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트로바선에 관한 발표 이후로도 인생은 놀랄 만큼 변하지 않았다.
상황은 심각하고 치명적이었지만 그게 정상이기도 했다. 제2차세계대전 중 대공습을 당한 런던 시민들도 평소처럼 일상을 이어갔다. 가끔씩 건물들이 날아간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사태가 아무리 절망적이라도 누군가는 계속 우유를 배달해야 한다. 그러다가 맥크리디 부인의 집이 밤에 폭격을 당한다면 뭐, 그 집은 배달 고객 명단에서 지우는 것이다.
(외계의 생명체에 의한 것일지도 모르는) 세계 멸망을 한 세대나 두 세대쯤 앞두고 있는 상황도 그랬다. 나는 아이들 앞에 서서 그 애들에게 기초과학을 가르쳤다. 이 세계를 다음 세대에게 전해주지 못한다면 세계가 존재하는 의미가 뭐겠는가?
<p.167>
인간의 두뇌란 소프트웨어 도구를 모아놨더니 어쩌다가 생긴 기능적 단위와 비슷하다. 각 '기능'은 어떤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해 우리의 생존 확률을 높인, 임의의 돌연변이로서 추가된 것이다.
<p.1024>
대학원 시절에 얻은 한 가지 교훈은, 멍청해질 만큼 피곤하다면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순간에는 문제를 해결하려 들지 말아야 한다.
<p.1698>
책 읽는 게 재미 없어질 때가 있다. 책테기라고도 하는데 딱히 읽고 싶거나 재밌는 책도 없고 책 보다 TV나 게임 같은 게 더 재밌어지는 때다. 그럴 때 나는 그냥 나를 내버려 둔다. 입시 공부나 자격증 공부를 위해 의무적으로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닌 게 참 다행이다. 하기 싫은 것을 하기 싫을 때 하지 않아도 되는 건 엄청난 자유다. 그렇게 몇 주, 몇 달 정도 책과 멀어져 TV나 게임, 기타 등등에 푹 빠져 지낸다. 그렇게 무언가에 최선을 다해 나만의 끝에 도달하고 나면 질려버리고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주로 갑자기 현타가 오면서 '그래, 이만하면 많이 했다.'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바로 나만의 끝이 되는 순간이다. 그리고는 다시 서재에서 책을 뒤적거리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수면 위에서 놀다가 이따금씩 깊은 바닷속이 궁금해져 숨을 잔뜩 들이마시고는 잠수할 수 있는 가장 깊은 바닷속까지 갔다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게 책과 멀어져 있다가 다시 책의 세계로 들어가는 상황이 되면 나는 먼저 재미있는 소설을 고른다. 오랜만에 책과 다시 만나기 전에 몸을 푸는 준비운동 같은 느낌이랄까. 정말 재미있는 소설을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읽고 나면 '아, 그래, 역시 책이야!' 같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런 상황에서 내가 골랐던 여러 책 중에 하나이다.
이 책의 작가 앤디 위어는 UC샌디에이고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공대생 출신으로 프로그래머로 일하던 중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수 년 간 자신의 짧은 소설을 웹사이트에 올리던 중 2009년에 쓴 단편 <The Egg>가 유명해지면서 이름을 알렸다. (참고로 <The Egg>라는 소설은 5분이면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짧고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으므로 관심이 있다면 한 번 검색해서 읽어볼 만하다.) 그 이후 리들리 스콧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어 더욱 유명해진 <마션>과 <아르테미스> 그리고 이 책 <프로젝트 헤일메리>까지 해서 우주 3부작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SF소설 작가가 되었다. 게다가 <프로젝트 헤일메리> 마저 내년 봄에 라이언 고슬링을 주연으로 한 영화가 개봉한다고 하니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건 쉽지 않지만 내 나름대로 기록을 위해 적어보고자 한다. 시작은 '페트로바선'의 발견이다. 어느 날 태양에서 금성으로 이상한 적외선 광선이 날아가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발견자의 이름을 딴 이 페트로바선의 정체는 바로 외계미생물들이 태양빛을 흡수했다가 내뿜는 선이었다. 이 외계미생물을 '아스트로파지'로 부르기로 하는데 아스트로파지는 우주의 항성에서 나오는 빛을 가지고 물질대사를 하는 특수한 외계생명체로 우주의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마치 곰팡이처럼 여러 별들을 감염시키고 있었다. 문제는 아스트로파지가 어쩌다 태양에도 옮겨 붙어 태양빛을 흡수해 물질대사를 하는 바람에 지구에 다다르는 태양에너지의 총량이 감소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아스트로파지가 많아져 지구로 오는 태양에너지의 양은 더 줄어들게 되고 천문학자들의 계산 결과 대략 20년 후면 지구 생명체가 식량 부족으로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충격적인 결과를 얻게 된다. 이에 전 세계는 초법적인 기관을 만들어 힘을 합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과학자들의 노력 끝에 지구 근처 대부분의 별이 아스트로파지에 감염되었으나 지구에서 약 12광년 정도 떨어진 '타우 세티'라는 별만 감염되지 않아 밝기 변화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해당 항성에 무언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곳으로 탐사 우주선을 보내기로 한다. 이와 동시에 아스트로파지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는데 아스트로파지가 흡수한 태양에너지를 반대로 사용하면 엄청난 에너지원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아스트로파지를 대량으로 생산하여 탐사 우주선의 추진력으로 사용하기로 한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제한된 시간 때문에 아스트로파지의 생산을 충분히 할 수 없고 타우 세티까지 도달하는 데 필요한 양만 겨우 맞출 수 있다는 점이었다. 즉, 타우 세티에 도달하고 나면 우주인들은 다시 돌아올 수 없고 타우 세티의 비밀을 담은 정보가 담긴 소형 무인 우주선만 지구로 보내는 게 현재로서는 지구를 살릴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그리고 과학자들은 이 자살 임무를 '프로젝트 헤일메리'라 부르기로 한다.
전 세계에서 프로젝트 헤일메리 임무를 수행할 사람을 선발하기 시작했다. 타우 세티까지 가는 동안 동면을 해야 하므로 긴 시간 동면을 해도 문제가 없는 사람들 중 과학 분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 우주 비행에 적합한 사람 3명과 예비 인원까지해서 총 6명을 뽑았다. 그러나 그들 중 몇 사람이 연구소에서 아스트로파지를 연구하다가 그만 아스트로파지가 폭발해버리고 만다. 다른 사람을 다시 선발할 시간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아스트로파지를 연구하던 과학자 중 한 명이었던 주인공 '라일랜드 그레이스'가 우주선에 탑승하게 된다. 그리고 소설은 우주선 안 그레이스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로 동면에서 깨어나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레이스는 우주선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여러 자료를 봐가면서 동면 때문에 잊혔던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고 타우 세티의 비밀을 밝혀내는 연구를 시작한다. 그러던 중 그레이스는 자신과 같은 이유로 타우 세티의 비밀을 찾기 위해 '40 에리다니'라는 별에서 우주선을 타고 날아온 외계 생명체 '로키'와 만난다. 이 둘은 사는 환경과 언어, 사용하는 물질 등 모든 부분에서 차이가 나지만 둘은 힘을 합해 아스트로파지와 타우 세티를 연구하여 각자의 행성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다. 대략 여기까지가 줄거리의 절반 정도 되겠다. 이후 그레이스와 로키가 우주선에서 힘을 합쳐 아스트로파지를 없앨 방법을 찾는 과정과 각자의 행성을 구하는 과정도 무척 재미있으니 한 번 이 책에 푹 빠진다면 끝까지 읽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작가의 전작 <마션>에서도 느꼈지만 앤디 위어의 소설에는 공대생 특유의 덕후 같은 유머와 위트가 곳곳에 묻어있다. 덕분에 자칫 어려울 수 있는 공상과학소설이 피식하고 웃으면서 읽을 수 있는 소설이 되었다. 나는 이게 무척 좋다. 이야기를 지나치게 무겁지도 지나치게 가볍지도 않게 만들어주는 느낌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매사에 진지한 사람은 다가가기 어렵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안 될 것 같고 덩달아 나도 긴장하게 된다. 반대로 매사에 가벼운 사람은 친근하고 편하긴 하지만 깊이 사귀고 싶지는 않은 느낌이다. 그런데 유머 있는 사람은 좀 다르다. 무거운 분위기에서는 농담 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모습이 멋지고 가벼운 분위기에서는 농담 속에 본질을 꿰뚫는 핵심을 숨겨 놓은 모습이 멋지다. 나도 언젠가 어떤 책을 읽으며 앞으로 유머 있는 사람이 되겠다라고 적었던 것 같은데...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그때 그 결심 이후로 바뀐 게 별로 없는 느낌이다. 농담도 노력이 필요하고 훈련이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고 의식적으로 시도해봐야겠다는 결심을 '다시'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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