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에 잠긴 숲은 포효를 참는 거대한 짐승 같다.
<p.182>
시간은 가혹할 만큼 공정한 물결이어서, 인내로만 단단히 뭉쳐진 그녀의 삶도 함께 떠밀려 하류로 나아갔다. (...) 어린시절부터, 그녀는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스스로 감당할 줄 알았으며, 성실은 천성과 같았다. 딸로서, 언니나 누나로서, 아내와 엄마로서, 가게를 꾸리는 생활인으로서, 하다못해 지하철에서 스치는 행인으로서까지 그녀는 최선을 다했다. 그 성실의 관성으로 그녀는 시간과 함께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p.203>
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그 웃음의 끝에 그녀는 생각한다. 어떤 일이 지나간 뒤에라도, 그토록 끔찍한 일들을 겪은 뒤에도 사람은 먹고 마시고, 용변을 보고, 몸을 씻고 살아간다. 때로는 소리내어 웃기까지 한다. 아마 그도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 때, 잊혀졌던 연민이 마치 졸음처럼 쓸쓸히 불러일으켜지기도 한다.
<p.247>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적기에 앞서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작품을 원어로 이렇게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큰 감동과 감사를 느끼는 바이다.
이틀 전 아내가 잔뜩 사둔 한강 작가의 소설 중에서 이 책을 처음 골라 읽었다. "나는 책 제목이 채식주의자 선언인 줄 알았는데 그냥 채식주의자였네. 개인주의자 선언이라는 책이랑 짬뽕되었나보네." 라고 말하면서 집어든 게 이 책을 고른 이유라면 이유였다. 낮에 아이들이 제 스스로 놀 때마다 틈틈이 몇 페이지씩 읽기 시작했다. 담담한 문체에 비해 이야기 전개가 빠르고 흥미로워 '그다음에 어떻게 되었을까?' 하며 더 읽고 싶게 만드는 책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을 재운 그날 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으스스해지는 집안 분위기 속에서 나는 그 책을 단숨에 끝까지 읽었다. 그리고는 충격 속에서 쉽사리 자러 갈 수 없었고 자기 직전까지도 악몽을 꾸지는 않을까 걱정을 했다. 이튿날 아침, 아내에게 어제 이 책을 읽다 자정이 넘어서 잠들었다고 말하니 그녀가 책이 어땠냐고 물었다. 이에 나는 고민 끝에 이렇게 대답했다. "기괴해."
이 책은 세 편의 단편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연작소설이다. 각 소설의 제목은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불꽃> 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영혜라는 인물이지만 세 편 모두 영혜의 주변인의 시점에서 서술된다. 첫 번째 편은 영혜의 남편의 시점에서, 두 번째 편은 영혜의 형부의 시점에서, 마지막 편은 영혜의 언니(인혜)의 시점에서 서술된다. 하나씩 간단하게 요약해 보면 이러하다.
특별한 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점 때문에 영혜와 결혼한 남자는 몇 년 째 지극히 평범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꿈을 꿨다는 이유로 집 안의 고기를 다 버리더니 그날부터 채식주의자가 된다. 그 꿈은 날고기를 먹는 꿈부터 시작해 날이 갈수록 누군가를 살해하는 꿈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결혼 생활은 조금씩 금이 가고 날이 갈수록 야위어 가는 아내의 모습에 남자는 이 사실을 처가에 알린다. 처가 식구들 역시 영혜의 변화가 걱정되어 다 같이 식사를 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영혜에게 고기를 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고기를 먹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에 영혜의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내며 그녀의 뺨을 때리고 억지로 입 안에 탕수육을 집어넣는다. 그러자 충격을 받은 영혜는 자신의 손목을 긋는 자해를 한다. 이 날의 사건으로 인해 영혜는 정신병원에 들어가고 남자는 그녀와 이혼한다.
이 사건으로부터 몇 달 뒤 영혜의 언니(인혜)와 그녀의 남편(영혜의 형부)은 아이를 씻기다 몽고반점 얘기를 하게 된다. 그리고 우연히 인혜가 영혜의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아직 남아 있다는 얘기를 하는데 영혜의 형부는 이 얘기를 듣고나서부터 영혜에게 야릇한 욕망을 품게 된다. 비디오 아티스트인 그는 영혜에게 그녀의 나체에 몽고반점부터 이어지는 꽃을 그리고 그것을 비디오로 촬영하고 싶다는 부탁을 한다. 영혜는 부탁을 받아들이고 그와 작업을 시작한다. 그는 갈수록 커지는 영혜에 대한 욕망을 참지 못하고 결국 자신의 몸에도 꽃을 그리고 영혜와 쾌락을 탐하는 과정을 비디오에 담는다. 다음날 영혜에 대한 걱정으로 그녀의 자취방을 찾은 인혜는 카메라에 녹화된 비디오를 통해 모든 상황을 보게 된다. 그녀는 남편과 이혼하고, 영혜는 깊은 산속의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결국 남편도, 부모도 포기한 영혜를 책임지게 된 사람은 인혜다. 그녀는 일을 하고 혼자 아이를 키우는 와중에도 주기적으로 병원을 찾아가 영혜를 돌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외출 시간에 사라진 영혜가 어느 산비탈 외딴곳에서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는 얘기를 뒤늦게 전해 듣는다. 그리고 그날부터 영혜는 일체의 식사를 거부한다. 영혜가 걱정되어 병원을 찾은 인혜에게 영혜는 자신은 동물이 아니라 더 이상 안 먹어도 된다고, 자신은 나무라고 얘기한다. 병원에서는 거식으로 인해 생명이 위험해진 영혜의 사지를 결박하고 억지로 코에 튜브를 삽입하여 미음을 집어넣으려는 시도를 한다. 미동도 없던 영혜는 그 순간 짐승처럼 날뛰면서 비명을 지르고 거부하다 끝내 입에서 피를 토한다. 결국 더 이상의 치료가 불가능한 영혜를 서울의 큰 병원으로 옮기기로 한다. 서울로 가는 구급차 안에서 인혜는 지친 듯한 말투로 나지막이 얘기한다. 이것은 어쩌면 꿈일지도 모른다고...
이 책에서는 영혜가 육식을 거부하며 살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죽음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그녀에게 자행된 폭력을 매우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를 통해 역설적이게도 평범하고 나약한 개인이 '정상인'으로서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폭력을 당연스레 저지르면서 살아가야 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개인의 옳은 신념과 정의는 그것이 제 아무리 정당하고 바른 일일지라도 타인과 다르거나 사회가 받아들이지 않는 순간 많은 폭력에 노출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저항하거나, 포기하거나, 타협한다. 소설 속 영혜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저항한다. 소설 첫 부분에서 작가는 그녀의 외면을 특별한 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모습이라고 묘사한다. 그러나 그와는 정반대로 그녀의 내면은 그 누구보다 특별하고 강인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왠지 모를 감동이 느껴졌다.
또한 폭력에는 개인과 사회가 인지하고 있는 종류의 폭력도 있지만 '이것이 폭력이라는 사실' 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종류의 것도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너무나 당연하게 했던 말과 행동, 그리고 사회적으로 용인되어 온 다양한 관습 역시 누군가에게는 폭력일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폭력이라는 단어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관심이라던지 가족, 애정, 배려 같은 말들 속에도 어쩌면 우리가 생각지 못한 폭력이 숨어있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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