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필론이 한번은 배를 타고 여행을 했다. 배가 바다 한가운데서 큰 폭풍우를 만나자 사람들은 우왕좌왕 배 안은 곧 수라장이 됐다. 울부짖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뗏목을 엮는 사람...... 필론은 현자인 자기가 거기서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보았다. 도무지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 배 선창에는 돼지 한 마리가 사람들의 소동에는 아랑곳없이 편안하게 잠자고 있었다. 결국 필론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돼지의 흉내를 내는 것뿐이었다.
<p.58>
매우 짧은 단편 소설로 앉은 자리에서 10분이면 뚝딱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책 내용이 주는 여운은 여느 장편 소설 못지않게 길고 진하다. 2018년 우연한 계기로 이 책을 여러 권 구매한 뒤로 서재나 아이 놀이방에 놓고 짬이 날 때마다 읽어왔다. 읽을 때마다 다른 감상을 주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읽을 때마다 과거의 나를 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하는 책이다.
책의 내용은 간단하다. 3년 간의 군생활을 마친 주인공은 고향으로 가는 군용 열차를 탄다. 전역병들로 가득한 객실에서 그는 우연히 훈련소 동기 홍동덕을 만난다. 대학을 나온 주인공에 비해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홍동덕은 훈련소에서부터 간단한 훈련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해 분대 내 골칫거리였던 인물이다. 그런 그와 오랜만에 만나 얘기를 나누던 중 객실 내로 검은 각반을 찬 현역병이 다섯 명 정도 들어온다. 그들은 전역병들에게 술값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폭력을 쓰고 협박하여 한 명씩 돈을 갈취하기 시작한다. 전역병의 수가 그들보다 훨씬 많았지만 그 누구 하나 나서 반항하지 못하고 다들 눈치만 보며 돈을 뺏기는 상황이었다. 주인공은 이런 부조리한 상황에 분개하며 다 같이 힘을 합치면 충분히 현역병들에 맞설 수 있다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차마 나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때였다. 현역병이 돈을 걷으며 주인공이 앉아 있는 객실의 중간까지 왔을 때 어디선가 힘을 합치면 우리가 이길 수 있다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앉아 있던 전역병들이 흥분하기 시작하더니 우르르 모여 현역병을 한 명씩 잡아 때리고 눕히고 발로 밟기 시작했다. 상황은 180도 반전되었다. 이제는 현역병들이 전역병들에 의해 폭력과 구타를 당하게 되었다. 현역병은 빼앗은 돈을 돌려주겠다며 빌고 또 빌었지만 그간 당한 수모에 대한 앙갚음을 하기 위해 흥분한 전역병들을 말릴 방법이 없었다. 주인공은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이제 흥분을 가라앉히고 이성적으로 상황을 해결해야 한다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역시나 나설 용기가 없었다. 결국 주인공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자기혐오와 무력감에 휩싸여 그 소동의 자리를 벗어나기로 하여 조금 한적한 객실의 뒤쪽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이미 홍동덕이 강 건너 불구경하듯 자리 잡고 앉아 다가오는 주인공에게 야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필론의 돼지는 원래 몽테뉴의 <수상록>에 나오는 얘기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필론이 배를 타고 항해하던 중 폭풍우를 만나 배에 있던 사람들이 야단법석을 떨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침 그 배에 타고 있는 돼지 한 마리는 그 와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밥을 먹고 있었더랬다. 이 모습을 보고 필론은 현자라면 언제나 이 돼지처럼 흐트러짐 없는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이야기이다. 필론은 이 이야기를 통해 '모든 것은 확실하지 않다, 따라서 모든 것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고 평온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몽테뉴는 이 일화를 통해 우리가 자랑으로 생각하는 인간의 이성과 지식이 혼란한 상황에서는 평정을 유지하는데 오히려 해가 될 뿐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를 한다.
이렇듯 원래 필론의 돼지 이야기가 갖는 메시지는 위와 같은 내용이다. 그러나 책을 읽고 내가 느낀점은 조금 달랐다. 나는 소설 속 주인공의 내면에 조금 더 공감이 되었다. 주인공은 대학 교육까지 받은 인물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의 부조리를 인식할 수 있다. 반면에 홍동덕은 주인공과 반대로 부조리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인물이다. 따라서 정의롭지 못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주인공은 분노하고 정의에 대해 고민하지만 홍동덕은 정의롭지 못한 상황에 대한 인식조차 불가능하다. 이에 주인공은 홍동덕을 두고 '아무 생각 없는 놈'이라며 속으로 비난한다. 그러나 잘난 대학 교육까지 받고 현실의 부조리에 심하게 분노하며 속으로 무엇이 옳은지에 대해 떠들어댔던 주인공도 결국은 홍동덕과 똑같은 처지가 되고 만다. 같은 상황 속 같은 처지에 있지만 한 명은 현 상황에 대한 분노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혐오, 무력감에 휩싸여 있지만 다른 한 명은 아무 생각 없이 평온하다. 그럴 바에는 이성과 지식이 부족해 부조리를 인지하지 못하는 (혹은 못 본 척하는) 홍동덕 같은 인물의 상황이 더 낫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주인공이 홍동덕에 대해 비난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이런 생각이 들면 나는 만감이 교차한다. 왜냐하면 나 역시 주인공과 같은 상황에 있었던 적이 여러 번 있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 때도, 대학에서도, 군대에서도, 회사에서도, 인간관계가 얽힌 집단이라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늘 부조리는 존재했다. 그 집단 내부의 법이나 규정, 서로 간의 예의의 수준에 따라 그것은 겉으로 보이기도, 보이지 않기도 했지만 어느 집단에서나 착취하는 사람이 있다면 착취 당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홍동덕처럼 부조리를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순수한 뇌를 가지고 마음 편하게 있었던 적도 있고, 객실 안에서 목소리를 냈던 누군가처럼 부조리에 맞서 올바름을 추구하고자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주인공 같았다. 현실의 부조리에 분노하고 정의로움에 대해 고민하지만 막상 앞으로 나서지는 못하고 못 본 척하거나 모른 척했던 것이다.
'세상은 원래 그런거야'라고 받아들이면 차라리 편할지도 모른다. 홍동덕이나 필론의 돼지처럼 이 세상의 불합리한 점들을 아예 모르거나, 알고도 모른 척한다면 개인의 삶은 오히려 아무 번뇌 없이 평온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뜨인 눈을 다시 감는다고 그것을 보지 못한 상태로 돌릴 수 있겠는가. 아마 나는 앞으로도 계속 이 책을 읽으며 고민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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