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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 에릭 와이너, 2021

by Ditmars 2024. 4. 30.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2021

 

 우리는 우리가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정보와 지식을 원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지혜를 원한다. 여기에는 차이가 있다. 정보는 사실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것이고, 지식은 뒤죽박죽 섞인 사실을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지혜는 뒤얽힌 사실들을 풀어내어 이해하고, 결정적으로 그 사실들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영국의 음악가 마일스 킹턴Miles Kington은 이렇게 말했다. "지식은 토마토가 과일임을 아는 것이다. 지혜는 과일 샐러드에 토마토를 넣지 않는 것이다." 지식은 안다. 지혜는 이해한다.
 지식과 지혜의 차이는 종류의 차이이지 정도의 차이가 아니다. 지식이 늘어난다고 해서 반드시 지혜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며, 실제로 지식이 늘면 오히려 덜 지혜로워질 수도 있다. 앎이 지나칠 수도 있고, 잘못 알 수도 있다.
 지식은 소유하는 것이다. 지혜는 실천하는 것이다. 지혜는 기술이며, 다른 기술과 마찬가지로 습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지혜를 운으로 얻으려는 것은 바이올린을 운으로 배우려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게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여기저기서 지혜의 부스러기를 줍기를 바라면서 비틀비틀 인생을 살아나간다. 그러면서 혼동한다. 시급한 것을 중요한 것으로 착각하고, 말이 많은 것을 생각이 깊은 것으로 착각하며, 인기가 많은 것을 좋은 것으로 착각한다. 한 현대 철학자의 말마따나, 우리는 "잘못된 삶"을 살고 있다.

<p.7>

 

 마르쿠스는 골치 아픈 사람에게서 영향력을 빼앗으라고 제안한다. 나의 삶에 영향을 미칠 자격을 빼앗을 것. 다른 사람은 나를 해칠 수 없다.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있는 것은 나를 해칠 수 없기 때문"이다. 옳은 말씀이다. 왜 나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신경 쓰는 걸까? 생각은 당연히 내 머리가 아니라 그들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p.35>

 

 사람을 판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람의 대답이 아닌 질문을 보는 것이다.
- 볼테르

<p.54>

 

 영국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행복하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그러면 곧 행복하지 않게 될 것이다."라는 말로 쾌락의 역설(헤도니즘의 역설Paradox of Hedonism이라고 불리기도 한다)을 설명했다. 행복은 붙잡으려고 애쓸수록 우리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행복은 부산물이지, 절대 목표가 될 수 없다. 행복은 삶을 잘 살아낼 때 주어지는 뜻밖의 횡재 같은 것이다.

<p.76>

 

 걷기는 자극과 휴식, 노력과 게으름 사이의 정확한 균형을 제공한다.

<p.92>

 

 상상 속에서든 현실에서든 역경을 만나면 자기 연민이나 절망에 빠지지 말고 그저 다시 시작하라.
- 마르쿠스

<p.99>

 

 사람들은 자신의 감각이 주변 환경을 훑으며 정보를 뽑아내는 안테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감각은 홍수처럼 밀려드는 감각 정보에 압도되지 않도록 뒤엉켜 있는 온갖 잡다한 것에서 유의미한 신호를 걸러내는 필터에 더 가깝다. 소로의 말처럼 우리는 "무한한 세상에서 자신의 몫"만을, 더도 덜도 아닌 딱 그만큼만 받아들이도록 타고난다.

<p.133>

 

 "당신이 보는 것이 곧 당신 자신이다."
- 베다

<p.134>

 

 쇼펜하우어는 다른 동물인 고슴도치의 도움을 받아 인간관계를 설명한다. 추운 겨울날 한 무리의 고슴도치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고슴도치들은 얼어 죽지 않으려고 서로 가까이 붙어 서서 옆 친구의 체온으로 몸을 덥힌다. 하지만 너무 가까이 붙으면 가시에 찔리고 만다. 쇼펜하우어는 고슴도치들이 "두 악마 사이를 오가며" 붙고 떨어지기는 반복하다가 결국 "서로를 견딜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거리"를 발견한다고 말한다.
 오늘날 고슴도치의 딜레마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딜레마는 우리 인간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필요로 하지만 타인은 우리를 해칠 수 있다. 관계는 끊임없는 궤도 수정을 요하며, 매우 노련한 조종사조차 가끔씩 가시에 찔린다.

<p.162>

 

 다른 철학자들이 저 바깥세상을 설명하려 시도한 것과 달리 쇼펜하우어는 내면세계에 더 관심이 많았다.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면 이 세계도 알 수 없다. 이 사실은 내게 믿을 수 없을 만큼 명백하다. 왜 그토록 많은 철학자가, 다른 방면으로는 똑똑한 작자들이, 이 사실을 놓치는 걸까? 내 생각에 그 이유 중 하나는 외부를 살피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환한 불빛 아래서 자기 열쇠를 찾는 술주정뱅이나 마찬가지다.
 "여기서 열쇠를 잃어버리셨소?" 지나가던 사람이 묻는다.
 "아니오, 열쇠는 저쪽에서 잃어버렸소." 술주정뱅이가 저쪽 어두운 주차장을 가리키며 말한다.
 "그런데 왜 여기서 열쇠를 찾고 있는 거요?"
 "여기가 환하니까요."
 쇼펜하우어는 달랐다. 그는 가장 어두운 곳을 살폈다.

<p.175>

 

 "가장 최근에 쓰인 것이 늘 더 정확하다는 생각, 나중에 쓰인 것이 전에 쓰인 것보다 더 개선된 것이라는 생각, 모든 변화는 곧 진보라는 생각보다 더 큰 오산은 없다."
- 쇼펜하우어

<p.178>

 

 정원과 철학은 서로 잘 어울린다. 프랑스 계몽주의의 총아였던 볼테르는 "우리는 반드시 자신만의 정원을 가꾸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
 정원은 관리가 필요하다. 우리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뒷마당에서 빈둥거리는 사람이 정원사가 아니듯, 생각한다고 다 철학자인 것은 아니다. 정원일과 철학은 둘 다 어린아이의 관대한 즐거움이 수반된 어른의 절제된 헌신을 필요로 한다.

<p.190>

 

 쾌락의 사다리 맨 위에는 "자연스럽고 반드시 필요한" 욕망이 있다. 예를 들면 사막을 걸어서 통과한 후에 마시는 물 한 잔 같은 것이다. 그 밑에는 "자연스럽지만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은" 욕망이 있다. 사막을 통과한 후에 물 한 잔을 마시고 나서 마시는 소박한 테이블 와인 한 잔. 마지막으로 피라미드 맨 밑에는 자연스럽지도, 반드시 필요하지도 않은 욕망, 에피쿠로스가 말한 "텅 빈" 욕망이 있다. 사막을 걸어서 통과한 후에 물 한 잔을 마시고 나서 테이블 와인을 마신 다음 마시는 값비싼 샴페인 한 병이 여기에 해당한다. 에피쿠로스는 이 텅 빈 욕망이 가장 큰 고통을 낳는다고 했다. 이 욕망은 만족시키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p.199>

 

 에피쿠로스는 쾌락에는 종류의 차이도 있지만 작용 속도의 차이도 있다고 말한다. 그는 정적인 쾌락과 동적인 쾌락을 구분한다. 시원한 물 한 잔으로 갈증을 해소하는 행위는 동적인 쾌락을 준다. 물을 마신 후에 우리가 경험하는 만족스러운 기분(갈증 없음)은 정적인 쾌락이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물을 마시는 행동은 동적인 쾌락이고 물을 마신 상태는 정적인 쾌락이다. 우리는 보통 동적인 쾌락이 가장 큰 만족감을 준다고 생각하지만 에피쿠로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정적인 쾌락이 더 우월한 쾌락인데,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바로 그 상태이기 때문이다. 정적인 쾌락은 목표지, 수단이 아니다.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빵과 물을 먹고 살 때 몸이 쾌락으로 가득 차는 것을 느낀다. 내가 호화로운 삶이 주는 쾌락에 침을 뱉는 이유는 그러한 생활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에 으레 따라오는 불쾌함 때문이다."
 호화로운 삶에 으레 따라오는, 예를 들면 고급 레스토랑 프렌치런드리French Laundry에서 5코스 정찬을 먹은 후에 따라오는 불쾌함이란 정확히 무엇일까? 에피쿠로스는 신체 감각(소화불량, 숙취)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만 그가 주로 언급하는 것은 더 드러나지 않는 고통, 즉 갖지 못한 고통이다. 당신이 대서양에서 잡은 자연산 왕연어 테린을 맛있게 즐겼다고 해보자. 하지만 이제 연어 테린은 다 먹고 없고, 당신은 다시 그 요리를 간절히 갈망한다. 당신은 연어 테린에, 즉 그 연어를 잡은 어부에게, 테린을 내놓은 레스토랑에, 테린을 사먹을 월급을 준 상사에게 당신의 행복을 의탁했다. 이제 당신은 연어 테린 중독자이며, 당신의 행복은 연어를 주기적으로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다. 이게 다 당신이 불필요한 욕망을 필요한 욕망으로 착각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p.201>

 

 "우리가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즐기는 것이 우리를 풍요롭게 한다."
- 에피쿠로스

<p.202>

 

 "난 충분히 좋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다고 봐요. 이런 것들이 삶에서 더 중요한 일에 시간을 쏟을 수 있게 해줘요. 게다가 충분한 걸로 부족한 사람에게는 뭐든 충분하지 않을 걸요."
- 톰 머를

<p.212>

 

 관심은 중요하다. 다른 무엇보다도 더, 관심은 우리의 삶을 형성한다. 미국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지금 당장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 바로 현실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인 것만이 우리 앞에 존재한다. 이건 은유가 아니다. 사실이다. 많은 연구에서 나타나듯이 사람은 자신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을 보지 못한다.

<p.222>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닌 가장 쉬운 것을 평가한다.

<p.247>

 

 우리는 신을 존경하지 않는다. 신을 숭배하거나 두려워할 수는 있지만, 신을 존경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인간을, 자신보다 더 나은 버전의 인간을 존경한다.

<p.277>

 

 "네겐 노력할 권리가 있지만, 반드시 그 노력의 결실을 취할 권리는 없다."

<p.279>

 

 충분한 걸로는 부족한 사람에게는 무엇이든 충분하지 않다.
- 에피쿠로스

<p.299>

 

 공자가 격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가 있다. 이 이유는 인과 친절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친절은 자유롭게 흘러 다니는 것이 아니다. 친절은 담길 그릇이 필요하다. 공자에게는 그 그릇이 올바른 의례적 행위인 예다. 이런 예의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고 공자는 말한다. 그래도 마치 예의를 신경 쓰는 것처럼 자리를 정리하라. 마치 예의가 중요한 것처럼 정해진 규칙에 따라 식사를 하라. 이런 의례가 따분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친절은 바로 이러한 일상적 토대에서 나온다.

<p.313>

 

 친절은 힘든 것이다. 친절에는 감정 이입이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유교 의례가 필요하다. 결혼과 졸업, 죽음처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 우리가 의식을 치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러한 사건들은 너무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켜서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을 수 있다. 의례는 우리를 하나로 모아준다. 의례는 우리의 감정을 담을 그릇을 제공한다.

<p.324>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한다고, 자기계발서들은 조언한다. 이런 접근법은 우리가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목적지를 파악하고 있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인생을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가끔 우리는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채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니 움직일 것. 지금 있는 곳에서부터 움직이기 시작할 것.

<p.336>

 

 우리의 정체성은 자기 주위에 무엇을 두기로 선택하느냐에 크게 좌우된다. 주변에 무엇을 두느냐는 선택이다. 철학은 우리가 내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선택을 겉으로 드러내 보인다. 어떤 것이 자신의 선택임을 깨닫는 것은 더 나은 선택으로 향하는 첫걸음이다.

<p.347>

 

 니체가 영원회귀를 "가장 무거운 짐"이라 칭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영원보다 더 무거운 것은 없다. 만약 모든 것이 무한히 되풀이된다면, 인생에 가벼운 순간이나 사소한 순간은 없다. 아무리 보잘것없더라도 모든 순간이 동일한 무게와 질량을 갖는다. "모든 행동은 똑같이 크고 작다."
 영원회귀를 매일 스스로를 돌아보는 기준으로 삼아보라. 당신은 지금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정말로 그 데킬라를 다 마시고 영원한 숙취에 시달리고 싶은가? 영원회귀는 자기 삶을 무자비하게 검사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질문하게 한다. 영원히 가치 있는 일은 무엇인가?

<p.383>

 

 만약 우리의 삶이 (아니, 온 우주가) 실제로 되풀이 된다면 우리는 무엇을 통제할 수 있는가? 니체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행동이 아니라 태도라고 생각했다. 니체 철학의 핵심에는 "완벽한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자신의 방향성을 바꾸려는 시도"가 있었다. 보통 우리는 불확실성에서 도망쳐 확실성을 향해 달려간다. 니체는 그것이 불면의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가치이며, 우리가 가치를 부여하는 모든 것은 재평가가 가능하다.

<p.387>

 

 "바람에 수없이 시달리지 않은 나무는 땅에 튼튼하게 뿌리박지 못한다. 바람에 흔들려야 땅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고 안정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고난은 덕을 함양할 수 있는 기회다."
- 세네카

<p.401>

 

 우리는 모든 것이 본인에게 달렸다고 말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자신이 더 똑똑하거나 더 부유하거나 더 날씬하지 않은 것은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몸이 아픈 것은 본인이 먹거나 먹지 않은 것 때문이거나 받지 않았거나 받았던 건강 검진 때문이거나 하지 않았거나 지나치게 많이 한 운동 때문이거나 먹거나 먹지 않은 비타민 때문이다. 메시지는 분명하다. 우리는 자기 운명의 통제권을 갖는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네가 지금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고, 스토아학파는 답한다. 대부분이 자기 통제하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우리의 통제 밖에 있다. 부도 명성도 건강도 통제할 수 없다. 본인의 성공과 자식의 성공도 마찬가지다. 뭐, 규칙적으로 운동할 수야 있겠지만 헬스장에 가는 길에 버스에 치일 수도 있다. 몸에 좋은 음식만 먹을 수야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오래 사는 것도 아니다. 사무실에서 하루 열네 시간씩 일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상사가 당신을 싫어해서 당신의 커리어를 방해할 수도 있다.
 스토아철학은 이처럼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는 상황과 성과를 "무관한 것"이라 칭한다. 이런 무관한 것들은 우리의 인성이나 행복에 티끌만큼도 보탬이 되지 않는다. 무관한 것들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그러므로 스토아철학은 무관한 것들에 '무관심'하다. 에픽테토스는 이렇게 말한다. "몸이 아픈데도 행복하고, 위험에 처했는데도 행복하고, 죽어가고 있는데도 행복하고, 나쁜 평판을 듣는데도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내게 보여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내게 데려오라! 신들의 이름으로, 그렇다면 나는 스토아 철학자를 보게 될 것이다!"

<p.404>

 

 지난 일은 돌아보면 이런 스토아적 태도가 결과를 바꾸진 않았음을 롭도 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롭이 고통을 견디는 방식을 바꿔주었다. 롭은 고통스러웠지만 삶이 다르게 흘러가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고통을 더하진 않았다.

<p.406>

 

 키케로는 궁수를 떠올려보라고 말한다. 궁수는 자기 능력이 허락하는 한 가장 훌륭하게 활시위를 당기지만 시위를 놓고 나면 화살의 궤적이 더 이상 자기 손에 달려 있지 않음을 알고 숨을 내쉰다. 스토아철학은 이렇게 말한다. "해야 할 일을 하라. 그리고 일어날 일이 일어나게 두라." 우리는 외부의 목표를 내면의 목표로 바꿈으로써 실망의 공격에 대비해 예방접종을 놓을 수 있다.

<p.408>

 

 고난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자동으로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내리는 선택임을 깨달아야만 더 나은 선택을 내리기 시작할 수 있다.

<p.411>

 

 사람들은 언덕을 굴러 내려가는 원기둥과 같다고, 롭이 눈을 깜빡이며 말한다. 모든 원통은 결국 언덕 밑에 도착할 것이다. 그건 정해진 사실이다. 하지만 이 원통들이 여기저기 부딪치며 힘들게 굴러갈지 부드럽게 굴러갈지는 원통에 달려 있다. 이 원통들은 매끈하게 다듬은 완벽한 형태의 원통인가? 아니면 거칠고 울퉁불퉁한 원통인가? 즉 이 원통들은 도덕적인 원통인가? 언덕이나 중력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우리가 어떤 종류의 원통이 될 것인가는 통제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p.421>

 

 스토아철학에 따르면 어린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적절한 반응은 다음과 같다. "나는 내가 언젠가는 죽을 인간을 낳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p.426>

 

 노년은 고정되어 있는 거대한 물체이며,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에 있다. 노년과의 만남은 절대로 부드럽게 이뤄질 수 없다. 우리는 노년을 스쳐 지나가지 않는다. 옆구리를 살짝 부딪치지 않는다. 우리는 노년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p.435>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가 말했듯이 우리가 노화 탓으로 돌리는 많은 결점은 사실 인성의 문제다. 노화는 새로운 성격 특성을 만들어낸다기보다는 기존의 특성을 더욱 증폭한다. 우리는 나이 들수록 더 강렬한 형태의 자기 자신이 된다.

<p.439>

 

 어떻게 하면 우리는 더 진정성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가? 실존주의자들은 이 질문의 답이 오로지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좋은 소식을 전한다. 그 답은 신이나 인간 본성에 있지 않다. 하나의 인간 본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각기 다양한 특성들이 있을 뿐이다. 또는 보부아르가 말했듯이, "본성이 없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이러한 주장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힘을 인간에게 쥐여주며, 동시에 겁을 주기도 한다. 사르트르의 유명한 말처럼 우리는 "자유를 선고받았다." 우리는 자유를 갈망하면서 동시에 두려워하는데, 진정으로 자유롭다면 자기 불행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스스로 져야 하기 때문이다.

<p.445>

 

 스토아학파의 믿음처럼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것, 전자는 바꾸고 후자는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의 핵심이라면, 노년은 스토아철학의 지혜를 연습할 수 있는 완벽한 훈련장이다. 나이가 들면 통제에서 수용의 방향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한다. 수용은 체념과 다르다. 체념은 수용을 가장한 저항이다.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척하는 것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척하는 것과 같다.

<p.456>

 

 "추억에는 일종의 마법, 나이에 상관없이 느낄 수 있는 마법이 있다." 보부아르는 말한다. 그 마법의 뿌리는 과거에 있지만 마법이 꽃을 피우는 것은 현재다. 얼마나 오래전의 일이든 상관없이 우리가 과거를 경험하는 것은 언제나 현재다. 과거는 현재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보부아르는 풍성한 과거가 없는 현재의 삶을 상상할 수 없었다. "만약 우리가 지나온 세계가 황폐하다면 음침한 사막 말고는 거의 아무것도 볼 수 없을 것이다."

<p.461>

 

 나이가 들면 특이하고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생각에 신경 쓰지 않게 되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애초에 다른 사람들은 내 생각을 안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p.465>

 

 다른 국가에서 보내는 이틀은 익숙한 환경에서 보내는 30일만큼의 가치가 있다.
- 유진 이오네스코(극작가)

<p.467>

 

 소냐에게.
 모든 것을, 특히 너 자신의 질문을 물으렴. 경이로워하며 세상을 바라보렴. 경건한 마음으로 세상과 대화하렴. 사랑을 담아 귀를 기울이렴. 절대로 배움을 멈추지 말렴. 모든 것을 하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도 가지렴. 네가 원하는 모든 높이의 다리를 건너렴. 네가 가진 시시포스의 돌덩이를 저주하지 말렴. 받아들이렴. 사랑하렴. 아, 맥도날드는 좀 줄이려무나.
싫음 말고. 그건 너의 선택이니까.
- 작가가 딸에게 남겨주고 싶은 쪽지

<p.475>

 

 "이 세상 모든 지혜와 이론의 핵심은 결국 바로 이것이다. 우리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 - 몽테뉴

<p.482>

 

 에피쿠로스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고 말한다.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대해 걱정하며 잠에서 깨지 않는다. 그렇다면 죽음에 대해서는 왜 걱정하는가? 태어나기 전에 우리는 존재하지 않았고, 죽으면 다시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가 존재할 때 죽음은 현재가 아니며, 죽음이 현재일 때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p.483>

 

 나는 몽테뉴가 나처럼 필요할 때는 그럴듯한 외향형처럼 굴 수 있는 내향형이었으리라 추측한다. 우리 같은 사교적 내향형들은 세상을 속일 수 있지만 거기에는 대가가 따른다. 꾸며낸 외향성은 우리를 소모시킨다. 진을 빼놓는다.

<p.485>

 

 죽음의 해결책은 더 긴 삶이 아니다. 절망의 해결책이 희망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죽음과 절망 모두 같은 약을 필요로 한다. 수용이다.

<p.497>

 

 "새로 시작되는 매일매일이 너의 마지막 날이라고 확신하라. 그 뜻밖의 시간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니."
- 호라티우스(시인)

<p.500>

 

더보기

 "우리는 반드시 자신만의 정원을 가꾸어야 한다." 작가가 이 책에 인용한 볼테르의 말이다. 자신의 정원을 가꾸라니... 몇 년 전 읽은 책 <디디의 우산>에 나오는 네 앞마당을 쓸라는 말과 교묘하게 잘 어울린다. 그 책을 읽은 뒤로 '네 앞마당이나 쓸어' 라는 말을 종종 쓰곤 했는데 이제는 그 말에 한 마디를 덧붙여야 할 것 같다. "네 앞마당이나 쓸고 정원이나 가꿔."

 앞마당을 쓸라는 말은 다른 일 혹은 다른 사람에 신경쓰지 말고 네 할 일이나 열심히 하라는 말로 받아들였다. 타인에게 너무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동시에 너무 많은 관심을 기대하는 요즘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말 같다. 정원을 가꾸라는 말은 내겐 자신의 내면을 가꾸라는 말로 들린다. 그런데 내면을 가꾸라니? 외면을 가꾸기 위해서라면 나는 나름대로 노력을 해왔다. 옷도 사고, 헤어스타일도 바꾸고, 운동도 하고... 물론 그 결과가 생각만큼 훌륭하진 않은 것 같지만 적어도 외면에 대해서는 꾸준히 신경을 써 온 것이다. 그러나 내면을 가꾸는 것에 대해서는 신경을 써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일단 무엇이 내면의 모습인지, 어떻게 하면 그것을 잘 가꿀 수 있는지 모르겠고 그 필요성도 느껴본 적이 없는 듯하다.

 

 내면을 가꾼다는 것은 무엇일까? 잘 가꿔진 내면이 어떤 모습인지 먼저 생각해 보자. 살면서 '저 사람은 내면이 참 아름답다'라고 느꼈던 사람들이 있는지. 머릿속에 몇 명이 떠오른다. 사람마다 떠오르는 인물이 다르겠지만 내 머리에 떠오른 그들은 심성이 착하고 주변에 휘둘리지 않는 강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나는 바른 인성과 고유의 철학, 이것이 잘 가꿔진 내면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어떤가? 남을 돕는 배려심과 봉사 정신,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과 실천 의지,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태도, 강한 자기 절제력과 목표를 향한 추진력 등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다양한 요소들이 잘 가꾼 내면의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나의 이상적인 정원의 모습을 떠올렸다면 이제는 나의 정원을 그에 맞게 가꿀 차례이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우리가 이 단계에서 구체적인 목표, 계획, 실천이 없었기 때문에 내면을 가꾸는 것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내가 바른 인성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을 때, 이 목표는 너무도 막연하게 느껴진다. 얼마나 바른 인성인지, 바른 인성을 기르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무슨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 계획하고 실천할 수가 없다. 반면에 멋진 외면의 모습을 갖겠다는 건 목표를 정하고 계획, 실천을 할 수 있다. 주 2~3회 운동을 하고, 지금보다 살을 5kg 정도 빼고, 멋진 옷을 사 입겠다는 등의 구체적인 계획과 실천이 가능하다. 여기에는 외면을 중시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한몫한다고 생각한다. 외면에 대한 중시는 사람들로 하여금 멋진 외면의 구체적인 이미지를 갖도록 한다. 그 결과 누구나 인정하는 멋진 외면의 기준이 생기고 그 목표를 위해 다들 노력하게 된다. 그러나 멋진 내면은 외면에 비해 사회적 주목도가 떨어진다. 그러다 보니 대다수가 공유하는 공통된 기준도 없고 내면을 가꾸려는 동기도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 만약 우리가 잘생기거나 예쁜 연예인보다 남을 돕기 위해 노력한 의인이나 사람들에게 친절한 인물들에게 관심을 갖고 사회적 인정을 주었다면 아름다운 내면을 위한 노력이 지금보다는 덜 낯설게 느껴졌을 것이다. 

 

 과거 유명한 야구선수 오타니 쇼헤이의 만다라트 계획표가 인터넷을 떠돌며 사람들의 관심을 받은 적이 있다. 만다라트 계획표는 간단히 설명하면 1개의 궁극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8개의 세부 목표를 설정하고, 마지막으로 8개의 세부 목표를 이루기 위한 8개의 실천 방안을 적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총 64개의 실천 방안이 만들어지는데, 평소 이것들을 잘 실천하면 8개의 세부 목표를 이룰 수 있고, 8개의 세부 목표를 이룬 결과 1개의 궁극적인 목표에 다다르게 되는 계획표라고 할 수 있다. 내가 갑자기 오타니 쇼헤이의 만다라트 계획표 얘기를 꺼낸 건 그가 궁극적인 목표 '드래프트 1순위'를 이루기 위해 설정한 8개의 세부 목표 중에 하나가 인간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인간성이라는 세부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감성, 사랑받는 사람, 계획성, 감사, 지속력, 신뢰받는 사람, 예의, 배려라는 8개의 실천 방안을 설정했다. 즉 그는 잘 가꾼 내면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어 했고 이를 위해 구체적인 목표를 정하고 계획을 세워 실천한 것이다. 그 결과 오타니 쇼헤이는 야구 실력뿐만 아니라 좋은 인성으로 사람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이제 결론이다. 좋은 내면, 즉 잘 가꾸어진 정원을 갖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실천해야 한다. 여태껏 해본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기 때문에 낯설게 느껴지는 건 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내면에 대한 교육을 받지 않아서거나 내면보다 외면을 중시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일 테지만 중요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내면을 가꾸기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실천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바른 인성과 흔들리지 않는 강한 마음이라는 목표를 두고 이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생각해 봤다. 바른 인성을 위해서는 양보하기, 먼저 인사하기, 칭찬하기, 어린 사람에게도 예의를 갖추기, 유머를 잃지 않기 등이 떠오르고 흔들리지 않는 강한 마음을 위해서는 여러 책 읽고 생각 정리하기, 다른 사람과의 대화 속에서 배울 점 찾기, 남들과 비교하지 않기, 나의 부족한 점을 인정하기 등이 떠오른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 아주 간단히 실천 방안을 나열했을 뿐인데 막연하게 생각만 했을 때와는 180도 달라진 것 같다. 내일부터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알 것 같다고나 할까. 모두들 자신만의 정원을 가꾸기 위해 노력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