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다른 세상이 계속됐다면 지난주에 너는 중간고사를 봤을 거다. 시험 끝의 일요일이니 오늘은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마당에서 정대와 배드민턴을 쳤을 거다. 지난 일주일이 실감되지 않는 것만큼이나, 그 다른 세상의 시간이 더이상 실감되지 않는다.
<p.24>
군중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된다는 것이다. 어떤 군중은 상점의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으며, 어떤 군중은 개인이었다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보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 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 다음 문단은 검열 때문에 온전히 책에 실리지 못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p.95>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p.99>
어쩌끄나, 젖먹이 적에 너는 유난히 방긋 웃기를 잘했는디. 향긋한 노란 똥을 베 기저귀에 누었는디. 어린 짐승같이 네발로 기어댕기고 아무거나 입속에 집어넣었는디. 그러다 열이 나면 얼굴이 푸레지고, 경기를 함스로 시큼한 젖을 내 가슴에다 토했는디. 어쩌끄나, 젖을 뗄 적에 너는 손톱이 종이맨이로 얇아질 때까지 엄지손가락을 빨았는디. 온나, 이리 온나, 손뼉 치는 내 앞으로 한발 두발 걸음마를 떼었는디. 웃음을 물고 일곱걸음을 걸어 나헌테 안겼는디.
여덟살 묵었을 때 네가 그랬는디. 난 여름은 싫지만 여름밤이 좋아. 암것도 아닌 그 말이 듣기 좋아서 나는 네가 시인이 될라는가, 속으로 생각했는디. 여름밤 마당 평상에서 느이 아부지하고 삼형제하고 같이 수박을 먹을 적에. 입가에 묻은 끈끈하고 다디단 수박물을 네가 혀로 더듬어 핥을 적에.
<p.191>
작가는 유년 시절 광주에 살다가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기 4개월 전 서울로 이사 온다. 작가가 이사 간 뒤 그 집에는 동호(실제 이름은 문재학)라는 소년과 그의 가족이 이사 온다. 그리고 먼 훗날 아버지를 통해 그 집에 살았던 동호의 사연을 건너 듣는다. 그리하여 작가는 5.18 민주화운동에 희생된 동호와 그를 중심으로 한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 책의 간단한 줄거리는 이러하다. 동호는 새로 이사 온 집 작은 방에 세를 살고 있는 동갑내기 친구 정대와 민주화 시위에 참여한다. 그곳에서 계엄군의 무차별 총격에 의해 죽임을 당한 정대를 목격하고 두려움에 달아난다. 이후 정대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위에 희생된 시민들의 시신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도청의 상무관을 찾는다. 그곳에서 동호는 상무관을 관리하며 시위에 참여하고 있던 은숙, 선주, 진수를 만나고 그들과 함께 상무관에서 일을 한다. 며칠 뒤 계엄군이 상무관에 들이닥친다는 소식을 접한 진수는 동호에게 도망가라고 하지만 동호는 끝까지 남아 저항하다가 죽임을 당한다.
소설은 총 6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장마다 화자도 다르고 주인공도 달라진다. 훗날을 위한 기록으로 간략하게나마 정리하자면 이러하다. 1장 <어린 새>는 작가가 화자가 되어 동호를 '너'라고 가리키며 말하는 이야기, 2장 <검은 숨>은 죽은 정배의 영혼이 화자가 되어 말하는 이야기, 3장 <일곱 개의 뺨>은 작가가 화자가 되어 은숙을 '그녀'로 가리키며 말하는 이야기, 4장 <쇠와 피>는 진수와 같이 감옥에 갇혔던 '나'가 화자가 되어 진수에 대하여 말하는 이야기, 5장 <밤의 눈동자>는 작가가 화자가 되어 선주를 '당신'으로 가리키며 말하는 이야기, 마지막 6장 <꽃 핀 쪽으로>는 동호의 어머니가 화자가 되어 죽은 아들을 그리워하며 말하는 이야기다.
이 책을 읽고 많은 감상이 들었지만 나는 무엇보다 문학의 힘이 참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그 어떤 교육이나 예술, 매체들도 제대로 해내지 못한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관심과 희생자들에 대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일'을 이 책 한 권이 해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도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해 알고 있었고 살면서 종종 그 사건을 떠올릴 기회가 있었다. 아마도 가장 먼저 알게 된 건 고등학생 때 들은 근현대사 수업에서였을 것이다. 당시 국사 선생님은 열정을 가지고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설명했고 나 역시 열정을 가지고 수업을 듣고 공부하고 별표를 그려 가며 외웠을 것이다. 또한, 매년 5월 18일이 되면 거리 곳곳에 국기를 게양하고 TV, 라디오, 신문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서 해당 사건을 기념했을 것이다. 어쩌다 광주에 가거나 다른 기념관, 박물관 등을 방문하게 되면 이따금씩 5.18 민주화운동을 기리는 전시나 시설물이 있어 눈여겨본 적도 있었을 것이다. 영화 <택시운전사>가 개봉했을 당시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며 '너무 슬프다' 라던지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같은 감상평을 나눴던 기억도 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5.18 민주화 운동이 남일처럼 느껴졌다. 1980년은 지금으로부터 45년 전에 불과하지만 내가 태어나지도 않았고 직접 겪은 일도 아니기 때문일까. 그저 과거라는 큰 덩어리에 섞여 6.25 전쟁이나 3.1 운동 심지어 임진왜란 같은 역사 속에 있었던 큰 사건 중 하나로 인식되었다. 설명을 듣고, 배우고, 공부를 했기에 나는 당시의 상황을 알고 그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 시간의 공포와 슬픔과 무력감을 알 수는 있었으나 느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 소설책 한 권이 나를 과거로 데려가더니 그 시대 한 청춘의 삶을 살아 보게 했다. 나는 죽임을 당한 정배가 되기도 하고, 친구의 죽음을 목격한 동호가 되기도 하고, 오래전 그 일을 겪은 은숙이나 선주가 되기도 하고, 아들의 죽음을 겪은 엄마가 되기도 하며 그 시대를 살아 보았다. 소설을 읽으며 나는 공포와 슬픔과 무력감의 감정을 아는 것이 아니라 느낄 수 있었다. 소설을 읽으며 나는 두려웠고, 답답했고, 눈물이 났다. 감정을 알고 이해하는 것과 느끼는 것 사이에는 얼마나 큰 간극이 존재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몇 시간 만에 뚝딱 해낼 수 있는 문학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도 알게 되었다. 공부도 해야 하고, 취업 준비도 해야 하고, 스펙도 쌓아야 하는 이 시대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소설을 왜 읽고 앉아 있냐라는 물음을 종종 듣는다. 그에 대단 대답으로 보통 문학은 간접 경험을 통해 공감과 감동을 일으킨다고 하는 말을 많이 들었다. 난 그 말의 진정한 뜻을 이 책을 통해 제대로 알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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