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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도 책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 > 김지원, 2024 (eBook)

by Ditmars 2025. 3. 8.

<지금도 책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 김지원, 2024 (eBook)

 

 문해력과 관련해, 곧잘 간과되고 있지만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무엇을 어떻게 읽을지를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이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과연 무엇을 읽을 것인가'는 21세기에 새삼스럽게 제기된 질문이 아니라, 오랜 세월 인류가 진지하게 붙든 질문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시대를 정보 홍수의 시대로 여겼다. 기원전 900년경에 쓰인 <성서> <전도서>에 이미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라고 쓰여 있다. 다산 정약용은 반산 정수철에게 "옛날에는 책이 많지 않아 독서는 외우는 것에 힘을 쏟았다. (하지만) 지금은 사고의 서책이 집을 가득 채워 소가 땀을 흘릴 지경"이라고 한탄했다. 구텐베르크 인쇄 혁명으로 사상 최초로 책이 '찍혀 나오기' 시작하던 1550년에 이탈리아의 작가 안톤 프랑체스코 도니는 이렇게 불평했다. "책이 너무 많다 보니 제목들을 읽을 시간조차 없다." 수많은 텍스트 중에 '어떤 것'을 취사선택해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딱히 오늘날뿐 아니라 오랫동안 모든 진지한 독자의 주된 관심사였다. 중요한 차이가 있다면 과거엔 그것이 '문제'라는 점은 알았지만 오늘날은 그걸 문제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정도일까.

<p.9>

 

 사람은 내 안에서 해결책을 도저히 찾을 수 없을 때, 나라는 자아가 비좁게 느껴질 때 바깥을 본다.
 우리가 읽는 것은 단지 시험에서 100점 맞고, 더 좋은 직장을 얻고, 날씨와 맛집 정보를 알고자 함이 아니다. 나의 고통을 이해하고, 원하는 정보를 정확히 찾고, 즐거운 읽을거리를 찾고, 몰랐던 세계를 알고,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그들과 연대하고, 더 가치 있는 삶을 지향하는 등 더 나은 삶을 궁리하는 일이 모두 '읽기'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결국 읽기란 나를 벗어나 나의 바깥에 있는 세계를 들여다보고 받아들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제대로 읽지 못하고 소통을 향한 욕망도 품지 않는 '문해력 위기' 현상의 진짜 문제는 이런 것들이 불가능해진다는 데 있다. 이런 사회에서 개인은 자신에게 닥치는 모든 문제에 어리둥절한 채로 휩쓸릴 뿐인, 무력한 원자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p.33>

 

 또한 '글' 말고도 재미있는 것들이 잔뜩 있는 시대이니 오히려 더 독자를 꾸짖고 엄숙하게 가겠다며 있는 재미마저 쭉 짜내 난삽하기만 한 글로 독자의 얼을 빼놓으려 한다면 이는 불가능한 일을 강요하는 것이다. 이건 요즘 사람들이 '도파민 중독'이라 그런 게 아니라, 인간은 원래 세상에 재미라는 것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엄숙한 동물이 아니다.

<p.84>

 

 그런데 하루 동안 우리가 눈에 담는 것 가운데 정말로 우리의 의지대로 보는 것은 얼마나 될까? 일단은 온라인 체류 시간이 하루 깨어 있는 시간의 약 50퍼센트이기 때문에 이 질문에 답하려면 온라인에서 우리가 보는 것에 대해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런데 온라인에서 우리가 친숙하게 보는 풍경 가운데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적다. 우선 주로 사용하는 플랫폼의 정책이 바뀔 때마다 노출 방식이나 알고리즘이 달라진다.

<p.106>

 

 이를테면 새벽에 조용한 방에 앉아 단체의 <신곡>을 찬찬히 베껴 가며 읽는데 갑자기 그 위로 노골적인 성인 만화 그림이 떠오른다든지, 노을 지는 고즈넉한 해변에 앉아 좋아하는 시집을 읽는데 '로또 20억 충격' 같은 단어가 시야에 끼어드는 것을 상상해 보라. 침대 머리맡에서 바퀴벌레를 보고 싶지 않은 것만큼이나 나는 이런 경험을 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게임을 하다가도, 영상을 보다가도, 글을 읽다가도 이처럼 맥락이 없는 불쾌한 정보를 일상적으로 불쑥불쑥 봐야 하는 상황은 아마도 유사 이래 처음이 아닐까. 배우 이청아는 문예지 <릿터>와의 인터뷰에서 종이책을 읽는 이유에 대해 "광고 없이 글을 읽을 수 있어서"라고 답했다.

<p.114>

 

 옥스퍼드대학교 보들리안도서관장인 리처드 오벤든은 분서, 소실 등 책 파괴의 역사를 다룬 <책을 불태우다>의 결론부에서 오늘날 인터넷 세계에서 벌어지는 어마어마한 정보 소실에 대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수많은 의도적, 비의도적 사고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가 옛 책들로 가득한 도서관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모두 '미래'로 지식의 소산을 전달하려는 과거 사람들의 의지 덕분이었지만, 오늘날엔 오늘날 버전의 가치 있는 정보에 대한 사회적 합의 및 이를 보존하기 위한 의식적인 헌신이 없다는 것이다.

<p.155>

 

 실제로 나는 도서관에 갈 때 읽어 보고 싶은 책의 목록을 대강 정해 가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우연히 맞닥뜨린 책과 근처의 다른 책을 빌려 오곤 한다. 주제별로 느슨하게 분류되어 있는 서가에선 해당 주제에 대해 내가 미처 알려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정보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 예술사가 아비바르부르크는 이런 기분 좋은 조우에 대하여 '서가 옆 책'의 법칙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도서관은 단지 그곳에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지식의 지평을 넓혀 주는 조용한 환대의 장소이다. 그간 수많은 학자와 작가가 도서관의 매력에 대해 언급했다. T. S. 엘리엇은 "도서관의 존재 자체가 우리가 인간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최고의 증거를 제공한다"라고 했고, 레이 브래드버리는 "도서관이 나를 키웠다"라고 했다. 도서관은 누가 찾아오더라도 원하는 것, 나아가 원한다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마저 얻게끔 만들어져 왔다.

<p.161>

 

 인터넷에서 글을 읽을 때 우리는 대개 앞에 놓인 글이 어떤 종류의 글인지 의식하면서 읽지 않는다. 대체로 스쳐가듯 읽을 뿐이다. 당신은 일주일 전 인터넷에서 어떤 글과 영상을 접했는지 기억하는가? 아니, 오늘 하루 동안 SNS, 커뮤니티, 기사 페이지, 블로그 등에서 본 글 중 인상 깊은 것이 있었는가? 그것은 어떤 종류의 글이었으며, 텍스트가 지닌 무게감은 어떠했는가? 정좌를 하고 혹은 옆에 수첩을 가져다 메모를 하면서 읽었는가? 읽은 글에 대해 어떤 느낌이 들었고 읽고 나서 무엇을 하고 싶어졌는가?
 자세한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어떤 글을 봤는지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할 것이다. 우리는 통상 인터넷 공간에서 서핑을 하듯 글을 읽기 때문에, 어떤 흥미로운 글을 읽었더라도 그 내용을 정확히 어떤 지점에서 맞닥뜨렸는지 잘 기억하지도 못한다. 마치 서퍼가 어떤 지점의 파도의 빛깔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남는 것은 어렴풋한 인상뿐이다. (...)

 나오미 배런은 <다시,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서 '무엇을 읽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읽느냐'가 우리를 규정한다고 말한다. 읽고 쓰기에 매개하는 기술은 그 내용물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붓으로 쓰는 글과 타자기로 쓰는 글이 다르듯, 종이로 읽는 글과 웹브라우저에서 읽는 글의 경험은 다르다. 문제는 인터넷에서의 읽기는 교과서든, 웹소설이든, 비판적으로 읽어야 하는 기사든, 정부 정책 보고서든, 그래프든 대체로 미끄러지듯 읽게 된다는 점이다. (...)

 전자 기기로 글을 읽을 때 통상 우리는 더 빠르게, 더 소홀하게 읽는다. 이런 종류의 읽기는 흥미로 읽는 글, 한번 흘끗 보고 넘겨도 되는 무난한 정보성 소식지, SNS에 올라온 이웃의 사정, 밈 게시물을 읽을 땐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오히려 대충 훑고 치워 둘 수 있으니 부담도 적고 좋다. 그러나 책에서 언급한 또 다른 한 연구자는 "디지털 읽기는 학생들이 텍스트를 읽는 속도를 점점 빨라지게 하고, 이런 처리 시간은 이해력 저하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모든 종류의 읽기가 디지털 읽기화 된다면, 정작 깊이 비판적으로 읽어야 하는 종류의 글을 읽을 때는 이입이 힘들어진다. 컴퓨터로 기사나 논문 등 글을 읽다가 종이에 출력해서 읽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말에 공감할 것이다. <p.170>

 

 이런 '배경 지식', 즉 지식을 얻기 위한 지식은 통상 자연스럽게 습득된다. 러시아 역사를 전공했거나 러시아에 살았거나 주변에 러시아에 사는 지인이 많은 경우 등에 말이다. 그런데 의도적으로, 직접 경험 없이도 빠르고 수월하고도 깊게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 있다. 바로 책을 읽는 것이다.

<p.186>

 

 우리는 통상 책이 상대적으로 '어려운' 정보이고, 인터넷은 비교적 '쉬운' 정보라고 생각하곤 하는데 사실은 정반대다. 인터넷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자료는 대체로 쪼개진 정보이고, 책은 어떤 정보를 특정한 수준의 지식을 가진 독자를 상정해 가공하고 특정 맥락에 따라 조직한 지식이다. 예를 들어 AI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온라인에서 단건 기사를 읽어도 맥락에 맞게 이를 수용하고 또 판단할 수 있지만, 문외한인 사람은 같은 정보를 마주하고도 그것이 어떤 가치가 있고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이처럼 인터넷에 산재한 정보 가운데 내가 원하는 내용과 수준의 정보를 찾아내고 '제대로' 활용하려면 높은 차원의 교양이 필요하다. (책에 비해) 인터넷에는 정보가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훨씬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이는 모래사장 속 사금 같은 것이다. 이를 찾고 활용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가치가 있다. (...)

 책이 수많은 사람의 손길로 다듬어진 '세련된 지식' 혹은 '지식의 지도'에 가깝다면 인터넷은 '정보'의 조각들이 모인 광대한 바다다. 이 바다에서 정보를 얼마나 많이 얻을 수 있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길을 잃지 않는 것이다. 무엇을 간절하게 구하다가도 매번 길을 잃고 마는 사람은 결국 아무것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을 항해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길을 잃으면서도 잃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검색 포털은 양질의 검색 결과가 없어도 한사코 '결과 없음'이라는 페이지를 피한다. 생성형 AI 역시 말하나 마나 한 정보만 늘어놓을지언정 결코 자신의 무지와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성능의 결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터넷은 수많은 콘텐츠 '목록'을 보여 주거나 그 사이사이에 내가 정신을 팔 만한 다른 자극적인 콘텐츠를 슬그머니 끼워 넣어 검색 결과가 없다는 것을 까먹게 만든다. 인터넷 생태계는 애초에 사람들이 길을 잃고 멍하니 오래 체류할수록 수익이 나는 구조이기 때문에, 이런 상황은 앞으로 더 가속될 것이다. 향후 온라인으로 얻는 정보의 비중이 늘수록, 사람들의 온라인 체류시간이 길어질수록 매튜 효과는 더욱 커지리라는 연구 결과들이 있다. (매튜효과: <마태복음> 13장 12절, 25장 29절의 "무릇 있는 자는 더욱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라는 구절에서 비롯된 용어로, 미국의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이 <과학사회학>에서 처음 언급했다. 부익부 빈익빈, 승자 (독식) 현상, 수확 체증 법칙 등과 같은 맥락이다.)

<p.194>

 

 '무엇을' 읽을지도 중요하지만 그 읽을거리를 '어디에서' 얻을지 역시 못지않게 중요하다. 18세기 영국 시인 새뮤얼 존슨은 지식의 종류를 두 가지로 나누었다. 하나는 우리가 스스로 알고 있는 지식이고 다른 하나는 알고자 하는 정보가 어디 있는지 아는 지식이다. 통상 우리는 전자를 강조하고 후자를 간과하곤 한다. 하지만 내가 무엇을 얼마나 아는지, 무엇을 얼마나 알지 못하는지에 대한 메타 지식이 없다면 꾸준히 읽으면서도(읽지 않으면서도) 내가 무엇을 읽는지조차(읽지 않고 있는지조차) 자각하지 못할 수 있다.
 수력공학, 원자력, 수학, 농업 등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의 책, 외국어로 된 서적이 가득 꽂힌 서가를 배회하는 것만으로도 내가 모르는 세계의 부피를 체감할 수 있게 된다. 인터넷상의 읽기에서는 좀처럼 하기 어려운 경험이다. 이 '서가 배회'를 통해 나는 어디에 가면 어디쯤에 어떤 정보가 얼마나 있는지를 어렴풋하게라도 알게 된다. 자연스럽게 나중에 어떤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그것에 관한 정보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는 감각이 생기고, 필요한 책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틈날 때마다 굳이 도서관을 찾는 이유다. 아마도 나의 독서 중 20퍼센트는 이처럼 때때로 서가를 이리저리 배회하며 책등을 읽고 내키면 책을 꺼내어 표지를 읽는 '책등 독서'일 것이다.
 모든 책을 다 읽을 필요는 당연히 없다. 이렇게 책등이나 서문을 제외하고 '읽지 않은 책'들의 계보를 확장하다 보면, 나중에 정말 필요할 때 원하는 정보에 쉽고 빠르게 접근할 수 있다.

<p.205>

 

 인터넷에 수많은 정보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때 길을 잃지 않으려면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알 수 있는 메타 인지, 즉 지식을 생성하기 위한 자기만의 키워드와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하지만, 가장 간편한 방식은 책이라는 지도를 들고 들어가는 것이다.

<p.208>

 

 앞서 책의 특성을 '굳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그냥 강연으로만 남아도, 칼럼으로만 남아도 혹은 개인의 생각으로만 남아도 될 만한 글이 '굳이' 번거로운 노동을 거쳐 책으로 나왔다. 이 때문에 책의 서문에는 기본적으로 이 '굳이'의 이유가 붙는다. 안 그래도 볼 것 천지인 복잡한 세상에, 책이 매우 안 팔리는 이 시대에 굳이 이 한 권의 책을 내어 놓는 작가, 기획자의 각오가 서문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p.214>

 

 낯선 주제는 낯설기 때문에 알아보길 포기하기보다는, 이 낯선 것이 나를 어디까지 끌고 갈 수 있는지, 그렇게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시험해 본다는 태도로 살피면 적어도 이 과정에서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p.244>

 

 평소에 독서하지 않는 사람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자기만의 세계에 감금되어 있다. 그의 생활은 상투적인 틀에 박혀 버린다. 그 사람이 접촉하고 만나서 대화하는 것은 극소수의 친구나 자기뿐이며, 그 사람이 보고 듣는 것은 거의가 신변의 사소한 일일 따름이다. 그 감금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그런데 일단 책을 손에 들면 사람은 즉시 별세계에 드나들 수가 있다. 만일 그것이 양서라면 독자는 홀연 세계 제일의 이야기꾼을 대면하는 것이 된다. 그는 독자를 유도하여 먼 별세계, 아득한 옛날로 데리고 가서 심증의 고민을 덜어 주고, 독자가 미처 몰랐던 인생의 여러 모를 이야기해 준다.
- <생활의 발견> 린위탕

<p.260>

 

 단 한 줄만으로 자신의 입장을 날카롭게 내세우는 시대에 책 한 권 분량으로 자신의 결론을 찾아가는 글, 심지어 결론을 명확히 내지도 않는 글은 '비효율적'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입장이 다른 사람들 간의 대화가 불가능한 양극화의 시대에 이러한 '비효율적인' '결론 없는' 글이야말로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떤 문제를 진정성 있게 고민하는 필자의 에너지에 끌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하고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기 때문이다.

<p.268>

 

 이 때문에 실은 책을 읽고 난 뒤 쓰는 것이 일기인지 독후감인지 서평인지는 내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아니, 서평을 넘어 기사가 될 수도 있고, 재밌는 작당, 기획 혹은 나만의 책이 될 수도 있다. 성실하게 만든 개인화된 메모뭉치는 언제나 '책 그 다음'을 상상할 수 있게 해 준다.

<p.326>

 

 통상 맨바닥에서는 어떤 생각을 떠올리기가 어렵다. 당연한 말이지만, 어떤 생각을 섬세하게 떠올리고 논리를 정립하려면 구체적인 계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사안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오해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아주 간단한 계기만 있으면 어떤 사안에 대해 아주 구체적인 의견을 갖기도 하고 꽤 심도 있는 통찰을 내놓기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계기'다. 사이토 다카시는 '그물'이라는 비유를 사용해 타인과의 대화가 가져오는 강력한 환기의 효과를 설명했다. 나는 이 '그물'의 효과가 독서에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그물은 통상 무언가를 읽는 과정에서의 '인풋'과는 다른 차원이다. 인풋은 단순히 상대의 말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것인데 반해 독서를 통해서는 받아들인 후의 환기 과정까지 일어나기 때문이다. (...)

 원효대사처럼 깨달음이 깊은 사람이라면 해골물이나 굴러가는 돌멩이만 보고서도 깊은 통찰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많은 소설가, 작가는 신문지에 실린 아주 작은 사건 기사 하나를 읽고서 그것을 계기로 생각을 펼치고 걸작을 쓰기도 한다. 다만 나는 밀도 있는 사고를 하는 훈련은 무엇을 통해서든 이 과정을 그저 묵묵하게 겪어 내지 않는다면 흰 종이를 앞에 둔 막막함 속에 서성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내게 책은 비교적 간편하게 어떤 주제에 대해 밀도 있는 사고를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그물'이다.

<p.332>

 

 읽기(독서)가 부재한 쓰기, 쓰기가 부재한 읽기는 모두 조금은 허전하다. 전자는 자신의 세계를 뚫고 나가기 어렵고 그저 진부한 자기만족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후자는 읽기의 절박성이 덜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다.
 이렇게 놓고 보면, 또 하나 책의 무엇보다도 중요한 가치가 도출된다. 책은 자신이라는 비좁은 세계를 뚫고 나갈 수 있도록 해 주는 도구다. 책은 단단하게 굳어져 버린 나의 껍질을 깨고 그 사이로 맵고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는다. 책을 다양하게, 함부로 읽을수록 나를 둘러싼 껍질은 더 자주 깨진다. 단, 책이 나의 껍질을 깨는 계기가 되려면 어느 정도 절박한 읽기 태도가 필요하다. 다소 절박하고 다급하게 굴지 않으면 책은 그저 내 껍질 위를 편하게 미끄러져 스쳐지나갈 뿐이다. 칼럼이든 어떤 장르의 글이든 그렇게 깨어진 부분에서 좋은 글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다급함은 억지로 만들어 낸 다급함이 아니라, 책장 위에서도 진짜로 '나의' '우리의' 문제를 생각하는 질문들에서 나온다.

<p.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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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좋은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며 그녀의 책 사랑과 책에 대한 깊은 고민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책 속에는 은은한 유머와 위트가 풍기고 있었는데 왠지 작가도 꽤나 유쾌한 사람일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이 책 덕분에 작가가 발행하는 '인스피아' 뉴스레터도 알게 되어 즐겨찾기에 추가하여 가끔씩 읽고 있다. 왜 그럴 때 있지 않은가. 영상 보기는 좀 그렇고 그렇다고 책 읽기도 좀 그런 상황. 손에 쥔 건 핸드폰 밖에 없는데 뉴스나 커뮤니티 뒤적거리기에는 그 시간이 너무 의미 없게 느껴지고 핸드폰으로나마 뭔가 양질의 읽을거리를 읽고 싶을 때. 그때 읽기 딱 좋은 뉴스레터라 그럴 때마다 애용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그래 맞아, 이런 게 책의 진짜 좋은 점이지.' 하며 무릎을 쳤던 순간이 한두번이 아니다. 특히 인터넷의 발달로 모든 지식과 정보, 심지어 재미까지 쉽고 빠르게 찾을 수 있는 요즘, 책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고민해본 사람이라면 이 책이 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인터넷 세상에서 책이 가질 수 있는 의미를 여러 측면에서 비교하고 제시한다. 그중 인상 깊었던 말은 책이 인터넷 세상의 무한한 정보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지도의 역할을 한다는 말이었다. 나는 이 말이 무척 공감이 되었다.

 

 인터넷을 켜고 구글에 접속하면 흰 바탕 위에 검색창 하나만 있는 아주 간단한 웹사이트가 열린다. 세상을 바꿨다고 해도 좋을 만한 이 너무나도 간단한 도구에 대해 나는 무척이나 유용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도 쓸모가 없는 것 같다고 느낀다. 그 이유는 인터넷 검색으로 원하는 건 뭐든지 찾아볼 수 있으나 이를 통해 무언가를 이해하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인터넷 검색으로 여름방학 숙제나 레포트를 위해 어떤 특정 지식에 대해 이 내용, 저 내용 짜깁기 하여 A4용지 2매 정도의 글을 쓸 수는 있겠으나 그것만으로 그 지식을 이해했다고 하기에는 어렵다. 그 이유는 배경지식과 맥락의 부재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식과 정보를 최소한의 맥락으로 연결하는 행위가 필요하다. 맥락이 없다면 단어의 정의는 알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 모르는 것과도 같은 상황이 연출된다. 인터넷 세상에 있는 지식과 정보는 초단편으로 나뉘어 아무 맥락 없이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다. 개별 단어와 문장에 대한 정의는 찾을 수 있을지언정 그것을 하나로 연결해 전체를 이해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지점에서 책이 지도로써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책은 누군가 먼저 만들어 놓은 맥락과도 같다. 작가가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어떠한 내용을 잘 이해하기 위해 흩어져 있던 지식과 정보를 모아 하나의 맥락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렇게 맥락을 아는 경우에는 개별적인 단어나 문장의 정의는 이해하지 못해도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이런 상황에서, 맥락은 알지만 단편적인 정보를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인터넷 검색창이 효과를 발휘한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무언가 알고 싶은 분야나 지식이 생길 때 인터넷 검색을 하기보다 관련된 책을 먼저 찾는다.  

 

 별개로 책에 대하여 와닿았던 내용이 또 있다. 바로 위에도 인용했지만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말이다.

 

 읽기(독서)가 부재한 쓰기, 쓰기가 부재한 읽기는 모두 조금은 허전하다. 전자는 자신의 세계를 뚫고 나가기 어렵고 그저 진부한 자기만족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후자는 읽기의 절박성이 덜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다.
 이렇게 놓고 보면, 또 하나 책의 무엇보다도 중요한 가치가 도출된다. 책은 자신이라는 비좁은 세계를 뚫고 나갈 수 있도록 해 주는 도구다. 책은 단단하게 굳어져 버린 나의 껍질을 깨고 그 사이로 맵고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는다. 책을 다양하게, 함부로 읽을수록 나를 둘러싼 껍질은 더 자주 깨진다. 단, 책이 나의 껍질을 깨는 계기가 되려면 어느 정도 절박한 읽기 태도가 필요하다. 다소 절박하고 다급하게 굴지 않으면 책은 그저 내 껍질 위를 편하게 미끄러져 스쳐 지나갈 뿐이다. 칼럼이든 어떤 장르의 글이든 그렇게 깨어진 부분에서 좋은 글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다급함은 억지로 만들어 낸 다급함이 아니라, 책장 위에서도 진짜로 '나의' '우리의' 문제를 생각하는 질문들에서 나온다.

 

 '안꼰대' 라는 말은 과거 내가 가진 USB 폴더명이다. 난 그 폴더 안에 책, 영화, 음악 감상평 등을 적은 txt 파일을 모았다. 처음에는 그저 '새 폴더'에 불과했지만 앞으로 계속 꼰대가 되고 싶지 않다는 소망 같은 의미에서 '안꼰대'라고 장난스럽게 이름을 지었다. 그때가 20대 중반이었다. 어이없다.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책은 내게 '안꼰대'의 역할을 한다. 작가는 이를 아주 세련된 문장으로 표현했다. '책은 단단하게 굳어져 버린 나의 껍질을 깨고 그 사이로 맵고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는다.'라고. 카프카의 '책은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삶이 어느 정도 정상 궤도에 오르게 되면 안정을 얻는 대신 변화를 잃는다. 두 아이를 키우는 아빠이자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한 남편, 크지도 작지도 않은 회사에 다니는 평범한 직장인이 되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이다. 많은 변화를 이겨내며 안정적인 삶을 좇아 여기까지 왔는데 마침내 안정적인 삶을 얻게 되자 금새 지루해지고는 변화를 그리워한다. 사람의 본성은 참 간사하다. 그렇다고 삶의 정상 궤도에서 함부로 이탈할 수는 없다.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난다거나, 1년 간 전 세계를 여행한다거나, 지금 하는 일을 때려치우고 오래전부터 꿈꾸던 새로운 직업을 찾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미 정상 궤도에 오른 삶 속에서 내가 찾을 수 있는 변화들은 아주 작고 소소한 것들 뿐이다. 그래서 때로는 삶에 변화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매일 만나는 똑같은 사람들, 매일 보는 똑같은 풍경, 똑같은 집에서 똑같은 소파에 앉아 무의미하게 바라보는 똑같은 TV... 그러나 그 속에서 유일하게 내게 변화의 기쁨을 가져다주는 게 있다면 그것은 바로 책이다. 책은 내가 알지 못한 삶, 알지 못한 사람, 겪어보지 못한 일, 느껴보지 못한 감정 등을 간접적으로나마 일깨운다. 이 작고 소소한 간접적인 변화들이 나의 내면을 지나며 자칫 그 자리에 굳어져버릴 뻔한 나의 생각과 감정, 태도를 씻어내고 다시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려놓는다. '안꼰대'라는 폴더명을 지었던 게 10년 전이다. 그때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알게 모르게 더 보수적이고 꼰대스럽게 변했겠지만 그래도 나는 최대한 더디게 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