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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이 싫어서 > 장강명, 2015

by Ditmars 2023. 6. 28.

<한국이 싫어서> 장강명, 2015

 

 가만 생각해 보면 지금 그렇게 고생하며 회사에 다니는 것도 예순부터 여든까지 좀 편히 살려고 그러는 거잖아.

<p.15>

 

 한국에서 회사 다닐 때는 매일 울면서 다녔어. 회사 일보다는 출퇴근 때문에. 아침에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아현역에서 역삼역까지 신도림 거쳐서 가 본 적 있어? 인간성이고 존엄이고 뭐고 간에 생존의 문제 앞에서는 다 장식품 같은 거라는 사실을 몸으로 알게 돼.

<p.16>

 

 "이상형을 너무 일찍 만나는 건 굉장히 안 좋은 일인 것 같아. 내가 지금 서른 중반이라면 아무것도 망설이지 않았을텐데. 분명히 너랑 결혼해서 한국에 남는 편을 택했을 거야."

<p.62>

 

 내가 어렸을 때 아현시장은 굉장히 번창한 곳이었어. 주말이면 장 보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어. 거기서 장사 몇 년 하면 금방 부자 된다고 했어. 시장에 갈 때마다 엄마가 나랑 예나를 데려가 짐을 들게 하면서 시장 입구에서 도넛이나 고로케를 사 주셨어. 그래서 그 가게 할머니를 잘 알았지. 그런데 그 도넛 파는 할머니가 부자가 된 것 같지는 않아. 아현시장은 이제 썰렁해. 요새 누가 재래시장에 가? 한국이 선진국이 됐다고, 서울이 옛날이랑 몰라보게 달라졌다고 하는데, 어떤 동네, 어떤 사람들은 옛날 그대로야. 나아지는 게 없어. 내가 그냥 여기 가만히 있는다고 더 나아질 거라는 보장은 아무 데도 없어.

<p.103>

 

 "처음에는 어이없다고 생각했는데, 듣고 보니 그것도 괜찮겠다 싶네. 아무리 우리가 호주에서 사는 게 급선무이긴 해도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 살 수는 없는 거잖아. 자기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아야지. 우리 호주에 온 지 고작 2년이잖아. 그게 아깝다고 진로를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 잘못인 거 같아.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 대학 다닌 거나 고등학교 다닌 거나 지금 이 자리에 서는 데에는 아무 도움도 안 됐고 다 낭비였지, 뭐."

<p.109>

 

 사실 지루한 얘기는 두 가지뿐이었어. 은혜 시어머니 이야기, 그리고 미연이 회사 이야기. 그런데 은혜랑 미연이 그 두 얘기를 너무 오래 하는 거야. 몇 년 전에 떠들었던 거랑 내용도 다를 게 없어. 걔들은 아마 앞으로 몇 년 뒤에도 여전히 똑같은 얘기를 하고 있을 거야. 솔직히 상황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 자체가 없는 거지. 걔들이 원하는 건 내가 "와, 무슨 그럴 쳐 죽일 년이 다 있대? 회사 진짜 거지같다, 한국 왜 이렇게 후지냐."라며 공감해 주는 거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냐. 근본적인 해결책은 힘이 들고, 실행하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니까. 회사 상사에게 "이건 잘못됐다."라고, 시어머니에게 "그건 싫다."라고 딱 부러지게 말하기가 무서운 거야. 걔들한테는 지금의 생활이 주는 안정감과 예측 가능성이 너무 소중해.

<p.121>

 

 "예나야, 너 비행기에서 낙하산 메고 떨어지는 거랑, 빌딩 꼭대기에서 낙하산 메고 떨어지는 거랑, 어느 게 더 위험한지 알아?"
 "어느 게 더 위험한데?"
 내 동생은 뭔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뜨악한 표정이었지.
 "빌딩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게 훨씬 더 위험해. 높은 데서 떨어지는 사람은 바닥에 닿기 전에 몸을 추스르고 자세를 잡을 시간이 있거든. 그런데 낮은 데서 떨어지는 사람은 그럴 여유가 없어. 아차, 하는 사이에 이미 몸이 땅에 부딪쳐 박살나 있는 거야. 높은 데서 떨어지는 사람은 낙하산 하나가 안 펴지면 예비 낙하산을 펴면 되지만, 낮은 데서 떨어지는 사람한테는 그럴 시간도 없어. 낙하산 하나가 안 펴지면 그걸로 끝이야. 그러니까 낮은 데서 사는 사람은 더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조심해야 해. 낮은 데서 추락하는 게 더 위험해."

<p.124>

 

 "너 그렇게 영어 배우고 호주 시민권 따는 동안에 나는 뭐 했나 싶다."
 은혜가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어.
 "아직 시민권은 못 땄어. 너는 애를 낳았잖아. 그게 얼마나 큰 건데."
 내가 말해 줬어.
 "애야 다들 낳는 거고. 아, 진짜 난 뭘 했나 몰라. 결혼을 이렇게 일찍 하는 게 아니었어."
 "야, 솔직히 너처럼 확실한 집에 시집가는 게 어중간한 회사에 취직하는 것보다 백배 나아. 결혼도 타이밍이 있는 거고, 넌 아주 기회를 잘 잡은 거라니까? 나야말로 그동안 뭘 했는지 모르겠어. 내가 이 회사에서 임원 달아 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찐하게 연애를 해 봤나 진탕 놀기를 해 봤나, 이제 곧 서른둘인데 지금부터 남자 만나서 사귀면 언제 결혼하고 언제 애 낳냐?"

<p.145> 

 

 한국에서 살아도 그냥 전업주부로 살고 싶지는 않았거든. 딱히 어떤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고 한국의 구직 시장이 어떤지도 몰랐어. 그래도 일은 하고 싶었어. 은혜도 그렇고 학생 때는 똑똑하던 여자애들이 집 안에 특어박혀 있으면서 바보 되는 거 많이 봤거든. 밖에 나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고 부딪치고 그러지 않으면 되게 사람이 게을러지고 사고의 폭이 좁아져. 다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할 줄 모르게 되고. 난 그렇게 되기 싫었어.

<p.147>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건데, 내가 뭘 하겠다고 나서건 그게 성공할지 성공 안 할지는 몰라. 지금 내가 의대 가서 성형외과 의사 되면, 로스쿨 가서 변호사 되면, 본전 뽑을 수 있을까? 아닐걸? 10년 뒤, 20년 뒤에 어떤 직업이 뜰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러니까 앞으로 전망 얘기하는 건 무의미한 거고, 내가 뭘 하고 싶으냐가 정말 중요한 거지. 돈이 안 벌려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좀 덜 억울할 거 아냐. 지명이가 그렇게 자기 진로를 선택한 거지. 난 내가 뭘 하고 싶은지를 몰랐어.

<p.152>

 

 우리는 뭐랄까. 전래 동화의 의좋은 형제 같은 처지에 빠져 있었지. 지명이는 나를 아껴. 나도 걔를 위하고.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우리 사이에 개선되는 건 아무것도 없고, 밤에 서로 상대 몰래 볏짚을 나르느라 몸만 피곤한 상황이었지. 언젠가는 우리가 달빛 아래 볏짚을 든 채 마주치게 돼 있었어.

<p.154>

 

 지명과 두 번째 이별을 결심할 때 고민을 많이 했지. 내가 얘랑 헤어진 다음에 후회하지 않을까 하고. 아마 후회할 거야. 내가 만난 남자들 중 지명이가 제일 괜찮은 애였는데, 하고. 그런데 걔랑 헤어지지 않고 같이 살아도 나중에 결국 후회할 거야. 그때 내가 호주로 떠나야 했는데, 하고. 나라는 인간은 뭔가를 이루겠다는 뚜렷한 목표 같은 건 없으니까, 아마 어떻게 살건 간에 내가 살아 보지 않은 길에 대해 후회를 할 수밖에 없을 거야. 그리고 영영 알 수 없겠지... 어떤 선택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왔을지를.

<p.158>

 

 지명이랑 같이 이어서 안 좋은 점은, 일단 걔랑 있으면 내가 너무 슬퍼질 거 같더라. 두 번째는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가 없다는 거. 전업주부가 아니라 내가 직장이 있어도 경제적으로 독립하긴 어려울 것 같더라고. 전에 한번은 지명이한테 "너는 왜 매일 퇴근이 늦냐, 평생 그러게 야근을 해야 하는거냐?" 하고 따지니까 걔가 이렇게 대답하더라고.
 "다들 이렇게 살아. 다른 회사도 그래. 요즘 저녁 시간 전에 퇴근하는 사람이 학교 선생 말고 누가 이냐? 너도 취직하면 알 거야."
 "호주에선 안 그래."
 내가 반박했지.
 "호주에서도 그럴걸. 너도 호주에서 제대로 된 사무직 일은 해 본 적 없잖아. 호주에서도 기업 임원이나, 펀드매니저나, 변호사, 의사 같은 사람은 정신없이 바쁠걸?"
 그러니까 바꿔 말하면 기자나 기업 임원이나 펀드매니저나 변호사, 의사 같은 '진짜 직업'들이 있고, 그 아래 별로 중요하지 않은 다른 직업들이 있다는 거지. 내가 직장에 다니더라도 그게 토플 문제지나 조선 업체 정보지를 만드는 일이라면 지명이는 아마 그걸 '진짜 직업'으로 인정하지 않을 거야. 나는 그냥 살림하는 여자인 거지. 그런 건 싫어. 

<p.159>

 

 "사람은 가진 게 없어도 행복해질 수 있어. 하지만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행복해질 순 없어. 나는 두려워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

<p.160>

 

 밥을 먹는 동안 나는 행복도 돈과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 행복에도 '자산성 행복'과 '현금흐름성 행복'이 있는 거야. 어떤 행복은 뭔가를 성취하는 데서 오는 거야. 그러면 그걸 성취했다는 기억이 계속 남아서 사람을 오랫동안 조금 행복하게 만들어 줘. 그게 자산성 행복이야. 어떤 사람은 그런 행복 자산의 이자가 되게 높아. 지명이가 그런 애야. '내가 난관을 뚫고 기자가 되었다.'는 기억에서 매일 행복감이 조금씩 흘러나와. 그래서 늦게까지 일하고 몸이 녹초가 되어도 남들보다 잘 버틸 수 있는 거야.
 어떤 사람은 정반대지. 이런 사람들은 행복의 금리가 낮아서, 행복 자산에서 이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아. 이런 사람은 현금흐름성 행복을 많이 창출해야 돼. 그게 엘리야. 걔는 정말 순간순간을 살았지. 
 여기까지 생각하니까 갑자기 많은 수수께끼가 풀리는 듯 하더라고. 내가 왜 지명이나 엘리처럼 살 수 없었는지, 내가 왜 한국에서 살면 행복해지기 어렵다고 생각했는지.
 나는 지명이도 아니고 엘리도 아니야. 나한테는 자산성 행복도 중요하고, 현금흐름성 행복도 중요해. 그런데 나는 한국에서 나한테 필요한 만큼 현금흐름성 행복을 창출하기가 어려웠어. 나도 본능적으로 알았던 거지. 나는 이 나라 사람들 평균 수준의 행복 현금흐름으로는 살기 어렵다, 매일 한 끼만 먹고 살라는 거나 마찬가지다, 하는 걸.
 미연이나 은혜한테 이런 걸 알려 주면 좋을 텐데. 걔들은 방향을 완전히 잘못 잡고 있어. 시어머니나 자기 회사를 아무리 미워하고 욕해 봤자 자산성 행복도, 현금흐름성 행복도 높아지지 않아. 한국 사람들이 대부분 이렇지 않나. 자기 행복을 아끼다 못해 어디 깊은 곳에 꽁꽁 싸 놓지. 그리고 자기 행복이 아닌 남의 불행을 원동력 삼아 하루하루를 버티는 거야. 집 사느라 빚 잔뜩 지고 현금이 없어서 절절 매는 거랑 똑같지 뭐.
 어떤 사람들은 일부러라도 남을 불행하게 만들려고 해. 가게에서 진상 떠는 거, 며느리 괴롭히는 거, 부하 직원 못살게 구는 거, 그게 다 이 맥락 아닐까? 아주 사람 취급을 안 해주잖아.
 난 그렇게 살지 못해. 그렇게 살고 싶지도 않고.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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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줄거리를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집안에서 둘째딸로 태어난 주인공 '계나'가 한국이 싫어서 대학 졸업 후 호주로 이민 가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다. 화자(계나)가 마치 친구한테 이야기하듯이 1인칭 시점으로 소설이 전개되어 더 실감 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왜 한국이 싫어졌을까? 책을 끝까지 읽어도 콕 집어 '이것 때문이다'라고 명확하게 말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재미있는 건 소설을 읽다 보면 한국이 싫어진 그녀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전작에서도 느꼈지만 작가는 작품 속에 대한민국에 사는 젊은 세대의 현실을 잘 반영한다. 그리고 문제의 본질을 잘 꼬집어 작품 속 대화나 이야기 속에 심어놓는데 그 부분을 읽게 될 때마다 통쾌한 마음이 든다. 아마도 이런 코드가 잘 맞아 내가 장강명 작가의 책을 좋아하나 보다.

 

 고인물 게임이라는 말이 있다. 게임이 출시된 뒤 어느 순간부터 신규 유저의 유입이 사라져 초창기 때부터 게임을 한 '고인물' 유저끼리만 하는 게임을 뜻하는 말이다. 이 게임은 크게 세 가지의 특징이 있다. 첫째, 초보자 사냥터와 초보자 마을에 사람이 없어 활기가 없다. 둘째, 신규 유저가 아무리 노력해도 이미 높은 레벨에 고급 아이템을 가지고 있는 고인물 유저를 따라잡을 수 없다. 셋째, 게임이 오래 되다 보니 어떤 직업이 유리한지, 어떤 능력치나 스킬을 올리는 것이 좋은지 정형화된 공략집이 있다. 그리고 나는 대한민국이 마치 고인물 게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인물 게임의 세 가지 특징을 한국에 대입해보면 아래와 같다. 

 

 첫째, 고인물 게임에서는 신규 유저의 유입이 없어 초보자 사냥터에 활기가 없다고 했는데 이를 현실에 적용하면 결국 대한민국에 새로 태어나는 아기가 없다는 뜻이다. 실제로 대한민국에서는 출산율이 갈수록 줄어들어 단지 내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찾아볼 수가 없고 나아가 초등학교가 폐교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고인물 게임에 왜 신규 유저의 유입이 없는지를 생각해보면 어쩌다 대한민국의 출산율이 이 지경이 되었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오랜 기간 RPG 게임을 즐긴 유저 중 한 명으로서 생각하는 신규 유저의 유입이 없는 이유는 무엇보다 게임이 재미가 없어서다. RPG 게임의 큰 재미는 캐릭터를 성장시키고 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게임의 유일한 재미는 아니다. 캐릭터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게임의 스토리를 이해하고 즐기는 것도 재미 중 하나이고, 새로운 맵이나 몬스터를 개척하는 것도 재미이고, 아이템을 모으고, 퀘스트를 깨고, 이벤트를 하고, 다양한 유저와 친구가 되는 것 역시 재미이다. 그러나 고인물 게임의 경우에는 게임 제작사나 유저들이나 모두 레벨을 올리고 캐릭터가 강해지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그 외에 게임을 재미있게 만들 수 있는 다양한 컨텐츠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투자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습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모습과 비슷하다. 우리의 삶 속에도 다양한 모습의 재미와 행복이 있다. 사람에 따라 원하는 행복도 다르고 그것을 추구하는 방식도 다르다. 그러나 대한민국 사회가 만드는 행복의 이미지와 대중들이 바라는 삶의 행복은 결국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는 것이다. 마치 고인물 게임에서 캐릭터의 레벨을 올리는 것이 유일한 재미라고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 좋아하는 취미를 여러 개 갖는다거나, 남을 돕는 봉사를 통해 삶의 기쁨을 느낀다거나, 세계 여행을 한다거나, 많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등의 다양한 삶의 행복 추구 방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그것들에 관심이 별로 없다. 사회가 나서서 그런 삶의 모습을 긍정하고 장려하지 않으니 대중 사이에서는 부자 되는 삶에 대한 갈망이 더 심해진다. 결국 신규 유저, 즉 새로운 생명을 세상에 내보낼 젊은 세대 입장에서는 부자 되는 것이 유일한 목표이자 재미가 되어 버리고 그 외 다양한 삶의 행복에 대해서는 아무도 인정하지 않고, 재미를 느낄 수 없게 만든 대한민국 사회에서 캐릭터를 새로 키우지 않기로 선택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선택이다.

 

 둘째, 고인물 게임에서는 신규 유저가 아무리 노력해도 이미 고레벨이 되어 희귀한 아이템을 가지고 있는 고인물 유저를 따라잡을 수 없다고 했다. 이를 현실에 적용하면 지금의 젊은 세대나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직업을 갖고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번다고 해도 이미 사회의 대부분의 부를 소유하고 있는 기성세대만큼 잘 살 확률이 거의 없다는 것과 같다. 서버가 최초로 생긴 시점에는 모두가 레벨 1부터 시작했고 가지고 있는 아이템도 같았다. 그때는 누가 더 게임을 잘하고 누가 더 게임을 많이 하는지에 따라 캐릭터의 성장 속도가 달랐다. 열심히 하면 서버 내에 몇 개 없는 희귀 아이템을 손에 넣을 수도 있었고, 좋은 아이템을 떨구는 보스 몬스터도 잡을 수 있었다. 게임 속 한정된 자원을 누가 먼저 소유하는지는 개인의 노력의 여하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최초로 게임을 시작한 유저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레벨이 오르고 게임 속 한정된 부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 게임을 새로 시작한 신규 유저들은 서버가 최초로 생긴 시점에서 현재에 이르는 간극을 더 이상 노력이나 실력으로 따라갈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규 유저가 급속도로 성장하여 기존의 유저들과 같은 경지에 오르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대개 친한 고레벨의 유저로부터 쩔을 받거나(낮은 레벨의 캐릭터와 파티 사냥을 하여 경험치를 나누어주는 것) 그들이 쓰던 희귀 아이템을 물려받거나, 현질을 하거나, 운이 좋게 희귀 아이템을 얻어 캐릭터 성장에 쓰일 게임 머니를 버는 경우이다. 결국 현실에서도 권력과 부를 소유한 기성세대로부터 도움을 받거나 억세게 운이 좋아 주택 청약이 된다던지 로또에 당첨되어야 젊은 세대가 기성세대와 비슷한 수준의 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현실의 젊은 세대가 부동산, 코인 열풍에 편승하는 것은 그들이 경제관념이 없거나 나태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현실에서 기성세대의 부를 따라잡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자본주의 사회로써 첫 발을 내딛을 당시와 이미 고인물이 되어 버린 현재까지의 시간 동안 사회의 부는 점점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왔고 그 속도는 이미 개인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추월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결국 이 게임을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고인물 유저거나 고인물 유저가 만든 새로운 캐릭터들 밖에 없다.

 

셋째, 고인물 게임에는 유리한 직업과 유리한 능력치, 스킬, 아이템이 공략되어 있다고 했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도 성공을 위한(혹은 부자가 되기 위한) 루트가 정해져 있다는 뜻과 같다. 우리 사회의 성공 루트는 무엇인가. 그것은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2023년 현재는 의대 입학이 성공을 위한 루트이자 공략인 것 같다.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의대 준비를 위한 학원에 들어가고 초중고 12년 동안 치열한 입시 경쟁을 거쳐 의대에 입학하기 위해 사람들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 대부분의 게임에도 공략이 있다. 그리고 공략은 버전 업데이트에 따라 조금씩 수정되어 왔다. 예를 들어, 이번 버전에서는 마법사의 스킬이 대폭 강화되어 보스 몬스터를 잡아 아이템을 획득하는데 유리해졌기 때문에 새로 키우는 캐릭터는 마법사로 전직시키고, 그에 해당하는 능력치인 마나와 지력을 올려야 한다는 공략, 전사는 엄청난 고레벨이 아닌 이상 파티 사냥에 껴주지 않고 직업에 맞는 아이템도 훨씬 비싸니 든든한 빽이 있지 않는 이상 선택하면 안 된다는 공략 등. 우리 사회에서 예체능 하려면 집안에 돈이 많아야 한다, 뭐니 뭐니 해도 공무원이 최고다, 문과는 취업하기 어렵다 등 숱하게 회자되는 얘기들이 어떻게 보면 대한민국 인생 공략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실제로 내가 했던 게임 중에 하나는 게임 초기에 특정 직업이 사기라고 불릴 정도로 강하게 설정되어 있어 초보자 마을에 온통 그 직업의 유저들만 바글바글 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사냥터에도 그 직업의 유저만 가득했다. 모두가 같은 스킬을 쓰고 같은 능력치를 올리면서 몬스터를 하나라도 더 잡기 위해 경쟁했다. 해당 직업 전용 아이템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레벨이 오르면서 모두가 똑같은 아이템을 착용하여 아이디만 다를 뿐 전부 똑같은 모습을 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택은 둘 중에 하나다. 이 게임에 뛰어들어 똑같은 직업을 선택하고 치열한 경쟁에서 이겨 1등이 되거나 아예 게임을 하지 않는 것이다. 삶의 행복과 성공을 위한 루트가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대학에 진학해 좋은 직장에 취업하는 것 하나로 규정되어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게임도 마찬가지다. 이 경쟁을 뚫고 의대에 입학하거나 대기업에 취직할 수 있을 것 같다면 신규 유저가 되어 게임을 시작하도록 돕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아무도 게임을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고인물 게임은 이 사태를 어떻게 대처하고 있을까. 게임사는 신규 유저 유입을 늘리기 위해 여러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대표적인 게 '성장패키지'와 '확률상자'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성장패키지는 신규 유저가 일정한 레벨까지 쉽게 성장할 수 있도록 레벨업에 도움이 되는 경험치 추가 획득이라던지 아이템을 무료로 제공하는 것이다. 확률상자는 매일매일 랜덤한 확률로 캐릭터를 키우는데 필요한 돈이나 아이템을 주는 것이다. 현실에 대입해보면 어떨까.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신혼 부부들의 출산을 장려하기 위해 집을 빌려주거나 출산지원금을 주고, 청년들의 자립을 위한 보조금을 준다. 이는 마치 게임 속 성장패키지와 비슷하다. 확률상자와 비슷한 건 아직 없는 듯 하지만 이번 흑석 자이 무순위 줍줍에 80만 명 이상의 지원이 있었던 걸 보면 분양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추첨제가 일종의 확률상자 같은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어쩌면 앞으로 비슷한 개념의 정책이 도입될 지도 모르고.

 

 결론적으로 고인물 게임이나 우리나라나 젊은 세대의 유입을 늘리고 기성세대와의 갭을 메꾸기 위해 선택한 방식은 직접적인 부의 재분배와 사회적 행운 개념의 도입이다. 이 자체가 어떻게 보면 개인의 노력으로 그 갭을 뛰어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에 대한 인정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아쉬운 건 글의 서두에 밝혔듯이 게임을 재밌게 만드는 다른 콘텐츠에 대한 투자와 지원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다양한 삶의 방식에 대해 인정하지 않고 서로 다른 행복 추구를 존중하지도 않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사람들로 하여금 인생의 다양한 면면들을 보지 못하게 하고 있다. 신규 유저들은 알량한 성장패키지와 확률상자에 혹해 게임에 뛰어드는 바보가 아니다. 게임이 할만하고 재미있어 보이면 하지 말라고 해도 하는 게 신규 유저다. 젊은 세대도 마찬가지다. 출산장려금이니 청년보조금이니 하는 지원에 아이를 낳고 기르는 사람은 없다. 대한민국이 아이들에게 살만하고 행복할 수 있는 곳이면 낳지 말라고 해도 낳는다. 게임사는 게임을 즐기는 다양한 재미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고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는 삶의 다양한 방식의 행복과 재미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