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천국
곁을 떠난 적이 있다 당신은 나와 헤어진 자리에서 곧
사라졌고 나는 너머를 생각했으므로 서로 다른 시간을
헤매고 낯익은 곳에서 다시 만났다 그 시간과 공간 사이,
우리는 서로가 없어도 잔상들을 웃자라게 했으므로 근처
어디쯤에는 그날 흘리고 온 다짐 같은 것도 있었다
<p.35>
연년생
아랫집 아주머니가 병원으로 실려 갈 때마다 형 지훈
이는 어머니, 어머니 하며 울고 동생 지호는 엄마, 엄마
하고 운다 그런데 그날은 형 지훈이가 엄마, 엄마 울었고
지호는 옆에서 형아, 형아 하고 울었다
<p.53>
시인 자신은 제 시를 두고 "머뭇머뭇거리다가 몇 마디 늘어놓고 안녕히 계세요 하고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 (<오늘의 문예비평> 2017년 여름호) 같은 것이라고 한 적이 있는데 적절한 자평으로 보인다. (...) 박준의 '나'는 시인 박준을 닮았다. 박준 자신이 한국어로 씌어지는 시의 작은 차이들을 음미할 줄 아는 시인인 것과 마찬가지로, 박준의 '나'는 다가오는 작은 차이들에 반응하고 스스로 그 작은 차이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그 '나'를 작은 차이들의 연인이라고 하자. 이 시집은 그 작은 차이들의 생가다.
<p.98, 신형철(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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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계절
작은 발로 아장아장 앞서는 너를 뒤에서 지켜보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나무는 이미 단풍이 들어있었다
추우면 털모자와 목도리를 챙기고 더우면 물티슈와
시원한 물을 챙기다보니 언제 추위가 지나갔는지, 언제
더위가 지나갔는지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놀이터에서 네가 주운 작은 낙엽과 몇걸음 뛰다 넘어져
우는 모습과 새로운 놀이기구에 한 발 내딛는 모습과
두리번대다 아빠를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는 모습을
바라보느라 그 외의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는 벤치에 앉아 풍경을 살필 만큼 네가 컸다
파란 하늘과 쌓인 낙엽과 미처 다 치우지 못한 눈과
빨갛게 익은 열매와 노란 꽃을 보다가 다시
눈을 들어 한참을 뭔가에 집중하고 있는 너를 본다
그해 계절은 아빠에게 참으로 행복한 계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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