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설거지를 다 마친 뒤라도 그릇의 물기가 완전히 마른 상태를 선호했다. 어떤 일이든 그렇게 '바로 시작할 수 있는 상태'가 좋다고, 그래야 뭐든 할 마음이 난다고 했다.
<p.27, 입동>
도화가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며 눈가 주름에 파운데이션이 끼지 않았는지 살폈다. 그러곤 자신이 한창때를 지났다는 걸 체감했다. 아무렴 한창때가 지났으니 나물맛도 알고 물맛도 아는 거겠지. 살면서 물 맛있는 줄 알게 될지 어찌 알았던가. 직장 상사들은 '삼십대 중반이야말로 체력과 경력, 경제력이 조화를 이루는, 인생에서 가장 좋은 때'란 말을 자주 했지만 도화는 알고 있었다. 자신도, 이수도 바야흐로 '풀 먹으면' 속 편하고, '나이 먹으며' 털 빠지는 시기를 맞았다는 걸.
<p.87, 건너편>
강의를 마치고 돌아올 때 종종 버스 창문에 얼비친 내 얼굴을 바라봤다. 그럴 땐 '과거'가 지나가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차오르고 새어나오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나를 지나간 사람, 내가 경험한 시간, 감내한 감정 들이 지금 내 눈빛에 관여하고, 인상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표정의 양식으로, 분위기의 형태로 남아 내장 깊숙한 곳에서 공기처럼 배어 나왔다. 어떤 사건 후 뭔가 간명하게 정리할 수 없는 감정을 불만족스럽게 요약하고 나면 특히 그랬다. '그 일' 이후 나는 내 인상이 미묘하게 바뀐 걸 알았다. 그럴 땐 정말 내가 내 과거를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소화는, 배치는 지금도 진행중이었다.
<p.173, 풍경의 쓸모>
애가 어릴 땐 집 현관문을 닫으면 바깥세상과 자연스레 단절됐는데. 지금은 그 '바깥'을 늘 주머니에 넣고 다녀야 하는 모양이다. 아직까진 친구들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모바일 게임을 하고, 실시간 인터넷 방송을 즐겨 보는 정도 같지만, 가끔 아이 몸에 너무 많은 '소셜social'이 꽂혀 있는 게 아닌지 걱정된다. 온갖 평판과 해명, 친밀과 초조, 시기와 미소가 공존하는 '사회'와 이십사 시간 내내 연결돼 있는 듯해. 아이보다 먼저 사회에 나가 그 억압과 피로를 경험해본 터라 걱정됐다. 지금은 누군가를 때리기 위해 굳이 '옥상으로 올라와'라 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이니까.
<p.212, 가리는 손>
그래, 엄마랑 아빠는... 지쳐 있었어. '이해'는 품이 드는 일이라. 자리에 누울 땐 벗는 모자처럼 피곤하면 제일 먼저 집어던지게 돼 있거든.
<p.214, 가리는 손>
남편을 잃기 전, 나는 내가 집에서 어떤 소리를 내는지 잘 몰랐다. 같이 사는 사람의 기척과 섞여 의식하지 못했는데, 남편이 세상을 뜬 뒤 내가 끄는 발 소리, 내가 쓰는 물 소리, 내가 닫는 문 소리가 크다는 걸 알았다. 물론 그중 가장 큰 건 내 '말소리' 그리고 '생각의 소리'였다. 상대가 없어, 상대를 향해 뻗어나가지 못한 시시하고 일상적인 말들이 입가에 어색하게 맴돌았다. 두 사람만 쓰던, 두 사람이 만든 유행어, 맞장구의 패턴, 침대 속 밀담과 험담, 언제까지 계속될 것 같던 잔소리, 농담과 다독임이 온종일 집안을 떠다녔다. 유리벽에 대가리를 박고 죽는 새처럼 번번이 당신의 부재에 부딪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때야 나는 바보같이 '아, 그 사람, 이제 여기 없지...'라는 사실을 처음 안 듯 깨달았다.
<p.228,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지난번 <비행운>을 읽었을 때는 잘 느끼지 못했는데, 같은 작가의 단편소설집을 한 권 더 읽고 나니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그녀는 대단한 작가다! 문장도 너무 좋고 스토리도 너무 좋다. 짧은 소설 안에 하나의 사건과 그 사건을 경험하는 인간의 복잡한 심경을 절묘하고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다만 여전히 분위기는 밝지 않다. <비행운> 때도 그랬는데, 하나의 단편을 읽고 나서 그 짧은 시간에도 잔상이 오래 남아 다음 편은 내일 읽어야겠다 싶어 책을 덮은 적이 많았다. 소설의 분위기나 소재에서 느껴지는 울적함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두려운 마음이 들었던 이유가 컸다. 내 주변에 있을 법한 비극들이라 '이게 내 일이 되면 어떡하지?' 같은 두려움이었다.
원래 삶이란 이런 걸까? 살다 보면 억울한 일도 겪고, 불행한 일도 맞닥뜨리고,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고통을 품고 사는 것이 삶일까? 그게 삶의 디폴트 세팅이고 그 와중에 가끔씩 찾아오는 행운 같은 행복에 의지하며 사는 것일까? 책에서 '삼십대 중반이야말로 체력과 경력, 경제력이 조화를 이루는, 인생에서 가장 좋은 때' 라는 문장이 나온다. 내 나이가 딱 삼십대 중반인데 그래서 나는 이렇게 큰 고민과 걱정거리 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일까? 앞으로는 내리막길만 남았고 다가올 불행과 상실과 고통에 대비해야 하는 걸까? 소설을 읽으며 이런저런 고민과 걱정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읽으면서 대단한 소설이다라고는 느꼈지만 또 읽고 싶지는 않은 그런 복잡한 마음이 드는 책이다.
마지막으로 각 단편에 대한 짤막한 소감만 기록하고 마무리를 하려 한다.
입동 : 힘들게 얻은 아이를 불행한 사고로 잃은 부부의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가슴이 아프다. 내게도 이런 일이 생기면 어떡하나 두려웠다.
노찬성과 에반 : 할머니와 가난하게 사는 한 소년이 어쩌다 휴게소에 버려진 늙은 개를 데리고 살면서 겪는 일을 보여준다. 소년의 어린 마음에 드는 욕망과 죄책감과 슬픔과 기쁨 등 여러 복합적인 감정에 대한 묘사가 좋았다.
건너편 : 노량진에서 처음 만나 먼저 시험에 합격한 여자와 아직 공부 중인 남자, 두 사람의 동거와 이별에 관한 이야기이다. 몇 년을 들여 공부를 한다는 것, 그 긴 시간을 한 순간의 시험에 건다는 것,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고 실패한다는 것,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지치고 사람 미치게 만드는 일일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침묵의 미래 : 소수언어박물관에서 살아 있는 표본이 되어 살고 있는 천여 명의 고독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소재가 마치 공상과학 얘기처럼 참신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소설.
풍경의 쓸모 : 대학에서 시간 강사로 일하는 주인공이 우연히 같은 대학 정교수의 차를 타고 퇴근하던 중 교통사고가 발생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 문장 하나하나가 정말 기가 막히다는 생각이 들게 한 소설.
가리는 손 : 가장 인상 깊었던 소설. 읽으면서 며칠 전에 본 영화 <보통의 가족>이 떠올랐다. 남편과 일찌감치 이혼한 뒤 홀로 아들을 키워 온 엄마와 우연히 청소년들이 노인을 폭행하는 장면의 목격자가 된 아들의 이야기. 소설의 시간은 엄마가 아들을 기다리며 저녁을 준비하는 것부터 아들이 집에 와서 저녁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는 것까지 매우 짧은 시간이지만 그 시간이 마치 한 편의 스릴러 영화를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태어났을 때부터 내 간이며 쓸개며 다 빼줄 듯이 사랑으로만 키워 온 아이로부터 낯설고, 생소하고, 악한 모습을 보게 된다면 그때 느껴질 당혹감과 공포는 어떤 마음일까?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 갑작스러운 사고로 남편을 잃은 주인공이 영국 에든버러에 있는 사촌 언니네 집에 혼자 머물면서 상실과 고독을 감정을 느끼는 이야기. 물 흐르듯이 편안하게 읽을 수 있고, 혼자와 고독, 쓸쓸함에 대한 좋은 묘사와 문장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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