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고빈다, '인간은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우기 위하여 나는 오랜 시간을 허비해왔고, 아직도 그 배움에 마무리를 짓지 못했네. 참으로 우리가 소위 '배운다'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나는 생각하네. 오, 친구여. 단 하나의 깨달음이 있을 뿐일세. 그것은 어디에나 있네. 그것은 내 속에, 너의 속에, 그리고 모든 존재의 속에 있는 것으로, 아트만이라는 깨달음이네. 그리하여 나는 이런 것을 믿기 시작했네. 이 깨달음 앞에서는 알고자 하는 것, 배운다는 것보다 더 경박한 적은 없다는 것을.
<p.52>
보시오, 카마라. 당신이 돌을 하나 물속에 던졌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돌은 가장 빠른 길로 서둘러 물 밑바닥에 가라앉을 것이오. 싯다르타가 어떤 의도를 품을 때도 이와 꼭 같지요. 싯다르타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기다리고 사고하며, 금식할 뿐이오. 그렇지만 물을 꿰뚫는 돌멩이처럼 세계의 사물을 꿰뚫고 지나가지요.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고서 말이오. 그는 끌리는 대로 그곳에 몸을 맡기지요. 그의 목표가 그를 끌어당기고 있소. 왜냐하면 그는 목표에 거스르는 어떠한 것도 자기의 영혼 속에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오. 싯다르타가 사문에게서 배운 것은 바로 그것이오. 어리석은 자들은 마술이라고 부르며 귀신이 작용해서 이루어진다고 믿는, 바로 그것이오. 귀신이 작용해서 이루어지는 일이란 세상에 아무것도 없소. 귀신이란 존재하지 않소. 누구나 마술을 할 수 있고, 누구나 목표에 이를 수 있소. 사고할 수 있고, 기다릴 수 있으며, 금식할 수 있다면 말이오.
<p.146>
"쓰는 것은 좋다. 생각하는 것은 더욱 좋다. 지혜로운 것은 좋다. 참는 것은 더욱 좋다."
<p.154>
카마라여, 대부분의 인간들은 바람에 날려 빙글 돌다가 방향을 잃고 땅바닥에 굴러떨어지는 낙엽과 같은 존재요. 하지만 드물게도 별처럼 확고한 자기의 궤도를 가는 사람이 있소. 그들은 바람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자기 내부에 그들 나름대로의 법칙과 궤도를 가지고 있소.
<p.171>
불안, 엄청난 것을 걸고 도박하는 동안의 두렵고 가슴 조이는 불안을 싯다르타는 사랑했고, 그 불안을 끊임없이 새로이 하고, 끊임없이 상승시키고, 끊임없이 자극하여 북돋우려고 애를 썼다. 왜냐하면 지금의 포만하고 미지근하고 맥빠진 자기 생의 한가운데서, 그는 유독 이러한 불안감 속에서만 행복 같은 것, 도취감 같은 것, 상승된 생의 맛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p.185>
'필연적으로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스스로 맛보는 것은 좋은 일이다. 세속적인 쾌락과 부유가 좋은 것이 아님을 나는 이미 어린애일 적부터 배웠다. 그것을 안 것은 이미 오래전이지만 그것을 체험한 것은 비로소 지금이다. 그래서 지금 나는 그것을 안다. 오로지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나의 눈으로, 나의 심장으로, 나의 위장으로 안다. 그것을 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p.228>
강의 많은 비밀 가운데에서 그는 오늘 또 한 가지를 보았고, 그 한 가지에 그의 영혼은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는 보았다. 이 물은 흐르고 흐르며 영원히 흘러가지만 언제나 그곳에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언제나 같은 물이지만 순간마다 새로운 물이라는 것을!
<p.235>
"당신 역시 강에게서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비밀을 배웠습니까?" 바수데바의 얼굴은 밝은 웃음으로 가득 찼다.
"그렇습니다, 싯다르타." 그는 말했다.
"당신이 의미하는 건 필시 이런 것이겠지요. 강은 도처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 근원에서나, 강 어귀에서나, 폭포에서나, 나루터에서나, 여울에서나, 강에서나, 산에서나, 어디에든 동시에 있다는 것, 그리고 강에는 오로지 현재가 있을 뿐이라는 것, 과거의 그림자도, 미래의 그림자로 없다는 것, 그런 것이 아닙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싯다르타는 말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고 나서 나의 삶을 바라보니, 그것 역시 한 줄기 강이었습니다. 소년 싯다르타는 한낱 그림자를 통해서만 어른 싯다르타, 노인 싯다르타와 떨어져 있을 뿐이요, 현실을 통해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싯다르타의 전생은 결코 과거가 아니었고, 그의 죽음과 범으로의 귀환도 미래가 아니지요. 그 어느 것도 과거에 있던 것이 없고, 그 어느 것도 미래에 있을 것이 없는 겁니다. 모든 것은 현재 있으며, 모든 것은 본질과 현존을 지닐 뿐이지요."
<p.249>
참으로 구도를 하는 자, 참으로 찾고자 하는 자는 아무런 가르침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 법이었다. 하지만 일단 찾은 자는 어떠한 가르침, 어떠한 길, 어떠한 목표라도 인정할 수가 있었다.
<p.257>
"친구여, 그런 의문은 강에게 물어보십시오! 강이 웃는 소리를 들으십시오! 당신은 당신 아들이 당신과 같은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스스로가 지금껏 그 모든 어리석음을 저질러왔다고 생각하십니까? 대체 당신은 아들을 윤회에 빠지지 않도록 어떻게 보호할 수 있을까요? 대체 어떻게 보호하겠습니까? 가르침을 통하여, 기도를 통하여, 훈계를 통하여? 사랑하는 친구여, 대체 당신은 당신 자신이 언젠가 바로 여기 이 장소에서 나에게 들려준 브라만의 아들 싯다르타에 대한 교훈적인 이야기를 완전히 잊어버렸단 말인가요? 누가 사문 싯다르타를 윤회에서 죄악에서, 탐욕에서, 어리석음에서 지켜주었단 말인가요? 그의 부친의 깊은 신앙심이, 그의 스승의 훈계가, 자신의 지식이, 자신의 탐구심이 과연 그를 보호할 수 있었던가요? 스스로 삶을 살고, 스스로 업보를 짊어지고, 스스로 쓰디쓴 잔을 마시고, 스스로 자기의 길을 찾으려는 것을, 어떤 아버지가, 어떤 스승이 막을 수 있을까요? 도대체 당신은 그 누군들 이 길을 걷지 않고 살아갈 자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친구여, 혹시나 당신의 어린 아들만은 당신이 사랑한다고 해서, 당신이 그애의 번민과 아픔과 실망을 덜어주고 싶다고 해서 그것이 가능할 줄 아십니까? 비록 그애를 위해 열 번씩 죽는다 한들, 그것으로 당신이 그 애의 운명을 손톱만치라도 덜어줄 수는 없습니다."
<p.282>
"아아, 싯다르타, 괴로워하는구려. 그렇지만 당신은 남이 웃을 일을 가지고, 당신 자신도 곧 웃게 될 일을 가지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p.290>
"모름지기 누구나 구할 때에는 그의 눈이 다만 구하는 물결에만 쏠리어 아무것도 발견 못하고 아무것도 자기 안에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기 십상이지요. 그는 항상 구하는 대상만을 생각하고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그 목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구한다 함은 하나의 목적을 갖는 것이지요. 발견한다 함은 자유롭게 열려 있는 상태요, 목적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스님이시여, 당신은 아마도 과연 구도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당신의 목적을 향해 애를 쓰며 눈앞에 가까이 있는 많은 것을 놓치니까 말씀입니다."
<p.322>
이전 같으면 나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네. '이 돌은 다만 돌일 뿐이다. 돌은 아무런 가치도 없고 미망의 세계에 속한 것이다. 하지만 이 돌도 변화의 윤회를 거치는 동안에 인간이 되고 정신이 될 수도 있는 까닭에 나는 이 돌에도 가치를 부여한다'라고. 그렇게 나는 이전에는 생각했을 것이네. 그렇지만 오늘 나는 이렇게 생각하네. 이 돌은 돌이요, 이 돌은 또한 동물이요, 또한 신이요, 부처라고. 내가 이 돌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은 언젠가 이 돌이 이런 또는 저런 물건이 될 가능성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돌은 태초부터 영구히 그 모든 것이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돌은 돌이며 이 날 이 시간 돌로서 내 눈에 비친다는 것, 바로 그 점때문에 나는 돌은 사랑하네.
<p.334>
"나도 그 점을 알고 있네, 고빈다. 그러나, 보게나. 우리도 지금 의견들의 총림 속에, 말을 위한 논쟁 속에 빠져드는 걸세. 실상, 사랑에 관한 나의 말은 고타마의 말씀에 반대됨을, 표면상으로는 반대됨을 나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일세. 바로 이 점 때문에 나는 말이라는 것을 도저히 신용하지 않네. 왜냐하면 나의 말이 고타마의 말씀에 반대된다 함이 착각이라는 것을 나는 알기 때문일세. 나와 고타마는 일치한다는 것을 나는 아네. 도대체 어찌 그가 사랑을 모르실 리가 있겠나? 모든 인간의 존재를 무상하다고, 무라고 간파하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길고 수고스런 생애를 오로지 중생을 구원하고 가르치는 데 바칠 만큼 그토록 인간을 사랑하신 그가 말일세! 고타마에게서도, 자네의 위대한 스승에게서도, 말보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하네. 그의 행위와 삶이 그의 말씀보다 가치 있으며, 그의 손의 움직임이 그의 의견보다 가치 있다고 나는 생각하네. 나는 말씀이나 사상 속에서 그의 위대함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행위 속에서, 삶 속에서 그의 위대함을 보네."
<p.342>
싯다르타는 브라만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아버지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는다. 청년이 된 그는 깨달음을 얻고자 사문이 되기로 한다. 이에 친구 고빈다와 출가하여 고행을 시작한다. 고행길의 중간에 이미 깨달음을 얻은 고타마(부처)를 만난다. 고빈다는 그의 제자가 되기로 하지만 싯다르타는 고타마의 가르침이 충분하지 못하다고 여겨 다시 사문의 길로 돌아간다.
싯다르타는 강을 건너 어느 마을에 도착하여 카마라라는 이름의 기녀 만난다. 그는 그녀의 매력과 색에 대한 욕망에 사로 잡힌다. 이어 마을의 부자 상인 카마스바미를 찾아가 장사를 도우며 돈을 벌기 시작한다. 싯다르타는 그렇게 자신이 소인이라고 얕잡아보았던 세속에서 그들과 같은 삶을 살며 색과 부를 좇으며 환락과 부귀영화를 누린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어느새 40살의 중년이 된 그는 어느 날 밤 이런 유희를 계속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그가 이룬 모든 부를 버리고 도시를 떠난다.
도시를 떠나 그가 도달한 곳은 그가 마을로 오기 위해 건넜던 강이다. 그는 강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다. 깨달음도 얻지 못하고 세속에 찌들어 공허한 영혼이 되어 버린 자신의 모습을 보며 죽음을 생각한다. 그 순간 그는 강을 통해 각성하고 깊은 잠에 빠져든다. 잠에서 깬 그는 뱃사공 바수데바를 만난다. 싯다르타는 강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달은 바수데바와 함께 살며 뱃사공의 삶을 살며 또 많은 세월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고타마가 곧 죽는다는 소식에 순례를 나선 카마라와 그녀의 아들이 강을 건너다 싯다르타를 만난다. 순례의 길에 뱀에 물린 카마라는 얼마 뒤 죽고 싯다르타는 그녀의 아들이 자신의 자식임을 알게 된다. 혼자 남은 아들은 베수데바, 싯다르타와 함께 오두막에 살게 된다. 그러나 그 아이는 유복하게 자라 불평이 많고 참을 줄 모르는 응석받이였다. 베수데바와 싯다르타는 참을성 있게 아이를 기다려줬지만 아이의 성품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고 그간 누리던 오두막의 평화는 자꾸 깨져만 갔다. 결국 베수데바는 싯다르타에게 아이를 놓아줄 것을 조언한다. 싯다르타는 차마 그럴 수 없다며 자식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이라는 번뇌에 사로잡혀 고통받는다. 결국 아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오두막의 돈을 훔쳐 배를 타고 집을 떠난다. 뒤늦게 뗏목을 만들어 아이를 쫓아가던 싯다르타는 아이가 도망간 마을의 입구에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상처가 되어 버린 아들을 향한 사랑을 느끼며 오두막으로 돌아온다.
또 많은 세월이 흘러 두 사람은 노인이 되었다. 싯다르타는 강을 통해, 그리고 바수데바를 향한 고백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 번민을 그치고 열락을 꽃피우고 강의 소리를 듣고 바수데바와 같은 웃음을 짓게 된다. 그러자 바수데바는 자신이 할 일을 마쳤다는 듯 싯다르타의 어깨를 짚으며 후광을 쓴 모습으로 숲을 향해 떠난다.
마지막 장면이다. 고빈다는 순례길 도중에 강가의 오두막에 살며 많은 사람들한테 현자라고 존경받는 뱃사공에 관한 소문을 듣는다. 뱃사공을 찾아간 고빈다는 그가 옛 친구 싯다르타라는 것을 알게 된다. 고타마의 제자로서 이미 많은 가르침을 받은 고빈다는 싯다르타의 교리와 깨달음에 대해 질문한다. 싯다르타는 자신의 깨달음에 대해 친구 고빈다에게 설명해주지만 그는 그것이 부처의 말씀과 다르다며 마음속 의심을 거두지 못한다. 그러자 싯다르타는 친구 고빈다에게 자신의 이마에 입을 맞추라고 한다. 고빈다가 싯다르타의 이마에 입을 맞추자 그의 눈에 싯다르타의 얼굴이 다른 얼굴들로 물밀듯이 쏟아지며 보이기 시작한다. 그 얼굴들은 끊임없이 변하여 새로운 얼굴이 되고 동물의 머리가 되었다가 신의 머리가 되었다가 모든 형상과 모든 존재로 생성되며 헤엄치며 뒤엉켜 흘러가는 모습으로 보이다 마침내 싯다르타의 웃음 지은 얼굴로 돌아온다. 그 웃음이 고타마, 붓다의 웃음과 같다는 것을 깨달은 고빈다는 싯다르타에게 깊이 몸을 숙여 절하며 눈물을 흘린다.
긴 여운이 남는 소설이다. 작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부처의 생애에 새로운 이야기를 덧붙인다. 부처가 출가하여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는다는 뼈대는 같으나 부처와 동명이인이지만 다른 인물인 싯다르타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심지어 원래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던 부처는 이미 깨달음을 얻은 상태로 소설 속에서 고타마라는 인물로 등장한다. 소설의 주인공 싯다르타는 사문으로서의 고행, 부처의 가르침, 세속의 번뇌, 자식으로 인한 고통 등을 다 겪고 난 뒤에야 흐르는 강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
부처의 생애에 대해서는 아직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어서 그의 원래 여정이 어땠는지 잘 알지 못한다. 분명히 소설 <싯다르타>와 많이 다르겠지만 나는 이 소설의 이야기도 마음에 든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번째는 깨달음이 누군가의 가르침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니고 오직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말한 점이고, 두 번째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세속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야 하는 것이 아니고 세속과 탈속의 균형 속에서 얻을 수 있다고 말한 점이다.
소설 속에서 싯다르타는 해탈한 고타마를 만나 가르침을 받는다. 너무나도 완벽한 가르침이었다. 싯다르타도 고빈다도 그렇게 생각했다. 고빈다는 그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싯다르타도 그러고 싶었으나 그의 마음 속에 생긴 한 가지 의문이 그를 끝까지 고민하게 했다. 그 의문은 나중에 싯다르타가 고타마를 만나 물어본 질문 속에 담겼다. '당신이 깨달음은 얻은 것은 당신 스스로 생각하고 인식해서 얻은 것이지, 누군가의 가르침으로 얻은 게 아니지 않습니까?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당신이 깨달은 것을 아무리 가르쳐도 나는 그것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깨달음은 오로지 스스로 얻을 수밖에 없는 것이니까요.'
나는 이 부분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지금까지 나도 '나는 누구이고,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고, 앞으로 어떻게 되는가' 와 같은 실존적 질문에 대하여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넓게는 많은 철학자나 여러 종교로부터, 좁게는 부모님이나 선생님, 친구로부터 말이다. 그 질문에 대해서 제각기 다양한 해답을 제시했다. 내 마음에 쏙 드는 것도 있었고 마음에 영 들지 않는 것도 있었다. 또 개인적인 선호와는 별개로 논리적으로 납득할 만한 것이 있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것도 있었다. 나는 이런 의문이 들었다. 그럼 나는 이 중에서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해서 그에 맞게 살면 되는 걸까? 그런데 나는 그 선택을 온전히 주체적으로 하고 있는 걸까? 오래전부터 교육받은 철학이나 믿었던 종교 때문에 내 정신이 편향되었다거나, 부모님을 비롯해 나를 둘러싼 대다수가 믿고 있기에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게다가 이런저런 고민 끝에 인생의 진리라고 선택하고 믿었던 것조차 시간과 환경, 자아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나는 이 문제에 대해 계속 고민하며 살았다.
그렇다고 이 책이 이 의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준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내게는 작은 위안을 주었다. 그것은 바로 '삶의 긴 과정 끝에 닿은 뒤에야 내가 무슨 깨달음을 얻는지 알 수 있다.' 는 메시지였다. 그것은 내게 주어진 삶을 충실하게 살고 희로애락을 직접 경험해하고 난 뒤에야 삶이란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깨달음의 과정 안에 있으며,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아직은 알 수 없고, 삶에서 주어지는 기쁨과 행복, 슬픔과 고난은 삶의 여정 가운데 우리가 거쳐야 하는 과정일 뿐이며, 이 모든 여정의 끝에 도달한 뒤에야 우리는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는 뭔가를 얻을 수 있다. 삶이 늘 기쁘고 행복하기만 하다면 우리는 아마 애초에 삶의 의미 같은 것에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그저 그 시간을 누리고 즐기며 살면 될 테니 말이다. 그러나 삶에는 슬픔과 고통과 좌절의 순간이 있으며 우리는 살면서 그것을 외면할 수 없다. 삶은 고통을 피할 만한 샛길이나 요령을 알려주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오직 하나의 길만 있다. 그것은 그 고통과 정면으로 부딪히고 몸과 마음으로 온전히 경험하는 것뿐이다. 죽을 만큼 힘들고 슬픈 과정을 거치고 나면 우리는 여정 한가운데로 돌아와 다시 앞으로 걸을 것이다. 그 힘든 순간에 이것이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고, 고통의 순간이 영원하지 않을 것이며, 이 경험을 통해 또 한 차례 성숙하게 될 거라는 사실은 내게 많은 위안이 되었다.
두번째로 이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던 이유는 깨달음이 세속과 탈속의 균형 속에 있다는 말 때문이다. 흔히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속세를 멀리 해야 한다거나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얘기를 한다. 종교 지도자 같은 사람들도 비슷한 얘기를 하면서 욕망에 휘둘리고 집착하는 사람들을 계몽시키려고만 하고 나아가 그들의 설교에서는 일종의 선민의식까지 느껴질 정도이다. 따라서 평범한 사람들은 자칭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람들로부터의 '혼쭐'에 늘 자신의 잘못을 찾고 세속적인 자신의 삶을 반성하기에 바쁘다. 그런데 정말 우리의 삶은 거짓과 욕망, 집착과 같은 죄로 가득 차있는 걸까?
소설 속의 싯다르타도 처음에는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로부터 가르침을 받을 때나 고행길에 있을 때, 평범한 사람들을 세속적이라고 무시하고 그들의 삶 역시 보잘 것 없이 여겼다. 그러나 그러던 그가 카마라를 만나게 되면서 그렇게 무시했던 속세의 사람들과 같은 삶을 살게 된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속세의 삶이 무의미하다고만 생각했던 그는 평범한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하루 하루의 삶 역시 또 하나의 깨달음을 향한 과정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만약 그가 친구 고빈다처럼 붓다를 좇아 고행을 계속 했었더라면 그는 평생 속세 안에도 깨달음이 있음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은 소설 속에서 이렇게 표현되었다. '그는 그들을 이해하게 되었고 생각이나 통찰이 아니라 오로지 충동이나 욕망에 이끌리는 그들의 삶도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었다. 자신 또한 그들과 비슷한 존재로 여겨졌다. 그는 완성의 경지에 다가가고 있었다.' 탈속하여 고행을 통해서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가 세속의 삶을 겪고, 그것을 이해하고 존중하게 되면서 비로소 완성의 경지로 다가가게 된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한 발 짝 떨어져야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불완전한 깨달음이다. 완전한 깨달음을 위해서는 다른 한쪽의 깨달음도 찾아야 한다. 바로 우리의 삶을 살아가면서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다. 바로 이 세속과 탈속의 균형 속에 완전한 깨달음이 있다는 말 역시 내게 큰 위안이 되었다. 나는 요즘 세상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 치열하게 보내는 일상이 평가절하되는 것 같아 불만이었다. 흔히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 하면 세상과 유리되어 관조적인 삶의 태도를 보이는 신선 같은 사람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진 일상을 묵묵히 살아온 사람들 역시 그들 못지않게 깨달음을 얻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한다. 몇십 년 간 매일같이 반복되는 출퇴근 속에서 회사를 다니며 가정을 부양한 가장이나 같은 자리에서 오랫동안 과일이나 채소 따위를 팔며 생계를 유지한 노인이나 매일 아침 가족을 위한 아침밥을 차리고 집안일을 하고 웃는 얼굴로 자녀를 맞이하는 주부 같은 사람들 말이다. 주어진 삶을 충실하게 사는 것도 깨달음을 위한 고행만큼이나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삶이 무엇인지 모른다. 신이 이 세상을 만든 건지 아니면 이 세상은 내면의 투영에 불과한 건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아직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모른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가족을 위해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애초에 삶이란 무한한 반복 속에서 별다른 의미가 없는 일인지. 그러나 무엇을 해야할 지는 알 것도 같다. 지금 내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해 사는 것. 지나치게 탈속적이지도, 지나치게 세속적이지도 않게 끊임없이 고민하며 균형있게 사는 것. 그러면 언젠가 이 삶의 끝에서 무언가 깨닫는 게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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