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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결을 다시 생각한다 > 김영란, 2015

by Ditmars 2025. 9. 13.

<판결을 다시 생각한다> 김영란, 2015

 

 다수의견과 반대의견을 결정적으로 가른 것은 실질과 형식의 문제였다. 죄형법정주의나 조세법률주의 등은 법이라는 엄격한 형식을 갖추지 않고 형사처벌을 하거나 조세를 부과하는 것을 막기 위한 원칙이다. 엄격한 형식주의가 개인의 기본권을 보호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해온 것이다. 형식을 무시하고 실질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법률의 자의적인 적용을 불러올 수 있으므로 그만큼 위험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형식을 가장해 추구하는 실질이 명백히 드러난 경우에까지 형식주의만을 추구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때에 따라 실질을 취하기도 하고 형식을 취하기도 하는 법률 해석의 전례로 보면 이는 결국 전체적인 제도의 취지와 입법의 목적 등을 고려해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p.72>

 

 "나는 당신이 쓴 글을 혐오한다. 그러나 당신의 생각을 표현할 권리를 당신에게 보장해주기 위해 나는 기꺼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 이것이 볼떼르(Voltaire)의 말인지 아닌지는 여전히 논란거리지만 표현의 자유와 관련해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말 중 하나이다.

<p.79>

 

 표현의 자유가 지니는 의미는 '사상의 자유시장' 이론에서 찾는 것이 일반적이다. J.S. 밀(J.S. Mill)은 <자유론>에서 사상의 자유와 사회적 이익에 대한 철학적 기초를 놓았다. 그는 '억압된 의견 안에 사회가 필요로 하는 모든, 또는 부분적인 진실이 담겨있을 수 있다'며, '거짓된 신념조차 값지다'고 주장했다. '그에 관한 토론의 과정이 반대 관점의 진실을 시험하고 확인해주기 때문'이다.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을 처음으로 주장한 홈스 대법관도 "사상의 자유로운 거래야말로 궁극의 선이라는 염원에 보다 잘 도달할 수 있는 길"이며 "진실을 시험하는 최선의 기준은 시장경쟁 속에서 스스로를 수용시키는 생각의 힘"이라고 말했다.

<p.101>

 

 국가에 대한 기본권 보장 요구와 달리 개인들 사이의 기본권 충돌은 투쟁과 쟁취의 방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그보다 두 기본권 모두를 존중하는 조화지점을 찾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다양해지고 생각들도 다양해진 현대사회에서는 이런 조화지점을 찾아가는 방법론이 중요해지고 있다. 대법원의 다수의견이 곧 현시점에서 우리 사회가 다다른 합의점이라 할 수는 있겠지만, 사회의 변화에 따라 그 합의점은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는 점도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p.129>

 

 "불의의 본질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기에 그것이 우리의 눈에 바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에 있다."
- 앤서니 케네디 대법관

<p.185>

 

 '식물학자가 새로운 종을 찾기 위해 필요한 요령은 밀림에서 길을 잃는 것, 자신이 아는 지식과 방법을 넘어서는 것, 의문을 수용할 줄 아는 능력.'
- 리베카 솔닛

<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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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아는 것도 없는 나는 법에 대해 보수적이고 원칙적이고 고집스러운, 뭐랄까 단단한 돌맹이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대법원의 판결이라고 하면 이런 내가 생각했던 법의 특징들이 제일 두드러지게 나타나 더 이상 어떠한 반박도 받아들이지 않는 결론 혹은 지침 같은 느낌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판결문에 판결과 더불어 반대의견, 소수의견 등 모든 대법관의 의견을 같이 첨부한다는 점이 내게는 놀라웠다. 대법원의 판결 역시 절대적일 수 없으며 시대와 문화에 따라 의미와 가치가 달라질 수 있다는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고 이를 드러낸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 명의 대법관으로서 자신이 참여했던 판결에 대해 심사숙고하는 과정을 담은 이 책이 정말 멋지게 느껴졌다. 과거 자신의 행동과 결정에 대해 객관적인 잣대로 재평가하고 이를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사실 잘못된 행동이나 결정을 했어도 스스로 그것에 대해 변명을 하거나 미화하느라 바쁘기 마련인데... 이는 평소 자신의 행동과 결정에 견고한 철학적 토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깊은 고민과 타당한 근거를 기반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이 이 분의 전문 분야이자 업이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는 평소 생활이나 태도보다 더 엄격한 잣대가 적용되었겠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본인의 업에 이렇게 깊은 고민을 하고 진지하게 임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당장 나만 해도 나의 업인 비행을 다시 생각한다면 과연 내가 나의 지난 모든 비행에 대해 매 비행 최선을 다하고 진지하게 임했다며 떳떳하게 얘기할 수 있을까 싶다. 당장 저번 비행이었던 자카르타에서 밤새 돌아오는 비행에서 내가 진지하게 생각했던 것 중 한가지는 '얼른 집에 가고 싶다' 였으니 말이다. 이 책 제목을 빌려 나도 언젠가 비행을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아무튼... 이 책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떠올리게 하며 많은 고민을 던져줘서 내용도 재미있었고, 김영란 전 대법관의 철학과 태도도 엿볼 수 있어서 인간적으로도 배울 점이 많은 좋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