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슬슬 결단을 내려주는 게 어떨까. 나도 바쁜 몸이라서." 이와모토가 재촉했다.
"동전 있어요?" 레이토가 물었다.
"동전?"
"어떤 것이든 좋아요. 십 엔짜리든 백 엔짜리든. 아니면 그냥 일 엔짜리라도."
이와모토는 품속에서 가죽 지갑을 꺼냈다. 동전 포켓을 들여다보더니 백 엔 동전을 집어냈다.
"이걸로 어떻게 하려고?"
"위로 휙 던져서......" 레이토는 던지는 시늉을 하고 "이렇게 두 손으로 받아주세요"라면서 오른손을 아래로 하고 두 손바닥을 맞댔다.
"아, 동전 던지기?"
"망설여질 때는 항상 그렇게 하거든요."
"그걸로 잘 풀릴 확률은?" 레이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반반?" 이와모토는 소리를 내지 않고 웃는 얼굴을 지었다. "지극히 수학적인 결과로군."
"그래도 포기가 되니까요. 이게 운명이다, 하고."
"그런가."
"네, 그러니까 부탁드립니다."
"알았어."
<p.55>
"아까도 말했지만 그 나들잇벌이라는 게 뭔지 모르겠어요."
"나들잇벌을......" 치후네는 뭔가 더 말하려다가 마음을 바꾼 듯 심호흡을 했다.
"자신이 가진 옷 중에서 가장 귀하고 멋진 옷을 말하는 거예요. 이를테면 여자친구와 데이트할 때 입고 나가는 옷."
<p.357>
"기죽을 필요 없어요. 나는 이런 자리에 서는 게 당연한 사람이다, 라고 당당하게 나가면 됩니다. 다만 허세를 부려서는 안 돼요. 인간이란 허세를 부리는 사람보다 그런 게 없는 사람을 더 두려워하는 법이니까요. 어디까지나 자연스럽게, 알겠어요?"
<p.465>
"내 대답을 얘기해볼까?" 마사카즈가 말했다.
"기본적으로는 대략 자네와 똑같아. 나 스스로의 지혜와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말이지. 다만 이건 지나치게 노골적인 표현인지도 모르지만, 나와 자네는 백그라운드가 전혀 달라. 나는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주위에 의견을 청할 수 있어. 그만큼의 브레인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으니까. 그렇게까지 준비를 해놓고 그때서야 답을 찾아내는 거야. 단 오른쪽으로 가느냐 왼쪽으로 가느냐가 아니야." 레이토의 가슴팍을 손끝으로 가리키며 그는 말을 이어갔다. "어떻게든 정면 벽에 구멍을 뚫어 한복판에 길을 낼 수는 없을까, 그걸 고민하는 것이지."
<p.505>
"그런 말 말고 상상을 해보도록 하세요. 이 세상은 피라미드고 사람은 그것을 형성하는 돌멩이 하나하나예요. 피라미드 전체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나는 지금 어느 위치에 있는지 상상하는 거예요. 모든 것은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위를 향하는 것도 아래로 떨어지는 것도 레이토 하기 나름, 레이토의 자유예요."
<p.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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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줄거리를 말하려면 녹나무의 비밀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꽤나 큰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줄거리를 따로 적지는 않겠다. 다만 우연한 기회로 소원을 비는 녹나무의 파수꾼 역할을 맡게 된 남자 주인공의 이야기라고 간략하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원을 비는 녹나무의 파수꾼 역할이라... 듣기만 해도 흥미진진한 소설 소재이지 않은가? 어떻게 이런 걸 소설 소재로 생각해 냈는지 신기할 정도이다. 비슷한 제목의 책인 <호밀밭의 파수꾼>과는 180도 다른 느낌이다.
이 책은 읽기 편하고 재미있다. 크게 부담되지도 않고 기분도 오르락내리락하지 않는 야채죽 같은 책이다. 그러나 작가의 스릴러, 미스터리 책들을 읽고 팬이 된 나로서는 약간 심심한 느낌이 들었다. 일본 소설이나 만화, 영화 특유의 작위적인 분위기랄까, 대화 등을 통해 느껴지는 오글거림도 오랜만에 느꼈고. (어쩌면 나이가 들어서 항마력이 떨어졌기 때문일지도?) 아무튼 <나미야 잡화적의 기적> 같이 다음 이야기가 계속 궁금해지면서도 그렇게 자극적이지 않는 소설을 찾는다면 이 책을 추천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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