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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스 이야기 > 슈테판 츠바이크, 1942 (eBook)

by Ditmars 2025. 11. 19.

<체스 이야기> 슈테판 츠바이크, 1942 (eBook)

 

 친구가 알려 준 이 소식은 내 각별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온갖 편집망상증으로 단 하나의 아이디어에 갇힌 사람들은 평생 나의 호기심을 자극해 왔는데, 뭔가 한 가지에만 몰두하면 할수록, 다른 한편으로 무한한 것에 가까이 다가가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게, 세상과 동떨어져 보이는 사람들은 그들만의 특별한 재료로 마치 흰개미처럼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기이하고 압축된 세계를 만들어 놓는다.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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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은 매우 오래되었고 짧지만 흡입력이 있다. 간단한 줄거리는 이러하다. 배경은 뉴욕에서 부에노스 아이에스로 가는 대형 여객선 안이다. 소설 속 화자인 '나'는 우연한 기회로 같은 여객선에 체스 세계 챔피언인 '미르코 첸토비치'라는 사람이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사람과 친해지고 싶었던 나는 방법을 궁리한 끝에 사람이 많은 곳에서 체스를 두는 것으로 그의 관심을 끌기로 한다. 그 와중에 같이 체스를 두던 한 부자 승객과 얘기를 나누게 되는데 그 역시 체스 세계 챔피언과 체스를 둬보고 싶다며 경기료로 큰돈을 제시하면서 첸토비치와의 경기를 잡는다. 약속한 날이 되어 나는 부자 승객과 몇몇 체스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과 팀을 만들어 첸토비치와 체스를 두기 시작한다. 경기는 당연하게도 첸토비치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는가 싶었는데 군중 속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이 결정적인 순간에 훈수를 둠으로써 겨우 무승부를 만들 수 있었다. 경기가 끝나고 나는 그 사람을 찾아 배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마침내 그 사람과 만나게 되고 긴 대화를 나눈 끝에 그 사람의 정체를 알게 된다. 

 

 그는 오스트리아 출신 변호사이며 B박사로 불린다. 이 배에 타기 전 나치 비밀경찰 조직인 게슈타포에게 붙잡혀 수용소로 가는 대신 어느 호텔 방 안에 홀로 오랫동안 감금되어 있었다. 읽을거리도, 할 거리도, 볼거리도 없는 단출한 방 안에 갇혀 몇 달이 넘는 시간을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디던 어느 날 우연한 기회로 책 한 권을 몰래 손에 넣는다. 그 책은 바로 150편의 챔피언 시합을 모아 놓은 체스 교습서였다. 체스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었지만 그 방 안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거라곤 그 책을 보는 일 밖에 없었기에 그는 체스교습서를 보고 또 봤다. 그는 이 책을 읽으며 체스의 기초를 깨우치고, 150편의 시합을 외우고, 머릿속으로 체스를 두며 방 안에 혼자 있는 시간을 버틴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체스에 대한 그의 집착은 정도가 심해져 그의 머릿속 자아가 흑과 백, 두 개로 나뉘어 깨어 있는 시간 내내 서로 체스를 두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정신 분열이 더욱 심해져 방 안에서 기절하고 병원으로 실려 간다. 그곳에서 의사의 도움을 받아 정신분열증을 치료하고 이 배에 타게 된 것이다. (B박사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 심리 묘사는 정말 어마어마하다.) 

 

 '나'는 B박사의 이야기를 듣고 이 사람이라면 첸토비치를 이길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 그에게 첸토비치와 경기를 부탁한다. B박사는 다른 사람과는 체스를 한 번도 둬본 적이 없으며 정신분열증이 다시 도질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거절하지만 딱 한 판 만이라는 말에 승낙한다. 마침내 B박사와 첸토비치와의 경기가 있는 날, 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경기는 시작되었다. 첸토비치는 처음에는 아마추어를 상대하듯 시큰둥한 태도로 경기에 임하다가 B박사의 수에 대처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자 태도가 바뀌어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과는 놀랍게도 B박사의 승리였다. 골방에 박혀 머릿속으로만 체스를 둔 사람이 세계 체스 챔피언을 이긴 것이다. 첸토비치는 다음날 한 판 더 두자고 제안했고, 딱 한 판만 두기로 했던 B박사도 승낙한다. 다음날이 되어 B박사와 첸토비치의 재경기가 시작되었다. 첸토비치는 어제와 다르게 처음부터 신중한 태도로 게임에 임했고 B박사는 어제보다 더 초조하고 긴장된 모습을 보였다. 첸토비치가 수를 느리게 둘수록 B박사는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정신분열증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고, 그럴수록 첸토비치는 자신에게 주어진 10분이라는 시간을 다 써가면서 체스를 두었다. 결국 B박사의 상태가 한계에 다가가고 있는 것을 지켜보던 '나'는 지금이라도 당장 게임을 그만두라고 조언한다. 이에 정신을 차린 B박사는 이성을 되찾고 게임을 그만두고 자리를 떠난다.

 

 처음에 얘기한 것과 같이 이 소설은 매우 오래되었고 짧지만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중간에 멈추기가 쉽지 않다. 내가 한때 체스를 좋아했기 때문에 더 재밌게 느꼈을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는 이 짧은 소설의 플롯이 오래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익숙하고 우리가 열광하고 있는 플롯이기 때문인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이 소설의 플롯이 완벽하기에 소재인 '체스'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소설을 '체스 이야기'가 아니라 '축구 이야기' 혹은 '롤 이야기' 같은 걸로 바꿔도 이 소설은 여전히 재미있을 것이다. 어쩌면 체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축구나 롤을 소재로 다뤘다면 더 많은 인기를 끌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이 소설의 플롯이 아주 재미있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요소들을 하나씩 쪼개보자면 첫번째로는 대형 여객선이라는 제한된 공간적 배경이다. 언젠가는 두 사람이 마주칠 수밖에 없도록 공간을 제한함으로써 첸토비치와 B박사의 대결이 우연이 아니라 숙명처럼 만들어준 느낌이 든다. 두 번째로는 첸토비치라는 인물이다. 태어날 때부터 체스 천재로 태어났지만 체스 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으며, 돈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체스 경기도 마다하지 않고 상대방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와 존중조차 없는 이 인물은 마치 무림 소설에서 절대 고수이자 절대 악과 비슷한 인물로 나타난다. 세 번째는 B박사라는 인물이다. B박사는 첸토비치의 반대편에 서 있는 인물로 선하고 노력하고 성장하는 캐릭터다. 무림 소설에 빗대어 보자면 요즘 말하는 '힘숨찐'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소설 속에서는 고통스러운 고문 방법으로 묘사가 되긴 했지만 호텔 방 속에서 체스 책 한 권을 가지고 끊임없이 훈련한 끝에 궁극의 체스 실력을 갖게 된 B박사는 마치 무림 소설에서 목검 하나 가지고 폐관 수련에 들어가 깨달음을 얻고 높은 경지의 무공을 익히게 된 은둔 고수 같은 느낌이 든다. 게다가 첸토비치라는 절대 고수가 평범한 민중을 상대로 체스 폭력(?)을 휘두를 때 "잠깐, 거기서 멈추시지." 하는 장면과 첫 대결에서 B박사를 무시하고 기세등등하던 첸토비치가 패배하고 당황해하는 장면은 정말 지독한 클리셰이긴 하지만 언제 어디서 보더라도 통쾌함을 주는 장면이기는 하다. 마지막으로는 화자인 '나'를 등장시켰다는 점이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이 아니라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마치 이 소설을 읽고 있는 내가 화자가 되어 여객선 안에서 두 고수의 대결을 지켜보는 것처럼 느껴져 이 소설이 더욱 흥미진진하게 느껴졌다.

 

 처음에 이 소설을 읽고 난 뒤에는 나의 '체스 이야기'를 적어보려고 했다. 나도 한때 체스에 빠졌던 적이 있어서 그때 했던 생각과 느꼈던 감정들을 적어볼까 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설의 줄거리를 되짚어가며 적는 과정에서 '이 이야기를 자기 전에 아들에게 말로 들려줘도 재미있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짧고 간결한 이야기의 어떤 점에서 나는 재미를 느꼈을까를 고민하다 생각하게 된 몇 가지 요소를 적어보게 되었다. 이 소설에 대해 조금만 더 찾아보면 흥미로운 사실들이 꽤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소설이 작가가 자살로 삶을 마감하기 전 마지막으로 쓴 소설이라는 사실, 작가가 살았던 나치 시대라는 시대적 배경이 작가에게 미친 영향, 소설 속 첸토비치와 B박사가 상징하는 인물 등...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참 많지만 여기까지 적고 마무리 짓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