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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남자네 집> 박완서, 2004

by Ditmars 2021. 2. 27.

<그 남자네 집> 박완서, 2004

 

 만일 그 시절에 그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면 내 인생은 뭐가 되었을까. 청춘이 생략된 인생, 그건 생각만 해도 그 무의미에 진저리가 쳐졌다. 그러나 내가 그토록 감사하며 탐닉하고 있는 건 추억이지 현실이 아니었다. 나는 이미 그 한가운데 있지 않았다. 행복을 과장하고 싶을 때는 이미 행복을 통과한 후이다. 그와 소원해진 사이에 느낀 휴식감도 절정감 못지않게 소중했다. 긴장 뒤엔 반드시 이완이 필요한 것처럼. 그러나 한번 통과한 그 시간을 되돌리고 싶지는 않았다. 전적인 몰두가 사람을 얼마나 지치게 하는지 알고 있었다.

<p.70>

 

 나의 눈물에 거짓은 없었다. 이별은 슬픈 것이니까. 그러나 졸업식 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 있고 싶어 우는 건 아니다.

<p.96>

 

 그때는 왜 그랬을까? 후회는 아닐 것이다. 아무리 되짚어 곰곰 생각해봐도 결론은 늘 그럴 수밖에 없었다, 라고 나오니까. 문제는 후회가 아니라 못 잊는다는 데 있다. 아마도 잊기가 아까워서 못 잊을 것이다.

<p.99>

 

 문화의 차이란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문화가 아니라 한 문화가 다른 문화를 내 것보다 저급한 것으로 얕보고 동화는 물론 이해까지도 거부하는 태도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p.153>

 

 나는 이 나이까지 목격한 타인의 삶이나 이 세상 돌아가는 켯속에 대한 이해를 여러 번 수정하면서 살아왔다. 거의 자의 반 타의 반이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p.213>

 

 아기가 좋은 것을 보고 온몸으로 좋아한다는 감정표현을 할 때 인간이 행복이라 부르는 것의 원형을 보는 것 같았다.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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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에 이은 박완서 작가의 자전 소설이다. 이전 소설이 각각 1992년, 1995년에 출간된 것에 비해 마지막 자전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이 2004년에 나온 것은 조금 특별한 면이 있다. 마치 현실에서의 시간은 거의 20년이 흘렀지만 소설 속 세상의 시간은 잠시 멈췄다가 다시 흐르게 된 것만 같은 느낌이다. 지금의 나는 위의 세 권을 연달아 읽었지만 처음 두 권을 읽고 마지막 3부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꽤 오랜 시간 애가 탔을 것이다. 소설 속 시간이 잠시 멈춘 사이에 현실에서의 20년을 보내야 했을 테니 말이다.

 이 책은 박완서 작가가 결혼한 이후의 이야기이다. 어느 하나 딱히 부족한 점을 찾을 수 없었던 결혼 생활 속 꿈같았던 첫사랑과의 재회와 헤어짐이라는 줄거리를 가지고 작가는 마치 내가 그 시대에 살았던 것처럼 생생하게 이야기를 전달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당시 시대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 결혼과 가족 문화, 언어 등을 발견하는 일이 무척 흥미로웠다. 몇 번이나 인터넷을 통해 모르는 단어나 표현을 찾아봤고, 지금 우리 부모님 세대가 가지고 있는 결혼과 가족 문화에 대한 가치관이 어떤 배경에서 생겨난 것인지 짐작할 수도 있었다. 그만큼 시대에 대한 묘사가 탁월했다.

 

 첫사랑이 그리운 것이 아니라 첫사랑을 하던 풋풋하고 순수했던 그 때의 내가 그리운 것이란 견해가 있다. 그에 반해 첫사랑이 내게는 정말 특별했던,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이었기에 그리운 것이란 견해도 있다. 예전의 나는 후자의 견해에 동의를 했었다. 그러나 첫사랑으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은 전자의 견해에 더 가까워진 것 같다. 아마 그때 감정에 대한 기억은 내가 느낀 것이기에 꽤 남아 있지만, 사람에 대한 기억은 이제 많이 흐릿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사람이 했던 말과 행동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때 그 사람의 말과 행동으로 내가 느꼈던 설렘과 행복은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상대방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서로가 각자의 기억만을 가지고 있기에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첫사랑과의 재회가 오히려 의미 없게 다가오는 것이다. 

 

 작가가 적은 첫사랑의 추억에 대해 감사하다는 마음에 공감한다. 전에는 설레임, 애틋함, 그리움 등의 마음에 공감했다면 지금은 감사하다는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 그때 그 사람을 통해 내게도 첫사랑의 소중한 추억을 간직하고 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을 빌려 만일 그 시절에 그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면 내 인생은 청춘이 생략된 인생이 되었을 것이므로...