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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들어진 신 > 리처드 도킨스, 2007 (eBook)

by Ditmars 2024. 6. 30.

<만들어진 신> 리처드 도킨스, 2007 (eBook)

 

 인간의 사유와 감정은 뇌 속의 물리적 실체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대단히 복잡한 상호 연결을 통해 출현한다. 이런 철학적 자연학자라는 의미의 무신론자는 자연적이고 물리적인 세계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관찰 가능한 우주의 배후에 숨어 있는 초자연적인 창조적 지성은 없다고, 몸보다 오래 사는 영혼은 없다고 믿는다. 그들은 오직 우리가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자연 현상들이라는 의미로만 초자연적인 현상을 바라본다. 현재 자연계 너머에 놓여 있는 듯이 보이는 무언가가 아직 이해되지 않은 현상일 뿐이라면, 우리는 결국에는 그것을 이해하고 자연계 내에 포함시킬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우리가 무지개의 신비를 푼다고 해도, 그 경이감이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p.54>

 

 "경험할 수 있는 무언가의 배후에 우리 마음이 파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으며, 그 아름다움과 숭고함이 오직 간접적으로만 그리고 희미하게만 우리에게 도달한다고 느낄 때, 그것이 바로 종교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종교적이다."
- 아인슈타인

<p.72>

 

 "우리는 동료의 종교를 존중해야 하지만, 자신의 아내가 아름답고 아이들은 영리하다는 그의 이야기를 존중하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그리고 그런 정도로만 존중해야 한다."
- H. L. 멘켄

<p.102>

 

 세속주의를 토대로 한 미국이 지금 가장 열성적인 기독교 국가가 되어 있는 반면, 입헌군주가 수장인 국교가 있는 영국이 가장 덜 종교적인 국가가 되어 있다는 역설적인 사실이 자주 언급되곤 한다.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끊임없이 받지만, 나도 잘 모른다. 영국인의 경우 신교도와 구교도가 번갈아 우위를 점하면서 상대방을 조직적으로 살상한, 종파 간 폭력으로 점철된 끔찍한 역사를 겪으면서 종교에 진저리가 났을 가능성도 있다. 미국이 이민자들의 나라라는 점에 착안한 주장도 있다. 한 동료는 유럽의 확대 가족에게서 받았던 안정감 및 위안과는 단절된 이민자들이 이질적인 지역에서 교회를 일종의 친족 대체물로 받아들였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더 연구할 가치가 있는 흥미로운 생각이다. 많은 미국인들이 동네 교회를 정체성의 중요한 일부로 여긴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교회는 사실상 확대 가족의 속성들을 일부 지니고 있다.
 하지만 또 다른 가설은 미국의 신앙심이 역설적으로 헌법의 세속주의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미국이 법적으로 세속적이라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종교는 자유 기업이 되었다. 교회들은 군중을 끌어들이기 위해 (특히 그들이 가져다줄 두둑한 십일조를 위해) 서로 경쟁하며, 그 경쟁은 시장에서 쓰이는 모든 공격적인 영업 기법들을 총동원하여 이루어진다. 비누 판촉에 쓰이는 기법들이 신을 광고하는 데에도 쓰이며, 그 결과 교육을 적게 받은 계층들이 종교에 열광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대조적으로 영국의 국교는 종교를 거의 종교로 볼 수 없는 사교적인 취미 생활처럼 변모시켰다.

<p.142>

 

 많은 사람들이 이미 수용된 독단적 견해는 독단론자들이 아닌 회의론자들이 반증해야 하는 것처럼 말한다. 물론 그것은 잘못이다. 내가 지구와 화성 사이에 타원형 궤도를 따라 태양을 도는 중국 찻주전자가 하나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찻주전자가 우리의 가장 강력한 망원경으로도 보이지 않을 만큼 아주 작다는 단서를 신중하게 덧붙인다면, 아무도 내 주장을 반증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 주장이 반증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을 의심하는 것은 인간 이성에 대한 용납하기 어려운 억측이라고까지 내가 말한다면 그건 헛소리로 여겨져야 옳다. 하지만 그런 찻주전자가 존재한다고 옛 서적에 명확히 나와 있고, 일요일마다 그를 신성한 진리라고 가르치며, 학교에서도 그를 아이들의 정신에 주입시킨다면, 그 존재를 선뜻 믿지 못하는 것은 괴짜라는 표시가 될 것이고, 이를 의심하는 자는 계몽시대의 정신과의사나 그 이전의 종교 재판관의 이목을 끌게 될 것이다.
-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p.184>

 

 요점을 극명하게 보여줄 수 있도록 어떤 특수한 환경적인 조건 덕분에 법의학자들이 예수에게 정말 생물학적 아버지가 없었음을 보여주는 DNA 증거를 발굴할 수 있었다고 상상해보자. 과연 종교 변증론자들이 어깨를 으쓱하면서 초연하게 이렇게 말할 것 같은가?
 "무슨 상관인가? 과학적 증거는 신학적 질문들과 전혀 무관한데. 교도권이 다르지 않은가! 우리는 오직 궁극적인 질문들과 도덕 가치에만 관심이 있다. DNA든 다른 어떤 과학적 증거든, 그 문제와는 어떤 식으로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
 당신은 그 과학적 증거가 어떤 것이든, 나타나기만 하면 신학자들이 흥분해서 떠들고 다닐 것이라 장담할 수 있다.

<p.213>

 

 '기도하다'라는 동사에 대한 앰브로즈 비어스(Ambrose Bierce)의 재치 만점의 정의를 떠올려보자. "지극히 부당하게 한 명의 청원자를 위해서 우주의 법칙들을 무효화하라고 요구하는 것." 자신이 이기도록 신이 돕는다고 믿는 운동선수가 있다. 아마 그의 모습은 다른 선수들에게는 자신을 편애해 달라고 신에게 떼를 쓰는 것으로 비칠 것이다. 신이 자신을 위해 주차공간을 비워둘 것이라고 믿는 운전자들이 있다. 그렇다면 다른 누군가가 그 공간을 빼앗기는 셈이다.

<p.217>

 

 "저는 우리가 무언가를 위해 존재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진화의 산물일 뿐입니다. 그러면 누군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 '저런, 목적이 없다고 생각하다니 당신의 인생은 참 황량하겠소.' 하지만 나는 맛있는 점심을 먹을 기대감에 차 있습니다."
- 프랜시스 크릭(Francis Crick)

<p.359>

 

 자연선택이 어떻게 비개연성의 해답이 된다는 것일까? 우연과 설계는 둘 다 출발점에서부터 실패했는데 말이다. 답은 자연선택이 누적적인 과정이며, 그 과정이 비개연성이라는 문제를 작은 조각들로 나눈다는 사실이다. 각 조각은 약간 비개연적이긴 해도 심한 정도는 아니다. 이 약간 비개연적인 사건들이 연속해서 쌓이면 그 최종산물들은 아주 비개연적 즉, 우연이 도달할 수 없을 정도로 비개연적이 된다. 창조론자들이 지겨울 정도로 재활용하는 논증의 대상이 되는 것들이 바로 이 최종산물들이다. 창조론자는 요점을 완전히 놓치고 있다. 그는 통계상 비개연적인 것의 출현을 단번에 이루어진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누적의 힘을 이해하지 못한다.

<p.431>

 

 일반적으로 말해 종교가 미치는 진정으로 나쁜 효과 중 하나는 "몰이해에 만족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가르친다는 점이다.

<p.448>

 

 "신자가 회의주의자보다 더 행복하다는 말은 술 취한 사람이 멀쩡한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는 말과 별다를 바 없다."
-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p.591>

 

 "사람들은 실제로는 경찰이 필요할 때 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 H. L. 멩켄(Henry L. Mencken)

<p.812>

 

 바빌로니아의 우트나피시팀 신화와 몇몇 문화의 더 오래된 신화들로부터 유래한, 아주 사랑받는 노아 이야기가 나오는 <창세기>부터 시작해보자. 동물들이 쌍쌍이 방주에 탄다는 전설은 재미있지만, 노아 이야기에 등장하는 도덕은 끔찍하다. 신은 인간을 탐탁잖게 생각했기에 (한 가족만 빼고) 아이들까지 포함하여 모조리 익사시켰고 덤으로 (아마 죄가 없었을) 나머지 동물들까지 익사시켰다.
 물론 신학자들은 우리가 더 이상 <창세기>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화를 내며 항변할 것이다. 바로 그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다! 우리는 성서에서 어느 부분은 골라서 믿고, 어느 부분은 상징이나 우화로 간주한다. 그렇게 취사선택하는 행위는 무신론자가 절대적인 근거 없이 이 도적 규정이나 저 도덕 규정을 따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적 판단의 문제다. 어느 한쪽이 '직감에 좌우되는 도덕'이라면 다른 한쪽도 그렇다.

<p.1008>

 

 "종교는 인간의 존엄성을 모독한다. 그것이 있든 없든, 선한 사람은 선행을 하고 나쁜 사람은 악행을 한다. 하지만 선한 사람이 악행을 한다면 그것은 종교 때문이다."
- 스티븐 와인버그(Steven Weinberg), 노벨상을 받은 미국의 물리학자

"사람은 종교적 확신을 가졌을 때 가장 철저하고 자발적으로 악행을 저지른다."
- 파스칼

<p.1060>

 

 성경은 대량 학살, 외집단의 노예화, 세계 지배에 대한 명령들을 구비한 내집단 도덕의 청사진이다. 그러나 성경이 악한 목적을 지닌 것도, 살인이나 잔혹 행위나 강간을 찬미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 고대의 많은 작품들이 내집단 도덕을 담고 있다. <일리아드(Iliad)>, 아이슬란드 전설, 시리아의 옛 이야기, 고대 마야인의 암각화 등이 그렇다. 하지만 <일리아드>를 도덕의 토대로 판매하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다. 성경은 사람들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안내서로 판매되고 구매된다. 그리고 그것은 전대미문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어 있다.
- 존 하텅

<p.1103>

 

 "종교는 평민들에게는 진실로 여겨지고 현자들에게는 거짓으로 여겨지며 통치자들에게는 유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p.1183>

 

 종교는 매일 시시각각 당신의 모든 일을 지켜보는 보이지 않은 (하늘에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확신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었다. 그리고 그 보이지 않는 사람은 당신이 하지 않았으면 하는 열 가지의 목록을 가지고 있다. 당신이 그 열 가지 중 어느 것이라도 하면, 그는 당신을 고문하고 고통을 주는 특수한 곳으로 당신을 보내어 세상이 끝날 때까지 목이 메도록 비명을 지르고 울부짖게 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당신을 사랑한다!
- 조지 칼런

<p.1194>

 

 "불합리한 것을 당신이 믿게끔 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에게 잔혹한 행위를 저지르게도 할 수 있다."
- 볼테르

<p.1318>

 

 종교 신앙은 신앙이기 때문에 존중을 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한, 빈 라덴과 자살 테러범들의 신앙에 대한 존중을 유보하기도 어렵다. 너무나 평범하기에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는 대안이 하나 있다. 그것은 종교 신앙을 자동적으로 존중하라는 원칙을 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갖은 노력을 다하며 사람들에게 '극단주의' 신앙이 아닌 신앙 자체를 반대하라고 경고하는 한 가지 이유다. '온건한' 종교의 가르침은 비록 그 자체로는 극단적이지 않아도 극단주의로 이어지는 공개 초청장이 된다. (...)
 
 이슬람교와 마찬가지로 기독교도 아이들에게 의문을 품지 않는 믿음이 미덕이라고 가르친다. 자신이 믿는 것을 옹호하는 논리를 굳이 펼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무엇이 자기 신앙의 일부라고 선언한다면, 사회의 나머지 사람들은 신앙이 같든, 아예 신앙이 없든, 오랜 관습에 따라 의문을 품지 않고 그것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 존중은 그것이 세계무역센터 파괴나, 런던 또는 마드리드 폭탄 테러 같은 끔찍한 대량 학살의 형태로 표출될 때까지 지속된다. 사건이 터진 뒤에는 성직자들과 사회 지도자들(그런데 누가 그들을 뽑았던가?)이 죽 나서서 극단주의가 '진정한' 신앙의 왜곡된 형태임을 설명하면서, 관계를 부인할 것이다. 하지만 신앙이 객관적인 정당화가 없다면, 왜곡되었다는 것을 보여줄 기준이 없다면, 신앙의 왜곡이라는 것이 어떻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p.1323>

 

 "평화를 원한다면 당신은 평화로운 구절들을 찾아낼 수 있다. 전쟁을 원한다면 호전적인 구절들을 찾아낼 수 있다."
- 패트릭 숙데오(이슬람교 및 기독교 연구소 소장)

<p.1324>

 

 나는 무엇을 생각할 것인지보다는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를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견해를 취한 부모에게 감사한다. 모든 과학적 증거들을 공평하게 접한 뒤에 자라서 <성경>이 글자 그대로 진실이라거나 행성들의 운동이 자신의 삶을 지배한다고 판단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특권이다. 중요한 점은 자신들이 무엇을 생각할지 판단하는 것은 아이들의 특권이지, 부모의 특권이 아니라는 것이다.

<p.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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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에 대해 얘기하는 건 조심스럽다. 특히 교회, 기독교는 더 그렇다. 나의 살아온 배경과 현재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기독교의 영향 아래에 있기에 기독교에 대한 나의 의견을 얘기하는 것이 더욱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줄곧 기독교에 대해 고민해 왔다. 남들보다는 조금 더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기에 언젠가는 입장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막연하게나마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간략하게라도 나의 생각을 정리해보고 싶다.

 

 먼저 나를 둘러싼 특수한 기독교적 환경을 소개해주고 싶다. 나는 친가, 외가 모두 기독교 집안이다. 당연히 모태신앙이고 살면서 제사를 드려본 적도 한 번도 없다. 어려서부터 엄마를 따라 자연스럽게 교회에 다녔지만 중학생이 될 무렵 더 이상 교회에 가고 싶지 않아지면서 어머니와의 몇 차례 갈등 끝에 교회를 안 다니게 되었다.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시며 아버지는 적어도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진 교회를 다니지 않으셨다. 그런데 대략 10년 전 하시던 일을 그만두시고는 대뜸 목사 안수를 받으시더니 현재는 시골에서 교회를 운영하고 계신다. 7년 전 결혼한 내 아내도 기독교 신자다. 처가도 원래는 장모님과 아내만 기독교 신자였는데, 이제는 처형과 장인어른까지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6살이 된 첫째 아들도 교회를 가고 싶어 하는 엄마와 함께 종종 교회를 다녀오곤 한다.

 

 이렇게 나는 어려서부터 기독교 문화에 길들여졌고,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기독교 집안 내에서 보이지 않는 여러 영향을 받고 있다. 그렇다고 주변 사람들이 내게 기독교를 지속적으로 권유하거나 매주 교회에 가자며 나를 못살게 구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들 사이에서 기독교에 호의적인 태도를 버리지 않으며 중립을 지키고 있다. 개인의 인지 능력은 자신을 너머 세계와 우주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이지만 개인의 삶은 그것에 비하면 티끌에 불과한 주변의 환경과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이 사실은 참 놀랍기도 하고 어리석기도 한 일이다. 나 역시 전 세계 인구의 75%가 기독교를 믿지 않고, 우리나라 인구의 85%가 기독교를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으로 둘러싸인 내 특수한 환경에서는 나만 교회를 안 가는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이런 상황을 구구절절 설명할만한 시간이 충분하다면 나는 누군가의 "종교 있으세요?"라는 물음에 나의 배경 이야기를 들려주며 "기독교 영향을 많이 받고 있지만 무교에 가까워요"라고 답한다. 그러나 만약 시간적 여유가 충분하지 않다면 나는 간단히 "무교에요"라고 답해버리고 만다. 과연 나는 종교가 있는 걸까? 신을 믿는 걸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나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신을 빼놓고 세상을 설명할 가장 적합한 이론이나 교리를 찾았다는 건 아니지만 일단 적어도 신이 없다는 사실로부터 이 세상을 이해하고자 한다. 중학생 이후 기독교적 사고를 버리고 내가 처음으로 관심을 갖게 된 사상은 과학적 근거에 입각한 유물론적 사고관이었다. 그러다 군대에서 처음 접한 불교를 통해 이 세상과 내가 같은 것이며 모든 것은 내 마음에서 나온다는 불교의 '범아일여' 사상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는 내 삶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매 순간 동일하게 반복된다는 니체의 '영원회귀론'에도 끌렸다. 이렇게 여러 가지 철학과 세계관에 호기심을 가지며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도서관에 앉아 창밖으로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을 보며 차마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내 마음이 만든 이미지라거나 아니면 지금 이 순간이 과거부터 지금까지 무한히 반복되어 왔던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기 쉽지 않다. 마찬가지로 인격을 가진 신이 이 세상을 손수 하나하나 만들었다는 생각도 용납하기 어렵다. 인간의 삶의 순간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너무나 경이로운 일들로 가득 차 있어 무엇 하나 똑 부러지는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고나 할까. 그저 지금으로서는 나를 둘러싼 이 모든 것이 자연 진화 과정의 산물이며 그 속의 나는 티끌과도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만이 진실로 다가온다.

 

 이런 생각에 다다르면 어디선가 들은 말이 떠오른다. '살면서 정말 힘든 일을 겪으면 그 때는 신을 믿게 될 거야. 신을 믿지 않는 건 네가 아직 진짜 힘든 일을 겪지 않았기 때문이고, 신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그 생각이 바로 인간의 오만이야.' 나는 이 말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 삶을 돌이켜 보았을 때 나는 아직 견디기 힘들 정도의 큰 일을 겪어본 적이 없고 대체로 내가 원하는 대로 행복하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신에 대하여 비관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는 걸지도 모른다.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나는 아직 내게 닥치지 않은 운명의 잔혹함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갖고 있다. 지금은 자신만만하게 신은 존재하지 않고 내 인생의 주인은 나라며 뽐내고 있지만 언젠가 내 힘으로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을 맞닥뜨려 운명 앞에 무력감을 느낄 때도 신을 찾지 않을 수 있을까? 그때도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다만 나를 더 강하게 만들 뿐이라며 신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고 스스로 받아들이고 이겨낼 수 있을까?

 

 자신있게 '그렇다'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기 위해서 필요한 건 종교보다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아무 잘못도 없는 나에게 운명이 너무나도 가혹한 벌을 내릴 때, 뜻하지 않은 상실로 큰 슬픔이 찾아올 때, 누구를 탓하거나 깊은 좌절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남은 인생을 다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신념과 철학에 있다고 생각한다. 철학적 사유 안에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방법과 주어진 것에 감사할 줄 아는 방법,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는 방법 등 인간이 희로애락을 경험하고 받아들이는데 필요한 다양한 지혜가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의 답을 찾아 삶에 적용하며 사는 것이 인생의 여러 풍파에 흔들리지 않고 주체적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종교 역시 삶에 도움이 되는 깨달음을 얻는 철학의 한 갈래로 놓고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한 까닭은 기본적으로 우리는 자유 의지가 있는 인간이고 또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내게 신은 삶의 진리를 알려주는 가상의 조력자처럼 느껴진다. 어릴 적 늘 나를 응원하고 위로해주던 엄마나 아빠 대신 아끼던 곰인형이 직접 말한다고 믿었던 응원과 위로처럼 말이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어른을 위한 곰인형을 만들었다고 해보자. 그 곰인형에는 힘든 일이 있을 때 다시 힘을 낼 수 있게 하는 많은 철학적 진리들을 녹음하고 원할 때 들을 수 있다. 힘든 하루에 지쳐 씻지도 못하고 침대에 누워 갑작스레 서러움이 북받칠 때 곰인형으로부터 '이 모든 것은 지나갈 거라는' 말을 듣는다면, 그것이 한낱 곰인형에 불과하고 그 말 역시 누군가의 녹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안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를 통해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아침에 출근하기 전마다 곰인형으로부터 '너는 늘 사랑받는 존재다' 라거나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조언을 받는다면 우리는 마찬가지로 그 말을 되새기며 매일 하루를 더 나은 하루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신이 이런 곰인형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인류의 수천 년 지혜를 담은 종교의 교리와 삶의 철학을 신이라는 제삼자를 만들어 우리에게 일러주고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신을 이 정도의 개념으로 받아들인다면 지금의 종교는 철학의 한 갈래로 분류되어 다양한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 중 하나로서 기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종교는 삶의 중심에 '나' 가 아닌 '신'을 등장시킨 데에 따르는 부작용의 결과라고 본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삶의 본질이 주객전도된 상황인 것이다. 인간의 철학적 사유 결과로 등장한 신이라는 개념이 오히려 인간보다 위에 있는 개념으로 발전됨에 따라 우리는 여러 종류의 자기모순을 겪게 되었다. 삶의 조언을 담은 곰인형에 불과했던 '신'이 이제는 유일한 삶의 진리가 되었고, 나아가 그 곰인형을 숭배하는 단계까지 오게 된 것이다. 누군가 곰인형에 '나 말고 다른 곰인형은 가짜다'라는 메시지를 녹음하거나, '이 곰인형은 사실 우리 인간이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던 신성한 곰인형'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곧 곰인형을 유리 상자에 넣어 멋진 건축물 꼭대기 위에 올려놓는, 이런 일련의 과정이 종교에서 신이 만들어지고 인간이 신을 숭배하게 된 과정이 아닐까? 그리고 종교가 '신'의 개념을 도입하고 이를 이미지화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숭배하도록 만든 데에는 과거 다양한 사회, 경제,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결론적으로 나는 최초의 종교에는 인류의 지혜와 사유가 담겨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만 긴 역사 속에서 각 시대의 요구나 의도에 의해 교리의 많은 부분이 덧붙여지거나 지워지거나 고쳐졌을 것이다. 그렇게 종교는 인간이 아닌 유일신을 위한 도구로 전락해버리고 말았고, 그 지나친 배타성 때문에 현재는 더 이상 사람들이 삶의 해답을 얻는 도구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종교가 철학으로서 지위를 잃게 되었고, 현대 사람들에게 조언과 위로가 되지 못하는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삶은 너무나 다양하고 복잡해서 그 어떤 하나의 문장으로도 정의할 수 없고 많은 책을 읽거나 설명을 들어도 이해하기 어렵다.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의 사유를 확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유의 확장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나보다 먼저 삶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의견을 참고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의 말씀도 마찬가지이다. 그 어떤 종교도 삶의 진리를 전부 설명할 수 있는 '인생해답지_찐 최종본'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신이 말했다는 이유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삶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듣고 지속적으로 고민하면서 조금씩 진리를 발견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