 지나치게 발달된 컴퓨터 성능을 소프트웨어가 필요와 상황에 맞게 일부러 제한하듯이, 인간의 욕망과 기대가 부작용을 일으키지 않도록 나의 노력을 의식적으로 제한하는 것이다. 전반적인 삶의 질이 올라가 금전적, 시간적 여유가 생긴 요즘 부모들은 (나를 포함하여) 자신의 가용 자원을 최대한 자녀에게 쏟아붓는다. 최대의 노력과 자원을 투입하면 보다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삶의 대부분의 일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아이를 키우는 일에 있어서는 조금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때로는 적당한 무관심, 적당한 결핍이 아이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우고, 제한된 환경에서 스스로 행복해지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사실 이는 부모를 위해서도 더 필요한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이 아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했어'라는 생각은 부모와 자식 모두에게 짐이 될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둘의 관계까지 망가뜨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갖게 된 모순적인 생각에 대한 해답은 결국 세상에서 가장 어렵다는 '적당히'가 아닌가 싶다. 수학적으로 정의 내려보자면, 육아의 결과는 부모가 들인 시간, 노력, 비용에 따라 장기적으로 봤을 때 대체로 비례하여 증가한다. 그러나 단기적으로 봤을 때 증가하는 기울기(속도)는 아이마다 다르다. 또한 선형적이거나 점진적이지 않을 수도 있고, 때로는 오히려 감소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부모가 투입한 시간, 노력, 비용은 특정 임계점을 지나면 오히려 부모와 아이 모두에게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므로 부모의 입장에서 아이에게 시간, 노력, 비용을 들일 때는 그 정도가 자신의 역량을 넘어설 정도로 지나치지 말아야 하며, 아이에게 나타나는 결과값을 단기적으로 바라보며 일희일비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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