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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의 기쁨과 슬픔 > 장류진, 2019

by Ditmars 2025. 3. 18.

<일의 기쁨과 슬픔> 장류진, 2019

 

 그 남자, 김은 굴지의 대기업 본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곧 서른을 앞두고 있는 여자를 제법 어리다고 생각할 정도로 나이가 많다는 점을 제외하면, 여러모로 괜찮은 남자였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 구김 없는 성품에,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유머 감각. 그리 빼어난 외모는 아니지만 특별히 흠잡을 만한 단점도 없는 멀쩡한 체격과 무난한 얼굴. 여자는 이 '무난하다'는 평균의 가치가 역설적으로 얼마나 희소한 것인지를 해가 지날수록 체감하고 있었다.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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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장류진 작가의 단편 소설 모음집으로 총 8편의 단편 소설이 담겨 있는 책이다. 각 소설의 분량이 짧고 배경과 인물, 전개가 흥미로워서 쉽고 빠르게 읽을 수 있었다. 소설의 인물들이 작가 본인과 같은 나이대거나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섬세하게 표현한 감정 묘사가 여러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가벼운 이야기라는 점이 장점이기는 했지만 동시에 단점이기도 했다. 내게는 소설 속 주제의식이나 철학 등이 조금 부족하게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읽을 때는 술술 읽었지만 읽고 나면 특별히 인상 깊었던 점이나 생각할거리 등은 없었던 게 개인적으로는 아쉬웠다.

 

 그러나 무엇보다 아쉬웠던 점이 있다. 조심스럽게 얘기하자면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이런 분위기가 요즘 한국문학 젊은 작가들의 트렌드인가? 라는 의문이 들었다. 어떤 분위기냐하면 몇 가지 포인트가 있는데, 소설의 주인공이 대부분 여성 화자라는 점, 배경이나 대화 속에 은근히 여성으로서의 피해의식을 드러낸다는 점, 성차별 요소를 끄집어 내 남녀 간 대결 구도를 만든다는 점 등이 있다. 최근 몇 년간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나 문학상 수상작들을 읽으며 나는 비슷한 내용이나 소재의 반복을 느낄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떠오르는 신인 작가들의 소설 중 우수한 작품들을 모았다는 젊은 작가상 수상작들은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 대략 2020년부터 트렌드가 심화된 것으로 보이는데 거의 대부분의 작품들이 페미니즘, PC주의, 성소수자, 사회적 약자 등을 소재로 하고 있고 작가들 역시 여성 작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소설집을 읽다 보면 비슷한 얘기의 반복에 조금씩 피로감이 느껴질 정도이다.

 

 여성 작가가 여성 문제를 소재로 글을 쓰는 것이 뭐가 문제냐는 질문을 한다면 나는 당연히 그럴 수 있고 그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할 것이다. 나는 페미니스트도 아니고 안티 페미니스트도 아닌 그저 독서를 좋아하는 평범한 독자다. 그런데 나 같은 평범한 독자가 최근 몇 년간 우리나라의 베스트셀러와 문학상 수상작들을 읽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는 건 어쩌면 우리나라 문단의 현주소가 지나치게 편향되어 있거나 트렌드에 갇혀 있다고 볼 수 있진 않을까? 다시 말해 여성 작가가 여성 문제에 대해 글을 쓰는 게 문제가 아니라 시중에 나온 책들 중 사람들에게 많이 읽히는 책들 대부분이 비슷한 주제를 가진다는 건 문학의 다양성 측면에서도 충분히 우려할 만한 사안이 아닐까?

 

 한국문학이 한쪽으로 편향되어 있다면 그 원인은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작가와 독자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아닌가. 나는 결국 그 원인의 본질은 수요와 공급에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한국 문학을 소비하는 주 독자층이 여성 문제나 사회적 약자 문제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그 관심이 수요로 반영되어 공급이 늘었다는 것이 한 가지 이유다. 또 한 가지 이유는 문학의 수요가 반드시 독자에게만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글을 쓰고자 하는 작가의 수요 역시 독자의 읽고자 하는 수요 못지않게 중요하다. 어떤 얘기를 하고 싶은지에 대한 작가의 수요는 작가가 처한 현실의 사회 문제를 반영하기 때문에 현재 우리 사회가 여성 문제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을 많이 필요로 한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문학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학에 비춰진 현재 시대의 모습이 온라인 서점의 베스트셀러들과 문학상 수상작 목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거울에 비친 이 모습에 진지한 고민을 해 볼 필요는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문학계나 독자들이 의식적으로라도 다양성을 추구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가장 걱정되는 건 나 같이 평범한 독자들이 몇 년째 비슷한 얘기만 나오는 한국문학에 질려 하나둘 떠나고 결국 '고인 물'이 되어 정체되고 쇠퇴하는 것이다. 혜성처럼 등장했다가 비슷한 소재와 트렌드, 대중적 요소에 매몰되어 하향세에 접어든 우리나라 웹툰 산업처럼 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