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을 보다 콩잎을 팔길래 열단을 샀다, 잎이 억세지 않아 짠지를 담그면 좋겠더라, 왜 작년 여름에 기하 니가 짠지 하나로 밥을 두그릇이나 먹지 않았느냐, 나는 기억조차 못하는 일을 구구절절 늘어놓기도 했다. 궁금하지도 않은 그녀의 이야기를 나는 잠자코 들었다. 이런 지긋지긋한 가족 노릇에서 멀어지고 싶어, 나와 관계없는 것이 되었으면 싶어 서둘러 집을 떠나 입대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녀의 낮고 약간 쉰 듯한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p.75>
어떤 울음이 안에 있던 것을 죄다 게워내고 쏟아낸다면, 어떤 울음은 그저 희석일 뿐이라는 것을 저는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비워내는 것이 아니라 슬픔의 농도를 묽게 만들 뿐이라는 것을요.
<p.141>
"그러다보니 사람이 유동적인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은 언제든 변할 수 있고, 그 변화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변화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과정이라는 생각이요. 생 안에서 고투하고 화해하며 기하의 뾰족함은 그리움과 넉살로 바뀌고, 재하는 유년에 비해 조금 쓸쓸해졌죠. 두 사람이 왜 그렇게 변했는지 일일이 설명하기보단 독자들이 그 변화의 간극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쓰고 싶었어요."
- 인터뷰 성해나x김유나
<p.284>
이 책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이렇다. 혈연관계가 아닌 두 가족이 만나 새로운 가족이 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하고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관계가 된다. 두 가족이 함께 한 4년의 시간은 찰나의 기억으로 남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살아가는 이들에게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추억이 된다.
이 책을 다 읽고 책의 제목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두고 온 여름'. 두고 왔다는 건 여러 뜻이 있을 수 있다. 가져왔어야 했는데 실수로 두고 왔다, 가져오지 않고 일부러 두고 왔다, 두고 왔기 때문에 나중에 가지러 갈 것이다, 두고 왔기 때문에 아무래도 나는 상관없다... 나는 이 책을 읽은 뒤에 책 제목의 '두고 왔다'는 말의 의미가 '그때 그 시간을 가져오지 않고 일부러 그곳에 두고 왔다' 라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두 가족이 하나의 가족으로서 함께 했던 4년이라는 시간을 그 곳에 그냥 두고 온 것이라고 말이다.
내게도 두고 온 시간이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나는 시간을 두고 오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내 삶에서 어떤 시간이 '지금부터 시작! 해서 여기까지가 끝!'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 것 같기 때문이다. 대개 시작은 명확해도 끝은 명확하지 않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으로 시작했던 친구들이 2학년이 되어 반이 바뀌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이어지다가 결혼하고 각자의 가정을 갖게 되며 끊어진다던지, 군 복무 중에 알게 된 선후임들을 전역 후에도 주기적으로 만나다가 어느 순간부터 소홀해졌다는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또 소홀해진 줄 알았는데 우연한 기회로 다시 만나게 되는 경우까지 포함하면 인연과 그 시간은 칼로 무 베듯 단칼에 자를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이런 경우에 우리는 그 시간에 대해 두고 왔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 시간과 인연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거나 명확한 끝이 없기 때문에. 두고 왔다기보다는 어딘가에 놓여 있는 시간이라고나 할까. 그러니까 소설 속 기하와 재하가 겪게 된 가족으로서의 시작과 끝이 분명한 4년이라는 시간은 일반적으로 경험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제목으로 쓰인 두고 왔다는 표현이 정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렇게 글을 쓰는 중간에 두고 온 시간의 좋은 예가 떠올랐다. 바로 연애, 누군가와의 만남과 이별이다. 연애 역시 두고 온 시간이다. 시작과 끝이 비교적 명확하다. 서로의 사소한 버릇까지 다 아는,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였을지라도 헤어지기로 한 순간부터 그 둘은 언제 서로를 알았었냐는 듯 남이 돼버린다. 함께 했던 시간을 거기에 두고 온다. 그리고 그 시간은 서로의 삶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남는다. 때때로 우린 그 시간을 돌이켜본다. 미화되고 왜곡된 기억이지만 그래도 그 시간은 두고 왔을 그때 그대로이기 때문에. 혹은 시간이 흐르며 나는 여러 면에서 변했지만 두고 온 그 시간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를 회상하며 행복에 잠기기도 하고, 피식 웃기도 하고, 이불킥을 하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 같다. 그건 내가(우리가) 그곳에 두고 온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내게도 두고 온 시간이 있다. 두고 온 여름과 두고 온 겨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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