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가 암에 걸리면 노인보다 생존하기 힘들다는 건 잘 알려진 의학적 사실이다. 성장을 뒷받침하는 활발한 신진대사가 암의 빠른 확산에도 동일하게 기여하기 때문이다.
<p.43>
그러므로 한국 공동체를 설명할 때 흔히 사용되는 '사람을 갈아넣는다'라는 말은 '돈을 쓰지 않는다'라는 말의 뒷면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물리적 단위이고, 이 물리적 단위가 계속해서 '갈려 나가는' 상황이 오래도록 유지된다면 그 공동체의 재생산성은 붕괴될 것이다. 돈이 쓰이지 않는 상황에서 그만큼 사람이 더 쓰인다는 것은 돈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더 쓰이는 사람에게 자원이 적절하게 배분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그럼 그 사람은 자원을 배분받지 못하면서 자신의 시간마저 잃게 되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시간을 잃는다는 건 소비, 출산, 육아, 교육 등 사회적 재생산을 위한 활동에서 배제를 당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p.75>
정부가 단행했던 건국 초기의 농지 개혁은 다수의 자영농을 성공적으로 육성함으로써 당시 매우 중요했던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어느 정도 경쟁력을 갖게 했을 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그 이후의 산업 발전에도 어느 정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대다수의 농민들이 토지를 보유하여 최소한의 경제적 생산 수단을 갖출 수 있게 되었고, 이 때문에 이들의 자녀들이 1960년대 이후 도시권과 산업 현장으로 이동하여 1960~1970년대의 경제 발전을 이끈 노동력의 토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초기 농지개혁의 성공은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후 대책 없는 양극화에 시달리는 다른 개발도상국과 달리 자본주의 사회 발전 도상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빈부격차를 계속 억제하게끔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경제 발전 초창기 한국 경제의 토대를 만들었던 다수의 중소 자영농 육성 방침은 한국의 자본주의가 고도화되고 자유무역 시대가 열림에 따라 새로운 문제를 맞이한다. 농산물 시장이 개방되자 선진국 대비 높은 영세율로 인해 오히려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는 규모의 경제가 대단위의 공업 현장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농업에서도 규모의 경제는 당연히 작동한다. 농지 면적이 작아도 그 농지가 규모의 경제에 따라 효율적으로 운영되면 단위 당 생산 비용은 낮아지고 농산물 가격도 낮게 유지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은 개별 농지 면적이 작고 각 농지를 영세한 개별 농가가 운영하는 형태였으므로 1990년대 우루과이 라운드를 시작으로 농업이 본격적으로 개방되자 가격 경쟁력에서 금방 열세에 처했다. 수십만 평 이상을 기계화된 농업으로 운영하는 미국 등지의 농산물이 저렴한 가격으로 유입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한국은 농업에 한해 보호주의로 전환했다. 이는 당시의 한국 공동체 의사결정권자들이 농업 경쟁력 강화보다는 농가 소득 보전에 더욱 집중했다는 하나의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의사결정 과정이 과연 농가 소득 보전에는 성공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p.111>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더욱 배타적인 성격을 띤다. 이들은 서울이라는 자신들의 거주 공간과 고생산성 대기업이라는 자신들의 직장이 가지는 가치를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은 서울과 고생산성 대기업의 가치를 낮추는 지역 균형 발전이나 생산성의 고른 분배를 선택하기보다는, 개인의 개별적인 성공을 통해 사회에서 생존하고자 한다. 또한 이러한 배타적인 성향은 그들 스스로에게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자녀들에게까지 이어져, 높은 사교육 참여도를 통한 물적, 인적 자본의 세습을 추구하는 경향성을 나타낸다. 이러한 경향성은 한국 사회의 개선을 막고 있는 강력한 조세저항 및 사회 안전망에 대단히 냉담한 복지태도로 현실화되고 있다.
<p.329>
이처럼 수도권은 노년층에게나 청년층에게나 모두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공간이 되어 있기 때문에, 수도권의 주택은 이중 수요가 발생한다. 청년은 소득 증대와 자본 축적을 위해 수도권으로 이주하는 것이 필수적이고, 노년층은 노후의 안정적인 생존을 위해 수도권에 계속 머물러야만 한다. 노년층의 수도권 주택 매각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만 수도권, 특히 서울의 주택 공급이 활성화된다. 우리 사회는 바로 이 지점에서 교착 상태에 빠져 있다. 신규 매수 수요는 지속적으로 쌓이는데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인 예비 노년층 그리고 노년층의 매도를 통한 공급은 발생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많은 진보 성향의 전문가들은 전통적 대가족주의의 해체로 인해 수도권에는 1인 가구가 늘어날 것이며 이 때문에 서울 아파트 수요가 폭락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또는 어차피 미래에는 인구가 줄 것이기 때문에 언젠가 서울 아파트 수요는 폭락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한다. 나의 관점에선, 이는 비가 올 때까지 비가 오라고 기원하는 것으로 알려진 아메리카 원주민 기우제 수준의 예측이다. 그들의 예측이란 지역 불균형과 한국의 기형적인 고물가, 낮은 노동생산성으로 인한 실질적 저소득 상태 등을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인구 변수 하나만을 놓고 생각한 단견이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한국의 인구가 지금의 절반이 되어도, 그 절반이 여전히 서울에 살고 싶어 하는 나라라면 서울의 주택 가격은 절대로 하락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기우제 수준의 예측은 애석하게도 정권에 따라 부동산 정책에 적극 반영된 바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민주당계 정당이 집권할 당시 부동산 가격이 크게 폭등하는 일이 잦았다. 그때 부동산 가격의 상승에 영향을 끼쳤다고 알려진 정책들을 깊이 들여다보면, 1)인구 감소로 인한 주택 수요 하락이란 변수와 함께 2)주거복지 측면에서의 안정적인 임대 주거라는 요소를 중점에 놓고 진행한 흔적이 역력하다. 이러한 방침으로 인해 이 시기에는 대출 통제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수요 억제 정책과 부동산 보유세 인상을 통한 축출적 정책이 병행되었으며, 주거 환경 개선으로 인한 주택 가격 상승을 막기 위해 재개발 및 재건축에 대한 대대적인 통제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같은 정책은 10년에 걸친 실험 끝에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며, 종국에는 정권이 교체되는 결말로까지 이어졌다.
이는 당시 한국이라는 공동체의 정책의사결정권자들이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은 노년층의 수도권, 특히 서울 거주 수요가 굳건함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나라의 부동산 보유세 실효세율은 2018년 OECD 기준 0.16%로 OECD 평균인 0.54% 대비 3배 이상 낮은 수준이다. 그러나 부동산 보유세율을 높여 생산 동력이 떨어진 노년층의 이주를 유도하려 했으면 필연적으로 병행하여 추진했었어야 했던 것이 바로 지역균형전략이었다. 그렇지만 이는 정권을 가리지 않고 어떤 정부에서도 성공적으로 수행하거나 적어도 장기적인 전략이나마 구축해 둔 적이 단 한번도 없다. 나이가 들어 거동은 불편하고 몸은 점점 아픈데 지하철도 병원도 없는 곳으로 이주할 노인은 어느 사회에도 없을 것이다.
그 결과 실제로 서울은 점점 늙어가는 도시가 되어가고 있다. 2014년과 2023년 서울의 동별 평균 연령을 살펴보면,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2014년 대비 9년이 더 늙었다. 원래 평균 연령 52세가 넘는 동은 이미 도심 공동화가 끝난 중구의 한복판 정도였으나, 이제는 강남과 강북을 가릴 것 없이 서울 전역의 수많은 곳들이 그러하다. 높은 주택 가격을 감당하지 못한 청년층은 서울에 들어오지 못하고, 서울에 살던 사람은 밖으로 나갈 수가 없으니 그 안에서 그대로 늙어가는 게 최선이다. 세계적인 메갈로폴리스이지만 그 속은 마치 감옥과도 같이 변해가는 공간. 그게 바로 한국 공동체의 모든 것이 집중된 수도 서울의 모습인 것이다.
<p.357>
이처럼 한국의 빈약한 흡연 구역 설치와 점점 줄어만 가는 쓰레기통의 문제는, 일견 지엽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소한 부분에서도 사회가 자본의 적절한 투자와 인프라의 설치보다는, 개별 사회 구성원들의 품성을 단속과 계도로 통제하고자 하는 방법론을 시대와 관계없이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나타내는 하나의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이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지역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지자체가 추진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관광지의 개발이듯, 우리는 언제나 '자본 투자'를 고민하기보다는, 합의와 의사결정의 과정이 크게 필요치 않은 '단속'을 통해 문제를 덮어 왔던 것이다. 이는 단순히 사회를 운영하는 절차가 어떻게 흘러가야 하는지를 정하는 사람들의 탓이라기보다는, 앞서 계속 강조했듯이 사회의 병리적 현상들을 '한국인의 그릇된 품성'의 문제로 치환하는 담론이 만연해왔던 것도 꾸준히 원인을 제공해 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p.409>
보편적 복지가 자리 잡지 못한 상황에서, 선별적 복지가 곧 복지 그 자체라고 일반화되고 있다는 건 또 다른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복지라는 제도를 빈곤계층의 최후 생존 수단 또는 농업적 근면성의 증대 수단 정도로 머무르게 함으로써 복지의 근본 이념 자체를 훼손하는 사회적 부작용이 바로 그것이다. 복지는 빈곤과 생존이란 키워드로만 연결되는 피상적인 것이 아니며, 사회 구성원 모두의 행복과 통합을 제고하는 수단도 될 수 있다. 누구든 자신의 경쟁력을 꽃피울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주는 것도 복지의 역할이다.
<p.423>
이렇게 대부분의 사회복지,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전 과정을 국가가 아닌 민간이 책임지는 국가에서는 나름대로 특이한 문화가 발생한다.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해야 하기에 개인이 매사에 촉수를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문화가 바로 그것이다. 복지 서비스의 품질이 균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
정부의 행정력이 닿아야 하는 영역은 이제 우리들 각자가 탐색하고 관리해야 할 시민의 몫이 된다. 어떤 어린이집은 거리는 멀지만 담당 인력의 평판이 매우 좋을 수도 있다. 어떤 어린이집은 거주지에서 매우 가깝지만, 다른 어린이집보다 아이들에게 신경을 덜 쓴다는 소문이 돌 수도 있다. 또 다른 어린이집에서는 과거에 사고가 발생한 전적이 있을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개별적 판단의 기준으로 바뀌는 것이다.
비단 이러한 산택의 문제는 어린이집 하나에서 끝나지 않는다. 여러 사람의 손이 필요한 모든 일, 복지의 대상이 되는 모든 일들이 정보의 취합과 취사선택으로 이어지게 된다. 유아차 한 대를 사더라도 마찬가지이고, 나이가 많이 들어 거동이 불편한 부모의 노후를 어떻게 돌볼 것인가에 대한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더 넓게는 학교를 진학하는 문제까지도 연결될 수 있다. 이렇게 작은 재정의 공동체, 특히 복지를 민간에 폭넓게 외주화한 사회에서 모든 것은 '개인의 선택과 정보력'의 문제가 된다. 이것이 여성들의 출산 및 육아로 인한 경제 활동의 단절이라는 상황과 교묘하게 겹치면서, 한국에는 거대한 사회복지 정보공유의 허브가 등장한다. 바로 맘카페다. (...)
당장 선진국만 해도, 미국과 같이 지리적인 특징상 전 국토에 경찰력이 한국 정도로 촘촘히 포진하지 못하는 나라에서는 주민들이 직접 총기를 들고 자경단을 운영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맘카페 역시 국가가 방치한 부분에서 시민들이 사적으로 모여 이득을 추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결사체다. (...)
전근대 시절 우리는 마을 공동체에서 일종의 공동 육아를 수행해 왔지만, 농촌의 마을 공동체가 산업화로 인해 기능을 상실한 뒤엔 육아가 각 개인의 책임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국가의 개입은 미미했고, 육아를 하는 개인은 철저히 고립될 수 밖에 없었다. 고립은 불안을 동반하고,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의존할 대상이 필요하며, 의존할 대상이 필요한 개인들은 서로 모여든다. 그 중에선 당연히 모임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개인도 생겨나며 이들은 높은 확률로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p.431>
수도권, 특히 서울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직간접적인 주거비용과 압도적인 사교육비로 인해 쓸 수 있는 돈이 별로 없다. 이는 2장에서 언급했던 눔프(Noomp) 현상이 발생하는 근본적인 토양이라 할 수 있다. 상당수의 사회 구성원이 사회 안전망의 확충과 복지제도의 확대 자체는 원하지만, 그 재원이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충당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가진 자원이 부족하고 자기 자신의 선택 하나 하나가 돌이킬 수 없이 중요한 환경에서는 개별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이 선택한 자원에 대한 보호에는 누구보다 열성적일지 몰라도, 이것을 보편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것에 자신의 한정된 자원을 각출하는 것에는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렇듯 자기 자신에 대한 방어엔 적극적이나 공동체에 대한 투자에는 인색한 한국의 사회 환경은 현재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게 만든다. 돈을 써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시쳇말로 사람을 '갈아넣는' 구조가 지속될 수밖에 없게끔 강제하기 때문이다.
<p.440>
경제적 자원이 부족하고 좁은 공동체 안에서의 내부적 경쟁이 격심한 사회의 특징은 무엇일까? 우리는 그 경쟁의 결과를 어떻게 하면 모두가 만족스럽게 도출할 수 있는가에 과도할 정도로 집착한다는 점에서부터 이 장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공동체의 테두리를 비교적 쉽게 벗어날 수 있는 사회라면, 그 안에서 경쟁의 결과를 가리는 판정은 중요도가 떨어질 것이다. 모두가 동일한 범주 안에서 '죽을 때까지 경쟁을 지속해야 하는' 사회는 그렇지 않다. 서열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서열을 가르는 방식은 더더욱 중요해진다. 때로는 이것이 전 국민 사이에서 합의된 국가적 현상이 되기도 한다. 한국의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바로 그것이다. (...)
이 장에서 나는 먼저 극심한 입시 경쟁에 관해 짚어보려 한다. 경쟁은 필연적으로 재화를 차지하는 순서를 만들어내며, 이 순서는 일종의 규칙에 의해 구축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의 경쟁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경우 그 순서의 간격은 점점 촘촘해지게 마련이며, 지나치게 촘촘한 간격은 그 간격을 만들어 내는 규칙에 대한 집착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우리는 이 과정을 파악하기 위해서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우리 사회의 전통, 시험 제도를 통한 국가 체계 유지라는 역사적 맥락을 들여다봐야 한다.
<p.567>
여기 A와 B가 있다고 가정하자. A는 수능 시험에서 100점을 획득하였고, B는 99점을 획득하였다. 많은 한국 공동체 구성원들의 꿈과 희망의 대상인 서울대학교 의과 대학 정원이 10명이라고 할 때, A가 가까스로 10등을 기록했고 B는 11등을 기록했다고 하자. A는 당당한 서울대 의대생이고, B는 그렇지 않게 된다. 이것은 공정한가? 숫자로만 생각한다면 A가 B보다 점수가 높은 게 맞다. 그래서 당연히 A는 합격의 기쁨을, B는 탈락의 슬픔을 느끼는 것이 합리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실력의 관점에서는 어떨까? 과연 저 1점의 점수차이가 A와 B의 미래 의료 인력으로서의 역량 차이를 정말로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봐야 할까? 의과대학에서 공부를 하며 의료인이 되기 위한 지식을 효과적으로 습득할 수 있는 역량 차이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일까? 아무도 명쾌하게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응시자 간의 미시적인 격차가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띠는지는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등수가 그러하니 인생이 달라져야 하는 제도를 과연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한국 공동체는 이러한 시험 제도의 기본적인 불공정성에 대해 한 번도 제대로 된 답변을 내린 적이 없다. 그 대신 저 1점 차이를 만들어내기 위한 정신적 교육만을 강화했다. 실수도 곧 실력, 사당오락 등등의 지루한 문구들은 토대의 불공정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우선 '그 제도에 가장 잘 적응하는 사람만이 승자가 된다'는 한국식 능력주의의 대표적인 상징과도 같다. 흡연구역과 쓰레기통은 모두 없앤 뒤 계도와 단속만으로 간접 흡연이 사라지고 길거리가 깨끗해질 것이라고 믿는 우리의 사회구조적 인색함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경로를 확인할 수 있다.
<p.587>
그럼에도 한국 사회는 왜 시험이 공정하다는 허상에 집착하는가?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이는 우리가 시험의 결과가 '수치'로 공개되는 투명성을 공정성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시험, 그 중에서도 특히 수능은 점수뿐만 아니라 자신의 위치가 대충 같은 수험생들 사이에서 어디쯤인지는 비교적 상세하게 공개한다. 또한 우리는 그 계산의 신뢰도가 높다고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 결과와 누군가의 위치를 투명하게 공개한다고 해서 그 제도 자체가 공정하게 될 수는 없다. 시험이야말로 가장 공정한 제도라고 우기는 사람들은 기계적 투명함을 사회적 공정함으로 바꿔치기하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p.604>
게다가 시험 통과자가 얻은 모든 사회경제적 권리를 순수한 그의 성실함의 대가로 인정하는 사회 흐름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발언권을 더더욱 약화시킨다. 제도의 관문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이 사회 불균형에 대해 아무리 호소해 봤자 "그것은 학업을 성실하게 수행하지 않은 너의 개인적 책임"이라는 반응으로 일관되게 반박당하기 십상이다. 즉, 시험공화국은 사회의 모든 불균형이 시험 성적에 선행함에도 불구하고 그 불균형을 개인 선택의 문제로 배제시켜 버린다. 다시 말해 시험이라는 제도가 사회의 더 많은 것을 결정할수록 그 사회의 구성원들은 사회의 문제가 개인의 문제라는 생각에 경도될 수밖에 없다. 그런 사회에서 공동체를 위해 자원을 투자할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p.614>
불행의 원인을 품성에서 찾는 것만큼 어리석은 시도는 없다. 한국인들은 남들과 비교하는 일이 잦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하지만, 그 말은 절반만 맞다. 비교라는 행위는 경쟁의 압력이 높기 때문에 작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p.636>
이러한 올려치기 현상은 한국 사회의 인식 체계와 욕망 구조가 이중적이라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모두가 도달해야 할 평균을 현실보다 더 특별하고 경쟁적으로 상정해 두고, 자신은 아직 그 평균적인 삶에 미치지 못한다면서 스스로를 몰아붙인다. 사회의 평균을 구성하는 대다수 사람들마저도 '더 높은 평균'을 찾으면서 불행할 수밖에 없는 사회가 바로 한국인 것이다.
<p.657>
이러한 경제 구조 속에서 각자의 인식 체계 내 욕망구조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는 부의 상속, 두 번째는 투자 또는 사업의 성공, 세 번째가 바로 고부가가치를 지닌 라이선스의 획득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 세 가지 부의 축적 수단 중 그나마 운의 요소가 가장 적게 작용하는 것이 바로 세 번째인 라이선스의 획득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라이선스는 보통 의사, 법조인 등을 주로 생각할 수 있지만, 한국과 같은 수출 주도형 국가에서는 언어의 능력 또한 상당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는 한국에서 강도 높고 평균과는 차별화된 교육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으며,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평생 상실하지 않고 계속 경제적인 이득을 제공하게 된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교육의 ROE(Return on Equity, 자기자본이익률)가 필연적으로 높을 수밖에 없다. 출생아 수는 날이 갈수록 줄어들지만 영어유치원 학비는 치솟고 있는 현상은 각종 교육 중에서도 언어 교육의 ROE가 특별히 높음을 시장이 선반영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향후 인구가 더욱 크게 감소하여 한국에서 내수시장만을 대상으로 한 사업이 그 경제적 부가가치를 충분히 창출하지 못할 경우를 생각해 보다. 가뜩이나 높은 수출의존도는 더욱 격심하게 상승할 것이며, 그러한 구조에선 언어 교육에 투입된 부모의 자원이 자녀 세대의 경제적 수준을 결정하는 데 더욱 큰 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이다.
<p.661>
아울러 한국 공동체의 경쟁 압력과 인식 체계 속 욕구의 기제가 이러한 경제 구조와 강력히 결합하여 누적되어 있다는 사실은 더 큰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 한국 공동체는 높은 경쟁 압력과 함께 빈약한 사회 안전망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자. 둘은 잘못된 만남을 가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는 무엇인가? 첫째는 가성비만을 추구하는 소비 행태에 따른 '손해를 참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이고, 둘째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범죄의 증가이다.
<p.674>
냉정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사람은 무균실에서는 올바르게 성장할 수 없다. 그러나 육아를 대단히 비싼 선택으로 만들어버린 한국 사회에서는 육아 역시 가성비의 대상이 되어 있을 뿐이며, 이런 사회에선 내 아이에게 '유해한 것'들을 모두 적극적으로 거부하기 십상이다. 육아가 가성비의 대상이 되면, 이 일의 효율은 결국 자신의 자녀가 얼마나 훌륭한 대접을 받는지의 문제로 치환된다. 어떤 사람들은 다행히도 사회를 구성하고 살아가는 인간의 특성상 자녀가 성장 과정에서 약간의 손해를 입거나 양보를 하는 게 불가피하다고 훈육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 전체가 가성비를 추구하는 분위기에서 어떤 사람들은 무균실과 같은 '언제나 무해한' 환경만이 자신이 원하는 효율성에 가장 크게 접근하였다고 판단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경향이 갈수록 강해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학생의 수는 점점 더 줄어만 가는데 교사를 향한 고소와 고발 건수는 놀라운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면, 가성비를 따질 수밖에 없는 사회경제적 구조 때문에 사람들이 점점 더 이기적으로 변하고 있다고 추론하는 게 타당하다. 오로지 효율성만이 남은 공간에 이기심 말고 다른 것이 들어설 여지는 없는 법이다.
<p.684>
그래서 전 세계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미래 인구가 감소한 한국은 식료품 사막(Food Desert) 현상이 발생할 우려가 있다. 식료품 사막은 1990년대 영국에서 처음 대두된 개념으로, 주거 반경 500m 내에서 신선한 농산물을 구입할 수 없는 지역을 가리킨다. 현재 식료품 사막 현상이 가장 심각한 곳은 미국의 남부 및 러스트 벨트 일부, 중부의 깊숙한 내륙 지역이다. 이런 곳들은 대개 미국에서도 빈곤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는데, 인구도 워낙 적고 장거리 도로 교통에 수송을 의존하는 관계로 채산성이 맞지 않아 아예 신선식품 자체가 들어가지 않는 지역도 있다.
<p.759>
내수시장이 축소되고, 얼마나 글로벌 밸류체인에 밀접하느냐에 따라 각 업종간 부가가치의 차이가 극명해질 수 있는 한국 공동체의 미래에서는, 부가가치가 높은 업종에 진입하려면 기본적으로 외국어 교육에 대한 투자가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미 서울에서는 그런 움직임이 적극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대학 등록금의 두 배가 넘는 비용을 지불하고 자녀들을 영어유치원에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갈수록 확대되어 인구가 상당히 감소한 미래에 이르면 특목고나 자사고의 경우 전체 수업을 모두 영어로 진행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영어의 생활화가 공동체 경제력 배분의 핵심 지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국어의 능숙도를 포함한 교육 자본에 대한 투자 ROE는 그 어느 때보다도 증가할 것이고, 특목고와 자사고, 그리고 강남 8학군의 불패 신화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이것은 강남이라는 학군지 수요는 대한민국 인구가 반 토막이 날지라도 오히려 상승한다는 뜻과 같다. 그러면 강남이 선도하는 서울의 주택 가격은 인구가 감소해도 계속 상슬할 것이다. 한국의 정책의사결정권자들은 그때도 강남의 집값을 잡는 것이 사회 정의의 실현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실패를 계속 반복하고 나서도 말이다.
<p.780>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우리는 조금씩 더 가난해지겠지만, 그 일은 상당히 느리게 진행될 것이므로 크게 관심을 받지도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정해진 미래는 '미래'가 아니라 바로 '현재'일 것이라는 관점에서, 마치 누군가에게 호소하듯 본문을 써내려 갔다. '정해진 미래'라는 것은 그 결과가 정해져 있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오로지 시간뿐이라는 말과 같다. 뒤집어 생각하면, 우리에겐 시간이 있으므로 지금 이 순간 우리를 둘러싼 온갖 문제들을 수정할 기회 또한 갖고 있다.
<p.869>
이 책에서 작가는 지금의 한국 사회의 문제를 만든 근본 원인으로 낮은 노동 생산성을 꼽는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요약해 보면 한국은 노동 생산성이 낮기 때문에 업종별 임금 차이가 크게 나타난다. 전문직과 대기업 직원의 임금과 계약직과 중소기업 직원의 임금의 격차가 예를 들어 다른 나라는 최대 120%에서 최소 80%라면 우리나라는 150%에서 50%까지 벌어진다고 할 수 있다. 즉, 다른 나라의 경우 꼭 대기업이 아니더라도 중소기업에서도 대기업의 80% 정도의 임금을 받아 삶의 질 측면에서 큰 차이 없이 살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중소기업에서 일을 하면 대기업의 50% 정도 임금밖에 받지 못하기 때문에 삶의 질 측면에서 큰 차이가 난다. 그 결과 우리나라 사람들은 고임금의 직업을 갖기 위해 서로 치열한 경쟁을 한다.
문제는 고임금의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입시라는 점이다. 다른 방법으로는 고임금의 직업을 가질 수 없기에 어떤 대학에 가느냐가 자신의 남은 인생을 결정할 정도로 입시가 중요해졌다. 따라서 자녀를 키우는 대부분의 가구는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큰 비용을 들여 사교육에 투자한다. 이렇게 낮은 노동생산성으로 인한 저임금, 지나친 사교육비 지출, 집값을 포함한 고물가, 세 가지 주요 원인 때문에 우리 나라 사람들은 돈을 벌어도 먹고사는데 쓰고 나면 남는 여윳돈이 없다. 대부분의 가구가 잉여 자원이 없으니 공동체를 위한 지출과 사회복지에 대해 인색하다. 결국 대한민국은 증세를 할 수도, 돈을 더 쓸 수도 없으니 사회에 돈이 필요한 분야에 돈 대신 사람을 '갈아서' 조금씩 굴러간다. 계속해서 사람을 '갈아온' 결과 노동 시간은 늘어나고 임금은 적어지며 다시 노동 생산성이 낮아지는 처음의 원인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순환 구조로 반복된 결과가 대한민국의 현재 모습이다.
이렇게 임금 격차가 심한 상황에서 결혼과 자녀는 사실상 청년들에게 사치품이 되었다. 전문직이나 대기업 직장을 다니는 부부만이 누릴 수 있거나 혹은 부모님의 지원이 있는 부부만 누릴 수 있는 것이 되어버렸다. 결혼 지원은 부모의 합법적 증여 수단이 되었고 일종의 예물과 같은 의미가 되었다. 결국 부모 지원을 통해 서울 혹은 수도권에 집을 마련하여 출퇴근 시간을 줄이고 잉여 자원을 가질 수 있는 부부만이 아이를 가질 생각을 한다. 부모의 지원이 없는 청년들은 결혼을 하지 않거나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는 낳지 않기로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 결과 대한민국에는 현재 0.7명 대의 초저출산율이라는 충격적인 수치를 갖게 되었다.
이 외에도 작가는 시험이라는 제도를 언급하며 능력주의의 폐해에 대해서 언급하기도 하고 사회복지서비스의 부재로 인해 발생하는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과 사람들이 겪게 되는 불편함도 얘기한다. 이 책을 읽은 건 아마 올해 초였을 것이다. 충격적인 제목 때문에 읽게 되었지만 젊은 작가의 한국 사회에 대한 진단과 통찰이 다른 어떤 책보다 더 정확하고 현실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몇 개월 뒤 독일의 유명한 유튜브 채널인 쿠르츠게작트(Kurzgesagt)에서 'SOUTH KOREA IS OVER'라는 충격적인 제목의 영상을 업로드했다. 이 영상에서 한국은 초저출산으로 인해 '회복 불가능한 지점'을 지나버렸고 곧 머지 않은 미래에 경제, 사회, 문화적 측면에서 붕괴할 것이다라는 충격적인 분석 결과를 낸다.
한국은 정말 자살하고 있고 곧 붕괴할까? 이 책을 처음 읽고 많은 생각이 들었고 몇 차례 내 생각을 정리해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도무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무엇이 잘못된 건지 뾰족한 답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일단 나부터 좀 살고 보자.' 안타깝지만 내게는 대한민국의 초저출산으로 인해 몇 십 년 뒤 찾아올 큰 문제보다 코 앞에 닥친 자잘하지만 시급한 문제들이 수두룩하다. 이런 내가 너무 이기적인 걸까?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이런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닐까. 각자도생의 시대를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힘에 벅차 대한민국의 미래와 이웃 공동체를 생각해 볼 겨를이 없는 것이 아닐까? 지금 당장은 대한민국의 불안한 미래에 여러 고민이 들지만 뒤돌아서면 내 앞에 당장 살아가야 하는 현실이 놓여 있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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