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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물을 마시는 새 > 이영도, 2003 (eBook)

by Ditmars 2025. 5. 16.

<눈물을 마시는 새> 이영도, 2003 (eBook)

 

 꿈은 가장 밤다운 것이지만 동시에 밤과는 정반대 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밤은 감추고 숨기고 덮지만 꿈은 드러내고 발견하고 열어보이며, 그러한 꿈의 성질은 공교롭게도 낮을 닮아 있다. 그러나 밝은 낮에는 볼 수 없고 암흑 속에서만 볼 수 있는 꿈의 성질은, 별과 마찬가질, 그 본성이 밤에 속함을 증명한다.

<1, p.114>

 

 "언제나 잔을 넘치게 하는 건 마지막 한 방울이니까."

<1, p.246>

 

 하지만 어떤 적대적인 환경도 이겨낼 수 있는 강인함이나 지혜로움은 방랑자에게 요구되는 첫째 자질은 아니다. 방랑은 더 어려운 조건에서 수행했을 때 더 높은 가치를 가지는 놀이나 운동 경기 같은 것이 아니다. 손 뻗어오거나 말 걸어 오지 않는 세상 속에서 자신을 표지 삼아 떠도는 행위에서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고독을 견디는 힘이다. 그런 점에서, 카루는 노련한 방랑자라고 할 수 있다.

<1, p.852>

 

 "역시 양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건 양치기가 아니라 늑대인 겁니까?"

 "아마도 양은 양치기의 지식을 더 높이 칠 거요."

 "그리고 늑대는 자신의 지식을 평가당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활용하는 데 더 관심이 있을 테고요?"

 "그럴 테지."

<1, p.1189>

 

 "헤어지기 전에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고 싶소. 비형. 키탈저 사냥꾼들의 옛이야기요. 괜찮겠소?"

 "예? 아, 무슨 이야기죠?"

 "네 마리의 형제 새가 있소. 네 형제의 식성은 모두 달랐소. 물을 마시는 새와 피를 마시는 새, 독약을 마시는 새, 그리고 눈물을 마시는 새가 있었소. 그중 가장 오래 사는 것은 피를 마시는 새요. 가장 빨리 죽는 새는 뭐겠소?"

 "독약을 마시는 새!"
 고함을 지른 티나한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 보자 의기양양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케이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물을 마시는 새요."
 티나한은 벼슬을 곤두세웠고 륜은 살짝 웃었다. 피라는 말에 진저리를 치던 비형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사람의 눈물을 마시면 죽는 겁니까?"

 "그렇소. 피를 마시는 새가 가장 오래 사는 건, 몸 밖으로 절대로 흘리고 싶어하지 않는 귀중한 것을 마시기 때문이지. 반대로 눈물은 몸 밖으로 흘려보내는 거요. 얼마나 몸에 해로우면 몸 밖으로 흘려보내겠소? 그런 해로운 것을 마시면 오래 못 사는 것이 당연하오. 하지만."

 "하지만?"

 "눈물을 마시는 새가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고 하더군."
 륜과 티나한은 알 듯 모를 듯하다는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비형은 환한 표정이 되었다. 그 밝은 얼굴을 보며 케이건은 그대로 작별 인사까지 해치웠다.

 "잘 가시오."

<1, p.1210>

 

 "성주, 영주, 마립간, 추장, 족장. 세상에는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이끄는 사람들이 있죠. 하지만 왕은 없어요. 왕이 되겠다고 돌아 다니는 사람들만 있을 뿐. 뭐, 꽤 큰 도시를 차지하는 데 성공한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어요. 물론 오래 못 갔지만. 저는 그 자들이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싶은 야망이 남보다 큰 사람들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야심이라고 하던가요? 아니, 지배욕인가?"  케이건은 묵묵히 비형의 말을 듣고 있었다. 비형은 고개를 죽 돌려 사방으로 멀어지고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뭐, 어쨌든 그게 제 단순한 생각이었죠. 왕이 되려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싶은 자들이라는 거죠. 하지만 그렇지가 않더군요. 아주 당연한 건데, 그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어요. 왕이 되려는 자들은 그에게 지배당하고 싶은 자들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그 지배당하고 싶은 사람들이 중요한 거죠. 그에 비하면 왕이 되려는 사람들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당신도 그래서 토디 씨를 건너뛰어 선지자를 상대한거죠?"  케이건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비형은 계속 말했다.

 "예.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마음이 아무리 커도 아무도 그를 왕으로 여기지 않으면 그렇게 세상을 떠돌아다닐 수는 없는 거죠. 누군가가 있어야 해요. 그를 왕으로 떠받드는 사람들이. 그래야만 그는 모든 걸 버리고 그렇게 떠돌아다닐 수 있죠. 그렇다면, 왕은 도대체 뭐죠? 저는 정말 모르겠어요. 왕은 왕이 되고 싶어하는 저 제왕병 환자들의 목표인가요, 아니면 그 제왕병 환자를 왕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자들의 목표인가요?"

 "눈물을 마시는 새요."

 "네?" 토디의 모습이 지평선을 넘어가고 있었다. 케이건은 그 지평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왕은 눈물을 마시는 새요. 가장 화려하고 가장 아름답지만, 가장 빨리 죽소."

 "왕이 다른 사람의 눈물을 마시는 사람인가요?"

 "저 토디 시노크는 이제 선지자가 흘리던 눈물을 받아먹지 않아도 되니 살아남을 수 있을 거요." 비형은 알 듯 모를 듯하다는 표정으로 케이건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1, p.1431>

 

 "오레놀. 네 마음 속에서 가장 확실한 것을 의심하고 가장 분명한 것을 포기하여라. 사모 페이는 동생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 동생을 죽이려 하고 있다. 우리는 모든 생명을 살리기 위해 계획을 진행 중이고. 그 차이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크지는 않을 거다."

 "크지 않다고요?"

 "크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같은 말이다. 죽음을 강요하든 삶을 강요하든. 죽음과 삶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1, p.1527>

 

 "역시 그랬군요. 마법사였군요?"

 "마법사 같은 건 없소. 비형."

 "아, 비밀인가요? 그 비밀 지켜드리죠. 그런데 키보렌에서 당신이 잡아오곤 했던 동물들에겐 어떤 마법을 쓴 거죠?"

 "경험과 끈기와 행운"

<1, p.1839>

 

 "이제 백일몽에서 깰 때가 되었소. 황혼의 빛이 따스해 보이더라도 현명한 자라면 그 속에 배어 있는 냉기를 느낄 수 있을 거요. 차가운 밤을 대비하시오."

<1, p.1916>

 

 상대방을 단 하나의 가치나 목적으로 대하는 사람은 결국 자신 또한 그렇게 되고 만다.

<2, p.163>

 

 "너희들이 오기라는 것이 뭔지 알기는 하냐?"

 "지기 싫어하는 마음이죠. 그래서 이미 진 다음에도 그것을 깨달을 수 없도록 눈을 가려버리는 감정이지요. 결국 그게 더 크게 지게 되는 일이라는 것도 모르게 되죠. 지성인이라면 그런 감정 따위를 자신에게 허락할 필요가 없어요."

<2, p.407>

 

 "그래. 그렇구나. 내가 백 살이라는 걸 까먹다 보니 네 나이마저도 잊어먹었구나. 하지만 그래도 묻고 싶구나. 어미란 그렇게 미련한 것이다. 누구보다도 자식 속을 잘 안다고 자부하지만, 꼭 자식 속을 물어보고 확인해 봐야 직성이 풀리는 것 또한 어미라는 것이다. 그러니 물어보는 것을 용서하여라. 정말 괜찮은 거니?"

<2, p.461>

 

 "어, 신께서 사람 속에 계신다고요? 저 천상이나 초차원이 아니라?"

 "글쎄요. 봄은 새싹 속에 있습니까? 새싹 속엔 분명히 봄이 있습니다만."

<2, p.579>

 

 "티나한. 이런 것이 충고가 될 수는 없을 거요. 지극히 당연한 말이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해 두고 싶소. 신부들을 찾게 되면 그녀들을 아끼고 사랑하시오. 오늘은 어제보다 더 사랑하려 애쓰고, 내일은 오늘보다 더 사랑하려 마음먹으시오.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너무도 짧소. 그리고 그녀의 무덤에 바칠 일만 송이의 꽃은 그녀의 작은 미소보다 무가치하오."

<2, p.1074>

 

 "침묵은 많은 경우 미덕이 될 수 있습니다만, 꺼내고 싶지 않은 말의 대용이 되는 경우에는 곤란한 악덕일 뿐입니다. 사태를 직시하고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2, p.1768>

 

 "눈물을 마신다는 것은 도대체 뭘 말하는 거지? 동정심을 말하는 거야?"

 "아니. 동정심은 함께 눈물 흘리는 것을 말하지. 예를 들어 비형이 그렇지. 그 착한 도깨비는 아마 앞으로 많은 눈물을 흘리게 될 거다. 하지만 함께 우는 자는 왕으로서 필요없어. 눈물만 더 많아질 뿐이니까. 왕은 눈물을 마셔야 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케이건."

 "차차 알게 될 거야."

<2, p.1788>

 

 케이건은 갑작스럽게 질문했다.

 "단풍에 대해서 아나?" 사모는 고개를 갸웃했다.

 "들어는 봤어. 날씨가 추워지면 나뭇잎의 색깔이 변한다는 이야기 말이지?"

 "그래. 너희들의 밀림에서는 보기 힘든 일이지. 그리고 직접 보게 되더라도 우리들만큼 그 색깔에 큰 감동을 받기는 어려울 거야. 이 파름 산도 가을이 되면 퍽 훌륭한 단풍이 들지. 그러고나서 나무들은 낙엽을 떨어뜨리고 헐벗게 되지. 동물과 식물의 재미있는 차이야. 동물들은 겨울이 다가오면 더 길고 두툼한 털을 가지게 되는 놈들이 많지. 혹은 음식을 잔뜩 섭취해서 체중을 불리거나 하지. 그런데 나무들은 겨울이 다가오면 오히려 헐벗지."

 "그야 나무들은 체온을 유지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렇지."

 "그래. 하지만 나무들은 그 잎으로 태양을 마시지. 그렇다면 햇빛이 부족한 겨울에는 더 많은 나뭇잎이 필요한 것 아닐까? 그 편이 더 많은 햇빛을 받아들일 수 있을 텐데 왜 나무들은 반대로 행동하는 거지?"

 "나뭇잎을 늘여서 얻게 되는 이득보다 나뭇잎을 만드는 데 필요한 양분을 아끼는 쪽의 이득이 더 크기 때문이겠지."

 "정확해. 그런 식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지. 위기라고 할 수 있는 겨울이 왔을 때 나무는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을 확장하는 대신 자신의 일부를 죽이는 선택을 하지. 그런데 믿기 어렵겠지만 이것은 모든 사람들의 집단에게도 통용되는 말이야. 사람들의 집단은 위기 상황에서 자신의 일부를 죽일 수밖에 없어. 다른 모든 구성원들을 살리기 위해 죽어야 하는 이 개인은 놀랍게도 모욕과 혐오, 심지어 폭력의 대상이 되지. 왜 그런가 하면, 집단의 구성원들이 위기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 공격하기 시작하면 그 집단이 와해되기 때문이야. 그래서 그들은 서로 공격하는 대신 만장일치하에 한 명을 공격하지. 이것을 희생양이라고 부르지. 다시 나무로 돌아가볼까. 겨울이 왔을 때 뿌리와 줄기와 가지와 잎이 서로 공격한다면 나무는 죽고 말 거야. 그래서 뿌리와 줄기와 가지는 만장일치하에 잎을 공격해서 떨어뜨리는 거야. 잎의 희생으로 나무는 살아 남게 되지. 사람들의 집단도 마찬가지야. 희생양이 죽었을 때 집단의 다른 구성원들은 더 이상 서로에 대해 공포와 증오를 가지지 않아. 그 공포와 증오는 희생양이 죽었을 때 같이 죽었으니까."

<2, p.1852>

 

 '은혜는 보통 반도 돌아오기 힘들지만 앙화는 항상 두 배로 돌아온다.'

<3, p.288>

 

 "기약 없는 구원이 현존하는 고통의 대가가 될 수 있습니까? 고통을 받는 것은 사람들입니다. 신들이 아닙니다."

<3, p.417>

 

 "내가 보기엔 자네가 그들의 기분에 무관심한 것 같은데. 주위에 무관심한 자들이 보통 주위가 자신을 이해한다고 믿지."

<3, p.552>

 

 "당신들께서... 우리를 이유 없이 살육하는 생물로 만들었다는 말입니까?"

 "그렇지는 않다. 이유는 있지. 하지만 네가 말하는 것 같은 너절한 이유는 아니야."

 "그럼 어떤 이유입니까?"

 "우리는 너희들을 먹어야 하는 존재로 만들었지."

 "먹는다고요?"

 "그래. 먹는 것. 그게 너희야. 그게 생명이지. 모든 동물들이, 식물들이, 생명이라는 생명은 모두 먹는다. 먹지 않으면 생명이 아니지. 우리가 만든 것은 그런 것이다. 너희들이 벌이는 모든 짓거리의 경계엔 큰 글씨로 뚜렷하게 적혀 있지. '일단, 먹고 나서'." 륜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시우쇠를 바라보았다. 그와 반대로 시우쇠의 목소리는 점점 차분해졌다.

 "산다는 것은 먹는다는 것이지. 일단 먹어야 살아 있는 것이 저지르는 모든 웃기는 일이 가능해지지. 먹지 못하면 소용 없어."

 "누구나 다 아는 그런 이야기를..."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가 가장 중요한 이야기야. 륜 페이. 먹는다는 것은 자기를 유지하기 위해 자기 외의 것을 파괴한다는 것이지. 그렇기에 바위를 뚫는 낙수는 바위를 먹는 것이 아니야. 바위가 낙수를 유지시켜 주는 것은 아니니까. 나무를 찍는 도끼도 나무를 먹는 것이 아니야. 도끼의 유지에 나무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니까. 그것이 먹는 파괴와 보통의 파괴의 차이점이지. 하지만 둘 다 파괴야. 알겠냐? 우리는 너희들을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파괴하는 것으로 만들었어. 하지만 생명은 파괴를 일으켜서 자신을 유지하지. 그런 것을 가리켜 '먹는다'고 하는 거야. 무생물은 그렇지 못하지. 낙수가, 파도가, 태풍이 아무리 파괴를 일으켜도 그것은 자신의 유지와는 상관없어. 그것들은 먹는다고 하지 않아. 파괴한다고 할 뿐이지."

<3, p.699>

 

 "명심해라. 세상에 완전히 믿어도 되는 사람은 죽은 사람뿐이다."

<3, p.974>

 

 "나는 그런 증상을 안다. 전쟁터에서는 살기 위해 적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적을 죽이기 위해 살게 되는 병사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어. 그들은 자신이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살아남을 방법을 지나치게 골몰한 끝에 그렇게 되어버리지. 그러나 전투도 결국 사는 방식의 하나야. 먹고 자는 것처럼 살기 위해 하는 다른 일들과 똑같아. 하지만 그걸 용맹이라고 부르면서, 병사들은 전투 그 자체를 목적으로 바꿔버리지. 실제로 지휘관들은 그걸 충동질하기도 해. 나도 그렇지."

<4, p.148>

 

 옆이나 뒤를 볼 수 없는 사람들의 포옹은 슬프다. 가장 가까이 있지만, 그 순간부터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다. 가장 가까운 이별이다.

<4, p.495>

 

 한 사람이 한 권의 책이라면, 케이건 드라카는 거대한 도서관이었다.

<4, p.504>

 

 "흥! 죽은 필요가 있어서 죽는 사람도 있느냐? 삶을 인정한다는 것은 삶의 기쁜이니 행복이니 하는 것들만 취사 선택하여 인정한다는 것이 아니다. 급작스러운 사고와 황당한 죽음도 모두 인정한다는 것이다. 윷가락 네 개는 한꺼번에 던져져야 한다. 그중에서 배를 보이는 것, 혹은 등을 보이는 것만을 인정하겠다는 것은 윷놀이를 할 줄 모르는 자의 말이다."

<4, p.555>

 

 "이곳까지 와서... 하텐그라쥬까지 와서 그냥 되돌아가는 것이군요."

 "산 정상에 선 자들이 항상 하는 일이다. 그들은 도로 내려가지."

<4, p.562>

 

 생의 심오한 의문을 풀고 싶어하는 자들이 많다. 그 희망은, 당연하기에 특별히 언급되지 않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생에는 의문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자, 어떤 지혜로운 자에 의해 그 의문이 풀렸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그 자는 그때부터 의문 없는 생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전제와 정면으로 대치되는 생이다. 의문 없는 생이 생일까?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설명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우리의 전제가 잘못되었다는 것, 혹은 그 지혜로운 자가 사기꾼이라는 것.
- 가이너 카쉬냅의 <생각하는 동물들> 서문.

<4, p.710>

 

 "신이 한 종족을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은 그것이잖겠는가? 시우쇠가 너에게 자신을 보지 못하는 신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겠지. 그래. 케이건. 그것이 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의 일, 최선의 일이다. 자신이 보살피던 종족들이 마침내 기쁨의 목소리로 '신은 죽었다.'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그 환희의 순간을 생각해 봐. 케이건. 너의 인간을 떠올려! 네가 그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해!"

<4, p.929>

 

 "사도 라수. 마음의 천칭은 언제나 천칭 주인을 향해 기울게 마련입니다. 그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4, p.1241>

 

 "저는 변화 그 자체에는 찬성합니다. 결국 모든 것이 바뀌지 않는다면, 내일이 오늘의 단순한 확장에 불과할 뿐이라면 삶은 의미를 잃습니다."

<4, p.1266>

 

 "어쨌든 글쟁이는 글로 말하는 법이고, 완결된 글에 글쟁이가 덧붙이는 구구한 설명은 잠꼬대보다 그 위상이 별로 높지 않을 것입니다. 글과 독자가 만나는 자리에 주책 없이 끼어드는 글쟁이는 맞선 자리에서 눈치 없이 물러나지 않는 매파와 마찬가지겠지요."
- 이영도

<4, p.1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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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에 오래 남는 책이 있다. 지금 어떤 책이 떠오르냐고 묻는다면 내게는 한승태의 <인간의 조건>,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 그리고 이 책이 떠오른다. 세 권 모두 내게 신선한 충격을 준 책이다. 이 책은 그중에서도 가장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책은 판타지 소설이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20년도 더 지난 옛날에 나온 책이다. 총 4권으로 이루어져 있고 다 합치면 페이지 수가 2000쪽이 넘어가는 긴 소설이다. 이 세가지 사실만 놓고 보면 내가 딱히 이 책을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떻게 된 일인지 눈을 떠 보니 이 책을 읽고 있었다.

 

  이 책을 읽은 뒤 판타지 소설이 무엇인지 그리고 문학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궁금해져서 조금 더 알아보았다. 판타지 소설은 장르문학의 일종이다. 장르문학과 순수문학에는 여러 차이가 있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개연성의 유무에 따른 구분이었다. 장르문학은 특정 장르의 규칙이나 관습을 따르기 때문에 일정 수준 이상의 개연성이 있다. 판타지 소설이나 무협 소설, 추리 소설 등을 생각해 보면 스토리는 다를지언정 기본적으로 비슷한 세계관을 공유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순수문학은 현실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현실에는 개연성이 없다. 이 말이 처음에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현실에 개연성이 없다니? 현실에도 엄연히 인과관계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다. 어렸을 때는 착하게 살면 복을 받고 공부를 열심히 하면 훌륭한 사람이 되는 줄 알았다. 그렇게 배웠던 것 같고 그런 생각이 익숙했다. 그러나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현실에는 '~하면 ~이다'라는 진리와도 같은 인과가 없다. 늘 반례가 존재하며 따라서 예측 불가능하다. 지난 3월 발생한 산청과 의성에서의 산불은 갑작스럽게 발생해서 바람을 타고 퍼지더니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산불이 되었다. 2025년을 며칠 앞둔 작년 12월 말에는 새떼에 부딪힌 항공기가 활주로에 겨우 내렸음에도 탑승객 전원이 사망하는 끔찍한 사고가 일어났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과 사고에는 규칙도 없고 누군가의 의도나 계획도 없다. 그냥 일어난다. 

 

 그리고 장르문학이 순수문학에 비해 열등하다거나 문학적 가치가 떨어진다는 의견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나 역시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장르문학의 경우 비슷한 내용의 재생산이 너무 무분별하고 지나치게 이루어진다는 점 때문이 아닐까 싶다. 최근 유행한 회귀물을 생각해 보면 이 점이 잘 드러난다. 여러 웹툰과 웹소설, 심지어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다룰 정도로 유행이 된 '회귀' 혹은 '환생', '빙의'라는 이야기 구조는 처음에는 신선했을지 몰라도 이제는 식상한 장르가 되어 버렸다. 특히 웹툰과 웹소설처럼 진입 장벽이 낮은 플랫폼을 통해 유통되다 보니 문학적 가치에 따라 선별할 시간도 없고 기준도 없어 비슷한 이야기 구조만 가질 뿐 문학적으로 아무런 가치도 없는 만화나 소설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장르문학은 사람들에게 이미 익숙한 세계관을 기초로 하다 보니 유행에 민감하고 상대적으로 써보기 쉽기 때문에 이런 한계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에 반해 순수문학은 유행이랄 게 따로 없고 특유의 '등단'이라는 문학계의 제도 덕에 진입장벽이 매우 높다. 이 제도 역시 여러 부작용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를 통해 최소한 해당 작품의 문학적 가치를 검증받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장르문학처럼 무분별하게 순수문학이 쏟아질 일은 없다. 아마 이런 특징들 때문에 순수문학이 '일반적으로' 장르문학보다 더 우월한 문학적 가치를 가진다고 말하는 것 같다.

 

 나 역시 판타지 소설에 대해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위에 적은 것처럼 뭐랄까 읽을 가치가 다른 책에 비해 떨어진다라든지 아니면 진짜 문학이 아니다 혹은 너무 가볍고 흥미 위주다 같은 생각이 그렇다. 그래서 여태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었는데 이 책을 읽으며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판타지 소설은 아무 잘못이 없었다. 잘 쓰인 판타지 소설, 즉 장르문학은 순수문학과 비교해도 결코 문학적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다. 문학적 가치를 결정하는 건 장르가 아니고 소설 그 자체다. 좋은 소설은 글을 통해 현실을 대면하게 한다. 비록 그 글이 현실과는 동떨어진 특정 세계관을 가진 장르문학일지라도 잘 짜여진 세계관 속에는 분명 현실을 반영하는 요소가 숨어있다. 우리는 이 요소들을 통해 지금 내가 처한 현실을 바라볼 수 있고 철학적 사유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가 예측 불가능한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지혜는 역설적이게도 특정한 규칙과 틀 안에서 의도와 이유를 가지고 서사가 이뤄지는 이야기 속에서만 찾을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장르문학에 끌리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