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사랑에 이끌리게 되면 황량한 사막에서 야자수라도 발견한 것처럼 앞뒤 가리지 않고 다가선다. 그 나무를, 상대방을 알고 싶은 마음에 부리나케 뛰어간다. 그러나 둘만의 극적인 여행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순간 서늘한 진리를 깨닫게 된다. 내 발걸음은 '네'가 아닌 '나'를 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 역시 사랑의 쓸쓸한 단면이 아닐 수 없다. 처음에 '너'를 알고 싶어 시작되지만 결국 '나'를 알게 되는 것, 어쩌면 그게 사랑인지도 모른다.
<p.43>
노력은 스스로 발휘할 때 가치가 있다. 노력을 평가하는 일도 온당치 않다. 일 때문에 연락하는 사람 중에, 종종 내 노력에 등급을 매기려는 이들이 있다. 그런 관심은 정말이지 부담스럽다. 상대가 부담스러워하는 관심은 폭력에 가깝고 상대에게 노력을 강요하는 건 착취에 가깝다고, 나는 생각한다.
<p.81>
"기주야, 인생 말이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어찌 보면 간단해. 산타클로스를 믿다가, 믿지 않다가, 결국에는 본인이 산타할아버지가 되는 거야. 그게 인생이야."
<p.101>
어머니를 먼저 떠나보낸 지인의 소식을 접할 때마다 머릿속에 맴도는 짧은 시가 있다. 문인수 시인의 '하관'이다. 시인은 어머니 시신을 모신 관이 흙에 닿는 순간을 바라보며 '묻는다'는 동사를 쓰지 않고 '심는다'고 표현한다. 어머니를 심는다고.
<p.124>
지금도 나쁘지 않지만 앞으로 더 좋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드는 순간 우린 살아가는 동력을 얻는다. 어쩌면 계절도, 감정도, 인연이란 것도 죄다 그러할 것이다.
<p.136>
일부 조류는 비바람이 부는 날을 일부러 골라 둥지를 짓는다고 했다. 바보같아서가 아니다. 악천후에도 견딜 수 있는 튼실한 집을 짓기 위해서다.
<p.219>
우린 새로운 걸 손에 넣기 위해 부단히 애쓰며 살아간다. 하지만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가는 것을 무작정 부여잡기 위해 애쓸 때보다, '한때 곁에 머문 것'의 가치를 재평가하고 그것을 되찾을 때 우린 더 큰 보람을 느끼고 더 오랜 기간 삶의 풍요를 만끽한다. 인생의 목적을 다시금 확인한다.
<p.227>
극지에 사는 이누이트들은 분노를 현명하게 다스린다. 아니, 놓아준다. 그들은 화가 치밀어 오르면 하던 일을 멈추고 무작정 걷는다고 한다. 언제까지? 분노의 감정이 스르륵 가라앉을 때까지. 그리고 충분히 멀리 왔다 싶으면 그 자리에 긴 막대기 하나를 꽂아 두고 온다. 미움, 원망, 서러움으로 얽히고설킨, 누군가에게 화상을 입힐지도 모르는 지나치게 뜨거운 감정을 그곳에 남겨두고 돌아오는 것이다.
<p.231>
사랑을 겪어본 사람은 안다. 진한 사랑일수록 그 그림자도 짙다는 사실을, 태양처럼 찬란하게 빛나던 사랑도 시간 속에 스러진다는 것을, 설령 사랑이 변하지 않더라도 언젠가 사람이 변하고 만다는 것을.
<p.241>
우린 어떤 일에 실패했다는 사실보다, 무언가 시도하지 않았거나 스스로 솔직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더 깊은 무력감에 빠지곤 한다.
<p.259>
베개를 베고 자세를 고쳐 누우면서 이번 주말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일'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린 무엇을 중단하거나 멈추는 데 익숙하지 않다. '나'를 헤아리는 일에도 서툴다. 소셜 미디어로 타인과 소통하는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면서도 정작 자신과 소통하며 스스로 몸과 마음의 상태를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은 드물다.
<p.291>
화향백리 인향만리
꽃은 향기로 말한다. 봄꽃은 진한 향기를 폴폴 내뿜으며 벌과 나비와 상춘객을 유혹한다. 향기의 매력은 퍼짐에 있다. 향기로운 꽃내음은 바람에 실려 백리까지 퍼져 나간다. 그래서 화향백리라 한다.
다만 꽃향기가 아무리 진한다고 한들 그윽한 사람 향기에 비할 순 없다. 깊이 있는 사람은 묵직한 향기를 남긴다. 가까이 있을 때는 모른다. 향기의 주인이 곁을 떠날 즈음 그 사람만의 향기, 인향이 밀려온다. 사람 향기는 그리움과 같아서 만리를 가고도 남는다. 그래서 인향만리라 한다.
<p.293>
모처럼 마음이 따뜻해지는 책을 읽었다. 몇 년 전의 나였다면 감성을 듬뿍 담아 적은 이런 종류의 책은 책장을 빠르게 넘기며 '오글거림'을 느끼고 경제나 철학을 다룬 인문 서적을 집어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많은 공감과 위로를 받았다. 정신없이 살아온 지난 몇 년간 내가 잊어버리고 있었던 책의 순기능 중 하나였다. 그리고 내게도 이런 여유가 생긴 것 같아 참 기뻤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주방의 식탁 위에 가끔 '좋은 생각' 이라는 작은 책자의 월간지가 놓여 있었다. 아마 엄마가 보던 월간지였을 것이다. 매 달 발간되지만 매 달 놓여있지는 않았고 몇 달을 거르다 잊을만하면 새로운 호가 놓여 있었다. 내용의 대부분은 평범한 사람들이 기고한 사연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이따금씩 좋은 시나 좋은 이야기가 실리기도 했다. 읽다 보면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하고 피식하고 웃음이 나기도 하는 사연들이 많았다.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처음으로 글을 읽고 내 마음이 따뜻해지는 경험을 한 것 같다. 그전까지 읽은 글이라고는 교과서, 과학 만화 등 어딘가 초등학생에게 유익한 구석이 있어야 하는 책들이었기에 그 경험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꼭 글이 아니더라도 말과 행동, 그 어느 것이 되었든 누군가의 마음을 위로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나 요즘은 더욱 그러하다. 내게 보여지는 세상은 남을 위로할 여유도, 자신을 위로할 여유도 없지만 모두가 위로를 원하고 필요로 하는 세상이다. 빠르게 움직이는 바깥의 현실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동안 타인과 나의 감정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 늘 후순위로 밀려나곤 했다. '먹고살기 위해서' 혹은 '먹고살다 보면' 으레 그런 것이 사회 생활인 거라고 생각했다. 무관심은 익숙해지다 못해 당연한 것이 되었고 배려 없는 말과 행동에 감정은 무뎌졌다.
'요즘에는 자신과 지인 이외의 사람은 모두 '풍경'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
며칠 전 읽은 책에 있던 말이다. 내가 간섭할 필요도 없고, 나를 간섭하지도 않았으면 하는 풍경.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그 안에서 상대방의 풍경을 보며 살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적어도 사람들에게 좋은 풍경이고 싶다. 나의 말과 행동, 글이 잠시 시간을 들여 바라봄직한 풍경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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