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건 옛날에 어떤 평론가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그 작가 말이, '결혼이란 첫 번째가 참는 거요, 두 번째가 견디는 거요, 세 번째와 네 번째는 없고, 다섯 번째가 인내다'라네."
<p.31>
"인터넷에서 가장 어려운 게 뭔지 알아?" 나는 화면을 보며 오이시에게 물었다.
"여자 메일 주소를 얻는 거?"
"아깝네."
"아까워요?"
"바른 정보를 얻는 거야. 인터넷 이용이 쉬워지면서 별 이상한 것들이 많아졌잖아. 원클릭 사기라든가 스팸메일이라든가."
<p.51>
"너, 사회적 증명의 원리라는 거 알아?"
"그게 뭔데?"
"인간이란, 남들이 뭘 옳다고 생각하는지를 토대로 해서 판단한다는 거야. 지금 닥친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남들의 행동을 참고로 한다는 거지. 이건 나쁜 짓이 아니잖아. 남들한테 날 맞추는 게 순조로운 경우가 많으니까. 여기서 이 점을 이용하면, 사람의 판단을 유도할 수 있어."
<p.132>
친구 이사카 고타로는 "뭐든 두 번 해 보면 익숙해져"라고 곧잘 말했다.
<p.138>
"그 섀클턴이 이렇게 말했어. '낙관이란 진정한 정신적 용기다.'"
"잘 들어, 세상은 불안한 것 투성이야. 몸에 나쁜 것도 천지고, 그야말로 발암물질이 아닌 걸 찾기 힘들 정도잖아. 그런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어느 정도는 낙관적일 필요가 있다고. 당신도 너무 끙끙대지 말고 좀 낙관적으로 대처해. 뭐, 그 사쿠라이 유카리의 행방은 걱정되겠지만 내 직감에 따르면 아무리 찾아도 못 찾을 거야. 고민해 봤자 뾰족한 수도 없는 일에 에너지를 낭비할 바에야, 할 일이나 하는 편이 나아. 본인 인생을 즐기라고. 우선은 집에 돌아가서 씻고, 자고, 일어나고, 출근해."
<p.169>
"이유? 딱히 없어.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회사 이름이나 직함이 아니야. 살아가는 시간이지. 책을 읽을 수 있고, 뭘 생각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해. 관리인이 된 뒤? 나쁘지 않았어. 학생들과 가까이하는 것도 신선하고 그립기도 하고, 역시 공부가 됐지."
<p.274>
"중요한 건 요약해버리면 사라져. 내가 그렇게 말했지? 그래서 말인데 그걸 규명해 보면, 인생은 요약할 수 없어."
"사람은 하루하루, 필사적으로 살아가고 있어. 따분한 일을 하고, 누구랑 입씨름을 하고, 그런 보잘것없는 일들이 쌓이고 쌓여서 생활이, 인생이 완성되지. 그렇지? 그런데 말이야, 만약 그 사람의 일생을 요약하려 들면 그런 변함없는 일상은 생략 돼버려. 결혼이나 이혼, 출산, 전직 같은 커다란 사건은 남겠지만 인상은 생략되지. 소박하고 시시하니까. '아무개 씨는 이러이러하고 저러저러한 인생을 보냈다'라는 말로 요약되는 거야. 하지만 말이야, 사람에게 정말 중요한 건, 요약되어 사라져 버린 일상의 일이라고. 아이가 태어나면 기저귀도 갈고, 서서 먹는 메밀국수집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그게 바로 인생이라는 거지, 요컨대."
<p.318>
"악의적인 험담은 가만 놔두면 열기가 더 뜨거워져. 그래서 내가 그 무렵에 전화를 걸었는데 말이야, 그때 그 친구가 이러더군."
"알고 지낸 지 오래된 이웃 아저씨까지 차가운 눈으로 보는 바람에 아주 화가 치민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런 짓을 할 사람 아니라는 건 지금까지 지내봐서 잘 알잖아요' 하고 말했대."
"이웃 아저씨 말이 '그래도 인터넷에 그렇게 나오던데'라고 했다는 거야. 현실에 존재하는 그 사람이 여태껏 쌓아온 인간관계보다 어디 사는 누가 적었는지도 모를 인터넷 문장을 더 믿는다는 소리지."
<p.324>
"시스템이 복잡해지고 그 효과가 거대해지면 인간에게서는 전체를 상상하는 힘이 깡그리 사라져. 가령 그 '거대해진 효과'가 끔찍한 일이라고 치자. 수백만 명을 가스실에서 죽이는 거라고 치자고. 그 경우, 세분화된 작업을 맡은 사람에게서 사라지는 것은 '양심'이야."
<p.437>
"예를 들어볼까. 국가의 유일한 목적은 국가 자체가 살아남는 거야. 국민의 삶을 지키는 것도 복지와 연금을 관리하는 것도 아니야. 국가가 존속하기 위해 움직이지. 정치인도 국가를 위해 움직이고. 그렇게 생각하면, 국민이 '국민의 생활을 무시한다'며 국가에 분통을 터뜨리는 건 애초에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란 거지."
"그런, 말도 안 되는." 국가가 국민을 생각하지 않으면 누가 생각하느냐고 웃고 싶었지만 문득, 머리에 떠오른 '국가'라는 주어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지조차 명확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들어봐. 예를 들면 국민은 살인을 용서하지 않지. 살인은 용서받을 수 없어. 그게 도덕이라고 기본적으로 인식하고 있어. 실제로 살인은 법적 심판을 받아. 하지만 예외가 있지. 전쟁과 사형이야."
"그야 그렇지."
"그건 도덕적인 정당성의 문제를 초월한다고. 그렇잖아? 요컨대 국가가 원한다면, 국가가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살인도 합법이 된다고. 국민을 위해서가 아니야. 모두 국가를 위한 거지."
"하지만 국가가 국민을 위해 무언가 할 때도 있잖아."
"그건 국민이 화내지 않도록 하려고 그러는 거야. 만약 정말로 국민이 화났을 때는 국가에 반기를 들겠지. 그러니까 국가는 국민이 화를 내지 않을 수준까지 국민을 지키는 척 흉내 낼 뿐이야. 어차피 그것 역시 국가의 존속을 위한 것일 뿐이지만."
<p.439>
"사람이 행동하게 되는 가장 단순한 동기가 뭔지 알아? '일이니까'야. 아까 그 아이히만 이야기도 마찬가지지. 일이라서 유대인을 살해한다. 나도 그래. 사람을 괴롭히고 고문하지. 왜냐. 일이니까. 일이라는 건 알다시피, 목적은 돈이야. 당신을 영화관으로 유도한 인간이나 사쿠라이나, 요컨대 돈을 위해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 게 이해가 빠르지."
<p.456
"돈으로 해결하는 게 그리 나쁜 일은 아니야. 교착 상태에 빠져 서로 견제하다 물러설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누가 불쑥 끼어들어서 타협점을 제시하면 뜻밖에 쉽사리 결말이 날 수도 있어. 돈이란, 사상과는 상관이 없으니 단순명료하고, 피차 자존심도 덜 다치지. 의지에서 지는 것보다는 금액에서 지는 편이 떳떳해. 돈은 돈이야."
<p.466>
"미국의 어느 연구자가 이렇게 말했죠. '개미는 영리하지 않다. 하지만 개미 집단은 영리하다.'"
<p.482>
안도 준야의 말투는 담담했다. 돈 걱정은 무척 중요하지만 창피한 일은 아니라고. 그 무렵 안도 준야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돈 문제는, 인생의 많은 고민 중에 그래도 단순한 편이야. 물론 중요한 문제이긴 하지만" 그리고 그 단순한 문제로 인생을 허비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슬퍼했다.
<p.592>
"그래서 당신 지금, 내가 그 힌트를 줬으면 하는 거네. 방금 본 영화에서 말이야. 당국자미, 방관자청(當局者迷 傍觀者淸)이다 이거지?"
"좋은 격언이야." 정말로 좋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원래는 장기나 바둑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대국 중인 당사자보다 옆에서 관전하는 사람이 전체를 내다보며 여덟 수 앞까지 익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어떤 스포츠든, 또한 인생에서든 마찬가지다.
<p.709>
"당신은 아직 실감이 안 나겠지만 사람과 만날 수 있는 건, 살아 있는 동안 뿐이야."
<p.807>
"세상이란 걸, 누구 한 사람이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세상을 바꾼다는 건 표현이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수많은 사람에게 뭔가 행동하게 만드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는 거야." 이사카 코타로는 그리 말한 뒤 "하지만 말이야" 하며 숨을 내쉬었다. "사실 난 알고 있었어."
"알고 있어?"
"소설이란 건, 수많은 사람의 등을 떠밀어 행동하게 만드는 도구가 못 돼. 음악처럼 우르르 모인 사람들을 열광시키고는 '자, 이제 다 같이 뭘 좀 하자' 이런 일은 못 해. 임무가 달라. 소설은 말이야, 한 사람 한 사람의 몸에 스며들 뿐이야."
"스며들어? 뭐가 어디에?"
"읽은 사람의 어딘가겠지. 좍 번지며 스며드는 거야.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게 아니야. 그저 스며들고, 녹아들어."
<p.832>
"돈이 있다고 무조건 행복한 것도 아닌데." 소복한 파르페를 떠먹던 가요코도 우리 대화를 듣고 있기는 한지 그렇게 말했다. "돈은 적당히만 있으면 되는 거야."
"부인 말이 옳아." 그 말에 고탄다는 웃더니 크게 숨을 들이마쉰 뒤 "인생을 즐기려면" 하고 말했다.
"인생을 즐기려면 용기와 상상력, 그리고 약간의 돈만 있으면 돼."
"무슨 말이에요, 그건."
"찰리 채플린의 대사야. <라임라이트>였을걸, 아마. 찰리 채플린이 맡은 희극배우가 그렇게 말하거든."
<p.901>
"우리는 이미 이 일에 말려들었어. 여기서 물러서면 오늘은 오이시도 안전할지 몰라. 하지만 내일은 장담 못해. 모레는 장담 못해. 몇 년 뒤는 더 장담 못 해.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 새끼를 못 잡는다는 속담 알지?"
"알긴 하죠."
"잡으려면 굴에 들어가야 해. '무서우니까 굴에 안 들어갈래' 해봤자 언젠가 굴에서 성장한 호랑이가 튀어나와 날 잡아먹는다고. 공포가 지금 오느냐 내일 오느냐, 그 차이밖에 없어."
<p.908>
"어떤 사람이든 날마다 선생님, 선생님하고 불리다 보면 반드시 뒤틀려. 교사, 의사, 국회의원, 변호사, 작가, 다들 그래. '선생님'이라는 단어에 들러붙는 수상쩍은 상하 관계가 사람을 거만하게 만들지. 겸허함을 빼앗아가."
<p.934>
여기에 오기 전 아내가 호텔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일이니까 어쩔 수 없이 했다는 소리는 변명일 뿐이라고. 아내는 그렇게 말했다. 아무리 일이더라도, 자신이 하는 일에는 그에 걸맞은 각오가 필요하고, 나쁜 짓을 하려거든 번민하고 괴로워해야 한다고 했다. 지금 이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그저 일하고 있을 뿐이다. 고민하거나 괴로워하지 않는다.
"이 사람들은 다 파악하고 있지 못하니까, 어쩔 수 없어."
"뭐라고?"
" 가요코." 나는 말했다. "나쁜 일이 벌어지고 있을 때, 우리는 몰랐다는 이유로 용서받을 수 있을까?"
"나쁜 일이라니 어떤 거."
"뭔가 나쁜 일, 세상에 대해."
그러자 가요코는 "들어봐. 애초에 나쁜 일이라는 건 또 다른 어떤 사람한테는 좋은 일이기도 해" 하며 웃었다. "뭐가 옳은 일인지, 잘 몰라."
"그래도." 막상 입은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p.1188>
"위험 사상이란, 상식을 실행에 옮기려는 사상이다."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일본 다이쇼 시대의 작가)
<p.1204>
시스템 엔지니어 와타나베는 고슈라는 정체불명의 회사가 의뢰한 업무를 하던 중 인터넷상에 특정 단어를 검색하면 현실에서 검색한 사람에게 불행한 일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이 배후에 거대한 시스템이 있고 대중으로부터 무언가를 숨기려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에 회사 동료와 아내 가요코, 친구 이사카 코타로(작가와 이름만 같다)와 함께 시스템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행동을 개시한다.
나를 일본 소설의 세계로 이끈 같은 작가의 책 <명랑한 갱이 지구를 돌린다>에서부터 느꼈지만 이사카 코타로의 소설은 읽는 데에 재미가 있고, 신선한 소재를 다루고, 이야기의 구성이 치밀하고, 한 번쯤 생각해 볼만한 철학적 메시지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내 마음에 쏙 든다. 이 책 역시 인터넷 세상과 그 속에 무한한 정보, 국가와 대중, 시스템과 개인이라는 대립 구조를 만들며 정보화 시대라는 21세기에 개인은 사회에 대하여 어떠한 스탠스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의문을 던진다. 과거에 읽었던 장강명 작가의 <댓글부대> 책이 떠오르기도 하고, 같은 작가의 <골든 슬럼버> 책이 떠오르기도 했다.
나는 소설을 통해 삶을 배웠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소설 속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 태도, 생각 등에서 많은 것들을 내 삶에 투영시켜 왔는데, 어떤 소설은 그저 스토리의 전개에만 집중하는가 하면 이 작가의 책은 자신의 가치관이나 철학적 물음 등을 소설 속에 많이 숨겨 놓았다. 등장인물의 대화 속에서 그런 것들이 은밀하게 드러나면 나는 소설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도 이런 사람이 되어야지'라든가 '나도 나중에 이런 말과 행동을 해야지' 같은 생각을 한다. 작가가 현실에서 원래 그런 사람이든 아니든, 작가가 만들어 낸 가상의 인물들 속에서 멋진 모습이나 생각할 점들을 발견하고 현실에서 실천해 보는 것들이 내게는 일종의 자기 계발이었던 것 같다. 이런 점에서 보면 지금의 나라는 사람의 인격과 가치관은 고등학생 때부터 읽어 온 많은 소설들 속 등장인물들에 기반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내용을 책에서는 이렇게 멋지게 표현했다.
"소설이란 건, 수많은 사람의 등을 떠밀어 행동하게 만드는 도구가 못 돼. 음악처럼 우르르 모인 사람들을 열광시키고는 '자, 이제 다 같이 뭘 좀 하자' 이런 일은 못 해. 임무가 달라. 소설은 말이야, 한 사람 한 사람의 몸에 스며들 뿐이야."
"스며들어? 뭐가 어디에?"
"읽은 사람의 어딘가겠지. 좍 번지며 스며드는 거야.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게 아니야. 그저 스며들고, 녹아들어."
여전히 누군가는 소설은 흥미 위주에 시간 때우는 용도에 불과하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지금껏 많은 소설들이 내 어딘가에 스며들어 지금의 나를 만든 걸 보면 그 어떤 인문학 서적이나 자기 계발서보다 사실은 더 큰 영향을 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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