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은 금물이오, 동무! 전쟁은 전쟁이오. 유일하게 좋은 인간은 죽은 인간이오."
<p.42>
오직 늙은 당나귀 벤자민만은 자신의 긴 생애를 한 토막도 빠짐없이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인즉 지금의 사정이 옛날보다 더 나을 것도 못할 것도 없고 앞으로도 더 나아지거나 더 못해지지 않을 것이라며 굶주림과 고생과 실망은 삶의 바꿀 수 없는 불변 법칙이라는 것이었다.
<p.114>
소비에트 체제의 역사적 실체가 소멸하고 없는 지금 이 시대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여전히, <동물농장>이 강한 적절성과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 정치사회의 권력 현실을 부패시키는 근본적 위험과 모순에 대한 항구한 알레고리이기 때문이다. 오웰이 그린 동물농장은 지금의 세계에도 있고 미래 세계에도 있을 것이다.
- 작품해설(도정일)
<p.151>
오웰의 작업 동기와 목표를 가장 잘 요약하는 것은 그가 <동물농장> 우크라이나어 판을 위해 쓴 서문의 한 대목이다. "지난 10년동안 나는 사회주의 운동의 재건을 위해서는 '소비에트 신화'를 파괴하는 일이 근본적으로 필요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사회주의를 위해 소비에트의 신화를 깨는 일이 필요하다, 이것은 강력한 역설적 진술이다. 이 진술로 보면 오웰은 소비에트라는 형태의 사회주의를 사회주의로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사회주의를 온동네 우스갯감으로 만드는 일종의 희화로 규정하고 있었음이 분명하고, 이 잘못된 사회주의를 애써 은폐하기보다는 비판하는 것이 진실의 편에 서려는 작가로서의 자기 임무라 여기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이 점에서 오웰이 구현하는 것은 사회주의의 양심이다. 그는 무비판적 맹목적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비판적 사회주의자였고, 그의 비판적 양심은 그가 진실이라 생각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 대상이 제국주의이건 사회주의이건 혹은 그 무엇이건 간에 언제나 화살을 날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 소비에트 체제의 타락을 풍자와 우화의 방식으로 작품에 담은 오웰은 1990년까지 기다렸다가 그 체제의 소멸을 본 것이 아니라 진작 1940년대 초에 이미 그 소멸의 발생을 보고 있었던 셈이다.
- 작품해설(도정일)
<p.154>
인간의 모든 혁명은 '반드시' 그것의 당초 약속을 배반하게 되는가? 모든 혁명의 성과는 권력에 주린 지배 엘리트 돼지들의 손에 반드시 장악되는가? 권력과 타락은 인간 사회의 불가피한 조건인가?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는 누구도 결정론적 해답을 시도할 수 없다. 그러나 지배권력에 대한 불신이 강했던 오웰은 혁명이라는 것의 운명에 대해서도 다분히 결정론에 가까울 정도의 바관적인 관점과 태도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혁명이 반드시 스스로를 배반하게 되어 있다면 어떤 혁명도 이미 가치가 아니며 애당초 시도될 이유도 없다. 역사상 많은 정치적 사회적 혁명들이 타락하고 이 타락이 인간 사회의 운명적 조건 같아 보이는 상황을 만들어 놓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로부터 '모든 혁명은 반드시 타락한다'라는 결론을 끌어낼 수 있을까? 다행히도 오웰의 비관적 태도는 비관만으로 끝나지 않고 권력의 타락을 막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한 통찰도 동반하고 있다. <동물농장>이 함축하는 메시지의 하나는 동물들의 무지와 무기력함이 권력의 타락을 방조한다는 것이다. 독재와 파시즘은 지배 집단 혼자만의 산물은 아니다. 권력에 맹종하고 아부하는 순간 모든 사회는 이미 파시즘과 전체주의로 돌입한다.
- 작품해설(도정일)
<p.157>
이 책을 읽고 난 뒤 군 복무 중의 일이 떠올랐다. 당시 내가 배치된 자대는 기수의 쏠림 현상이 심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자대에 있는 병사들의 기수가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 게 아니라 한쪽으로 몰려 있었다는 뜻이다. 쉽게 예를 들어 자대에 필요한 인원이 12명이라고 치면 1번부터 12번까지는 매달 한 명씩 자대 배치가 이뤄지다가 인원이 다 찬 12번 이후부터는 한동안 신병 배치가 이뤄지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군복무기간이 2년이므로 마지막에 자대 배치가 된 12번은 1번이 전역할 때까지 약 1년 동안 후임을 받을 수 없게 되어 1년 내내 막내 역할을 하게 된다. 당시만 해도 막내가 내무실 청소부터 시작해서 각종 잡일들을 도맡아야 했기 때문에 막내 입장에서는 언제 후임을 받아 막내 탈출을 할 수 있을지가 무척이나 중요한 문제였다.
훈련을 마치고 자대 배치가 된 첫날 동기들과 내무실에서 각 잡고 앉아 있을 때 전역을 앞둔 선임들은 우리의 신상을 가볍게 묻고는 "니들은 기수 풀려서 군생활 편하겠다"라고 말했다. 갓 자대 배치된 나는 그때만 해도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알고 보니 나는 12번 중에 3번 정도에 해당되었다. 한 달만 지나면 내 밑으로 후임이 들어와 막내 탈출을 할 수 있고, 무엇보다 앞으로 남은 9달 동안 매달 후임이 들어온다는 뜻이었다. 어리바리한 막내 생활이 지나고 자대 생활에 적응할 무렵이 되자 정말로 내 군생활은 편해져 있었다. 내 위로 선임은 한두 달 차이로 들어온 1번과 2번밖에 없었고 밑으로는 후임이 줄줄이 생겨 있었기 때문이다.
몇 달 더 지나 이전 세대의 막내 기수였던 선임마저 전역하고 나자 나를 포함한 1, 2번 기수의 선임들은 군생활이 채 1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부대 내 왕고참이 되었다. 눈치 볼 선임도 없고 근무를 제외하고는 해야 할 잡일도 없어진 우리는 왕고참으로서의 위치를 한껏 누릴 수 있었다. 근무시간 외에는 각자 하고 싶은 걸 했고 그 누구도 우리를 건드리지 않았다. 근무가 끝나고 매일 해야 하는 생활관 청소 및 잡일은 막내 기수인 10, 11, 12번 기수들이 돌아가면서 했다. 그럼에도 부대 내 좋은 일이 있거나 휴가의 우선순위, 불침번 순번 선택 등은 왕고참 기수들이 제일 먼저 누렸다. 운 좋게 기수가 풀렸다는 이유로 누구는 한 달의 막내 생활만 마치고 남은 군생활을 왕고참이 되어 편하게 보내고 누구는 수많은 선임 밑에 영원한 막내가 되어 남은 군생활을 일만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척 부조리한 일이지만 그땐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꼬우면 일찍 들어오든가' 이 한마디로 왕고참의 특혜와 막내의 불이익에 대한 논쟁은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군대는 원래 그런 곳이겠거니 싶었다.
왕고참으로서 지위를 누리던 나는 맨 밑의 막내 기수들이 매일 같이 청소하고 막내 생활을 하는 것을 보며 조금은 안쓰럽기도 하고 불공평하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나는 이미 왕고참으로서 누리는 편의에 완전히 적응되어 있었다. 지위를 남용한다거나 후임들을 괴롭히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막내들을 신경 쓰거나 불공평에 목소리를 내는 것도 아닌 선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기 중 한 명이 현재의 불합리한 막내 제도를 우리 세대에서 한 번 바꿔보자는 얘기를 꺼냈다. 그가 꺼낸 대책은 이러했다. '12번의 기수가 1번 기수가 전역해서 후임을 받기 전까지 남은 1년 동안 막내 생활을 도맡아 하는 것이 너무 불합리하다. 그 기간 동안 다시 1번 기수부터 차례로 한 달씩 막내 생활을 한 번씩 더 하면 모두가 군생활 동안 두 달의 막내 생활을 함으로써 공평해질 수 있다.' 기수 쏠림 현상이 심한 부대 특성을 잘 고려한 해결방안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제도를 시행할지 말지는 결국 지금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1, 2, 3번의 왕고참 기수들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며칠에 걸쳐 논의가 이뤄졌다. 현 제도를 유지하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갈등이 생겼다. 기득권을 계속 누릴 것인지 아니면 내려놓고 골고루 분배할 것인지 각자 원하는 방향이 달랐다. 이 논쟁을 통해 그전까지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새로운 제도 도입은 흥미롭게 진행되었다. 먼저 3번이었던 내 동기가 그 제도를 제안했으므로 3번 밑의 후임들은 전부 그 제도를 따라야 했다. (3번 밑의 기수, 예를 들어 5,6,7번 등의 중간 기수도 사실상 막내 생활을 안 하고 있었기에 이 제도의 도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후임이기에 대놓고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이 제도의 도입을 내심 좋아하는 사람들은 막내 기수인 10, 11, 12번 밖에 없었다.) 결국 제도의 도입을 결정할 사람들은 1번과 2번 그리고 3번 동기들이었다. 그들은 어쨌든 선임이고 동기였기에 강제로 시킬 수 없었는데 결국 1, 2, 3번 중에는 제도의 취지를 이해하고 참여를 원하는 사람만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한 번 더 막내생활을 하는 데 참여하게 되었다.
이런 제도가 제안되고 결정되고 실행되는 과정도 무척 흥미로웠지만 더 흥미로운 건 도입 이후 결과였다. 나는 여기서 거창하게 들릴 수 있지만 왜 사회주의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와 자신이 가진 특권을 내려놓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새로운 제도의 첫 시작은 그 제도를 제안한 동기부터였다. 12번 기수가 막내를 받을 때까지 남은 날짜를 참여 인원수로 나눠보니 각자 약 3주 정도의 막내 생활을 하면 모두가 공평하게 막내 생활을 한 셈이 되었다. 동기는 제도 시작 후 첫 3주 막내 생활을 하며 생활관 청소와 잡일들을 열심히 했다. 그리고 남은 인원들은 모두 각자의 차례에 맞게 막내 생활을 다시 하게 되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발생했다. 동기처럼 뜻이 있고 의지가 있는 사람들은 막내 생활을 열심히 했지만 사실 대다수는 그렇지 못했다. 대다수는 더 이상 그들이 막내였을 때처럼 막내일을 열심히 하지 않았다. 진짜 막내 때는 하나라도 빠뜨리면 바로 위 선임에게 혼나기 때문에 선임 눈치를 보며 열심히 했는데, 우린 이미 다 '짬'이 찬 상태라 눈치를 볼 사람도 눈치를 주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생활관은 예전만큼 깨끗하지 않았고 근무 중에는 실수가 계속 생기고 여기저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새로운 제도에 적당히 찬성하는 사람, 찬성한다고 하긴 했는데 막상 막내일을 하니까 귀찮은 사람, 하기 싫은데 후임이라 억지로 하는 사람 등등 여러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동기처럼 모두의 복지와 평등에 열정이 있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도 어느 정도 현행 제도의 불합리에 공감하고 개선의 필요성을 느꼈기에 동기를 열심히 지지하고 제도 도입에 힘썼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막상 내가 막내일을 다시 하게 되니 예전만큼 꼼꼼하게 하질 못했다. 진짜 막내 때 하던 것처럼 꼼꼼히 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지만 왜 이렇게 귀찮고 번거롭던지. 그동안 편하게 살다가 다시 귀찮은 일들을 해야 되니 나도 하자고 해서 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짜증이 날 때도 있었다. 나는 옳은 일에 대한 고민, 의무감, 인간 본성, 귀찮음, 약간의 후회,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등 여러 감정을 복합적으로 느끼면서 3주 간의 덜 꼼꼼한 막내 일을 마쳤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이 제도는 어떻게 되었을까? 결과를 얘기하자면 이 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났다. 제도의 도입에 힘쓴 사람들이 앞 순번이 되어 먼저 시작하고 뒤 순번으로 갈수록 하라고 해서 하는 사람들, 의욕이 없는 사람들이 되어서 했는데 뒤로 갈수록 사람들이 막내일을 더 대충 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는 10, 11, 12번 막내 기수들이 막내 일에 나서야 했던 것이다. (잡무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간부들에게 혼나기도 하고 생활관을 같이 쓰는 타 대대의 컴플레인도 생겼다.) 더군다나 이 제도의 도입을 주장하고 관리했던 내 동기와 나를 포함한 몇몇 선임들이 곧 전역을 앞두고 예전의 열정과 관심을 잃은 것도 한몫했다. 부대 내 실세는 이제 1, 2, 3번 왕고참이 아니라 중간 기수인 5, 6, 7번 기수들로 넘어갔다. 그들은 흐지부지되고 컴플레인 가득한 예전의 제도를 스리슬쩍 없애고 다시 예전처럼 막내 기수들이 막내 일을 도맡아 하는 제도로 돌아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생활관은 예전의 깨끗한 모습으로 돌아왔고 사무실에서의 잡무도 완벽하게 관리가 되었다. 제도의 도입과 실행, 실패의 과정을 지켜본 우리는 전역을 앞두고 그래도 우리는 공정과 정의에 대해서 생각하고 우리가 가진 특권을 내려놓고 우리의 몫을 했다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했다. 처음부터 제도의 도입을 반대하고 전역할 때까지 고참으로서의 특권을 누리며 호의호식한 저들과는 다르다는 말을 더하면서. 그리고 우리는 또 들을 수 있었다. 제도 도입을 반대한 사람들이 내무실 침대에 누워서 '거봐, 내가 처음부터 그거 안될 거라고 했잖아.'라고 하는 말을. 과연 무엇이 문제였을까? 나는 지금도 종종 이 일에 대해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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