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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텅 빈 마흔 고독한 아빠 > 이시다 이라, 2019

by Ditmars 2024. 2. 15.

<텅 빈 마흔 고독한 아빠> 이시다 이라, 2019

 

 교육에는 도움이 되는 것도 쓸데없는 것도 있다. 하지만 아이의 장래에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p.17>

 

 소설의 불가사의한 점은 아무리 책을 많이 써도 절대로 다음 책을 쓰는 게 편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작가는 새 작품을 쓸 때마다 전 작의 한계를 극복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작가의 일상은 일에 대한 불안과 긴장으로 점철되어 있다. 평범한 회사원이라면 마흔 살에 중간 관리직으로 승진한다. 현장에서 벗어나서 편해진들 전혀 이상하지 않을 나이다. 그렇지만 작가에게는 부하가 존재하지 않으며 언제나 혼자서 현장을 전두지휘한다. 그야말로 죽을 때까지 현역이다.

<p.38>

 

 작가의 상상력이란 창작에서는 긍정적으로 작용하지만, 자신감을 상실한 상태에서는 끝없이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p.59>

 

 객관적인 절대평가가 존재하지 않는 창작의 세계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한번 잃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암흑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p.63>

 

 소설을 쓰는 것은 노래를 부르는 것과 무척 닮았다. 한번 음악 세계에 빠져버리면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늘 제삼자의 평가를 기초로 판단하지 않으면 자신이 지금 서 있는 위치조차 모른다. 표현하는 이의 다양한 고민이 거기에서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p.86>

 

 작가가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손을 움직여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 속에 사는 인물의 삶을 빌려 생각한다. 그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간단한 문제라도 작가는 저 멀리 돌아서 몇 개월, 몇 년이나 시간을 투자해 글을 쓰면서 생각한다. 글을 쓰는 것은 답을 도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만의 방법으로 빠짐없이 사고하고자 하는 수단이었다.

<p.160>

 

 사람들은 누군가가 졌을 때의 일을 눈여겨보고 있다. 이 나라에서는 이기는 법만 아이에게 가르치고 잘 지는 법에 대해서는 허투루 한다. 앞으로 출판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수한 패배를 각오해야 할 것이다. 좋은 패자가 되는 일은 다음 도전권을 잡는 것이다.

<p.229>

 

 "하지만 그건 무리하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아이를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부모도 자신이 즐겁지 않으면 계속할 수 없습니다. 육아도 그런 거 아닙니까?"

 고헤이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매일 성장하는 가케루를 보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다. 자전거 타기, 구구단 외우기, 달걀프라이 만들기. 어제까지 못 했던 것을 오늘 할 수 있게 된다. 아이의 성장을 관찰하는 것은 부모의 가장 큰 기쁨이다. 죽은 히사에에게 가장 보여주고 싶은 것은 자신의 새 책도 문학상도 아니라 가케루의 성장이다.

<p.264>

 

 중요한 것은 소설이나 영화에서라면 바로 잘려나갈 생활의 세세한 부분이다.

<p.297>

 

 여자의 마음이란 알 수 없다. 남자는 나름 배려한다고 거짓말을 해서 결국 제 무덤을 파는 꼴이 된다. 사려 깊지 않은 남자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p.314>

 

 "나, 남자는 다들 약하다고 생각해. 자신이 진짜 곤란에 처해있거나 고민이 있으면 아무한테도 말 안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거든. 그러니까 아슬아슬할 때까지 참다가 어느 날 갑자기 툭 하고 부러져버려. 40~50대 남성의 자살 원인은 경제적인 것만이 아니라 외톨이에다가 마음을 보이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다고 생각해. 가족도 친구도 동료도 가까이 있는데 말이야."

<p.341>

 

 "인간은 너무 행복하면 이런저런 쓸데없는 일까지 생각하게 돼."

<p.344>

 

 소설을 쓰고 있으면 효과적인 대사와 드라마틱한 설정에만 신경이 간다. 하지만 이 세상은 흔한 감정과 당연한 말로 이루어져 있다. 전하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다면 말의 형태 따위는 뭐든 상관없다.

<p.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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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은 아내와 사별한 뒤 혼자서 초등학생 남자 아이를 키우는 일본 작가의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10년 전에 쓴 첫 소설로 등단했는데 당시 일본 문학계에서 굉장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그 이후에 낸 작품들은 늘 기대에 미치지 못했는데, 더 많이 팔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안 팔리는 것도 아닌 그런 상태가 10년째 유지되고 있다. 그 사이 아내가 죽고 혼자가 된 그는 육아와 집안일을 병행하며 계속 소설을 쓰고 있다. 가장 최근에 집필을 마친 소설이 편집자들 사이에서 반응이 좋아 내심 문학상을 기대해 보지만 친한 후배 작가가 수상하게 된다. 아내 없이 혼자 해나가는 버거운 일상과 10년째 별다른 성과가 없는 일 속에서 자괴감과 우울에 빠질 뻔한 그에게 새로운 사랑이 찾아오고 아들의 응원에 힘입어 결국 문학상을 타게 된다는 의외로 희망찬 이야기이다. 

 주인공이 소설 작가이다보니 일본의 문학 세계와 출판 세계에 대해 엿볼 수 있다는 점이 내겐 가장 재미있었다. 작가들은 어떤 대화를 나누고, 편집자와 작가는 어떤 관계이며, 문학상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매일 글을 쓰는 일은 어떤 일인지에 대해 소설 속 주인공의 삶을 통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싱글 대디의 삶을 너무 미화시킨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긴 하지만 주인공이 처한 상황에 비해 소설의 분위기가 그렇게 무겁진 않다. 아직 마흔은 아니지만 남자아이를 키우는 아빠 입장에서 공감이 되는 점도 있었고 글 쓰는 것에 대한 작가의 철학도 알 수 있었다. 가볍고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